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

[23] 의사소통이란 무엇인가: 언어와 비언어

I'mFreeman 2023. 11. 6. 16:33

 의사소통 [1]: 언어와 비언어

 
우리가 어떤 것이 무엇인지 그 뜻을 말할 때, 그것만이 지닌 '속성'을 들어 말한다. 그것이 아닌 것과 구별지어 말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뜻을 말하는 것을 내포(內抱 intension)라고 한다. 나무란 말[개념]의 뜻을 밝힐 때, 나무가 아닌 것과 나무의 차이점, 나무만이 가진 속성, 곧 특성을 들어 말하는 것이다. 이 '특성'을 종차(種差 differentia)라고 한다. 종차를 들어 나무란 말[개념]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이어 나무에 포함되는 것들, 예로 "소나무, 자두나무, 오동나무...등"과 같이 나무란 말[개념]에 속하는 것들을 열거하여 그 '범위'를 한정하는 방식도 쓴다. 이것을 외연(外延 extension)이라 한다.
 
    어떤 말[개념]의 뜻을 밝힐 때 그 내포와 외연, 곧 특성과 범위를 모두 나열해야 그 말, 그 개념(槪念 concept]의 뜻을 온전히 정의(定意 definition)하는 것이 된다. 앞의 나무를 유개념, 뒤의 여러 나무를 각각 종개념이라 한다. 이렇듯, 말과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 공부의 끝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말/개념의 특성부터 말해야 한다. 그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란 무엇일까. 직립 보행을 들기도 하고, 도구나 언어의 사용을 들기도 한다. 또,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란 말도 빠지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이란 말은 동물은 동물이로되, 여타의 동물과 달리,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動物)이란 뜻이다. 사회관계 속에서 언어라는 것으로 소통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물(物)을 인간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도로는 사람이 사람 외의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가 명료하지 않다. 다른 동물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를 이루고 산다. 나름의 언어로 소통한다. 자기들만의 도구도 사용한다. 다만 그런 것들을 우리가 보지도 알지도 못할 뿐이다.
 

1. 의사소통의 과정, 소통이란 무엇인가

 
인간(human)은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그 구성원과 관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being)다. 남들과 관계함이란 남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 형성된 관계를 유지·발전시키는 것이다. 남들과의 관계 형성·유지·발전은 필연적으로 무엇을 소통함을 동반한다. 이런 '소통'의 수단이 말과 글, 곧 언어라는 것이다. 말과 글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의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과정을 조금 더 뜯어보자.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에 있는 어떤 것을 보고듣는다. 남의 말이나 동작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보고듣는 것이 있으면, 그에 대해 몸이 반응하면서 무엇을 감지(感知)한다. 생각이란 걸 하게 된다. 그 느낌이나 생각을 남도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알고 싶을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의 느낌(감정)이나 생각을 남에게 말하여 전한다. 전해받은 사람은 그 말에 반응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일 수도 있고, 생각일 수도 있고, 행동일 수도 있다. 이제는 받은 사람이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그 사람에게 말로 대답하거나 행동으로 표현한다. 이런 과정이 순환된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의사소통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여간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등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과정(process)임에는 틀림없다. 좀 더 들어가본다. 용어(用語 term/glossary)라 하는 말을 써서 다시 따져본다. 의사소통이란 서로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둘 이상의 사람이 있다. 무엇인가를 보고듣고 그것을 남에게 전하는 사람이 먼저 있다. 이 사람을 '송신자/발신자'(送信者/發信者 sender)라 한다. 이 사람이 전하는 것을 받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을 '수신자'(受信者 receiver)라고 한다. 의사소통에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상호작용, 상호교섭(interaction)이 있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 상호교섭은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그 무엇을 서로 주고받는 과정이다. 작용(action)이 있고 반작용(reaction)이 있는 것이다. 상호작용, 상호교섭에서 무엇보다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무엇'이다. 주고받고자 하는 '그 무엇'이 없다면 의사소통이란 과정이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무엇'을 '의사'(意思, message)라 한다. 뜻과 생각이다. 송신자와 수신자가 주고받으려는 의사는 '무형'의 것이다. 의사를 원형 그대로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송신자와 수신자가 의사를 주고받으려면, 의사(생각이나 감정 등)를 언어(말이나 글 등)로 바꾸어야 한다. 의사가 소통의 내용이라면, 언어는 소통의 형식이다. 소통의 수단이다. 언어상징(象徵 symbol)이요, 부호(符號 code)요, 기호(記號 sign)다. 상징 등으로 일정한 뜻을 나타내고 전하려면, 그것에 내재된 규칙을 따라야 한다. 송신자는 그 규칙에 따라 의사를 부호로 바꾸어야 한다. 부호화([en]coding)다. 부호화된 의사를 수신자에게 보낸다. 수신자는 받은 그 부호를 풀어야 한다. 해호화(decoding)다. 그 부호를 자기 생각이나 감정으로 풀어 나름대로 그 의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암호해독이다. 잘 해독하면 문제가 없지만, 잘못 해독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의사소통이란 과정에 먼저 송신자와 수신자가 있고, 메시지가 있다. 이 둘 사이에 송신자의 부호화와 보냄, 수신자의 받음과 해호화라는 상호작용이 있는 것이다. 보낸 메시지와 받은 메시지가 서로 비슷하거나 같으면 '소통'(疏通)이라 하고, 다르거나 비슷하지도 않으면 '불통'(不通)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송'신'자/발'신'자, 수'신'자란 말에서 우리는 왜 '信'(신)이란 글자를 쓰는 것일까. '信'(신) 자의 뜻에는 믿다, 믿음, 밝히다, 신부(符), 맡기다, 도장[印(인)] 등의 뜻이 있다. 符(신부)는 옛날 궁궐이나 군영(軍營) 등의 출입문을 통과할 때 사용하던 '신분증'이다. 같은 뜻의 말에 부계(符契)가 있다. 또 다른 뜻은 조선시대 각 관청의 공문서에 계인(契印)을 찍던 제도다. 도장은 성명 뒤에 한 글자를 덧붙인다. 보통 인(印)이나 장(章) 자를 쓴다. 그 대신으로 신(信) 자를 쓰기도 한다. 신표(標)란 말도 있다. 뒷날에 보고 증거로 삼기 위해 서로 주고받는 물건을 가리킨다. 신물(物)이라 하기도 한다. 대체로 믿음이란 뜻에서 파생된 말들이다.
 
    그 까닭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하나의 실례가 있다. "communication"이란 영단어를 심리학 등에서는 [의사]소통으로 옮기는 것과 달리, 통신공학에서는 통신(通)이라 옮긴다. 소통(疏通)에서 소(疏) 자를 버리고 그 대신에 통(通) 자를 앞세운 다음 '信'(신) 자를 덧붙인 말인 것이다. 통신에서 '신'(信)은 신호(號 signal)의 줄임말이다. 소음/잡음(騷音/雜音 noise)이 상대어다. 통신공학에서 신호는 통해야 하는 것, 잡음은 통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청각 자극 중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을 신호, 무시해야 하는 것을 소음이라 한다. 시각 자극 중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도형(figure)이라 하고, 무시해야 하는 것은 배경([back]ground)이라고 한다. 그러니 통신이란 말은 신호의 '전달'이요 신호의 '통함'이다. 이렇게 통신이라 쓰는데는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 여하튼 통신이든 소통이든, '트임'이요, '통(通)함'이요, '집중'이다. 믿음으로 '트임'이요, 믿음의 '통함'이요. 믿음에 대한 '집중'이다.
 
    "窮則變(궁즉변), 變則通(변즉통), 通則久(통즉구)."란 말이 있다. ”극에 이르면 바뀌고, 바뀌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주역≫ <계사전>에 있는 말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通卽不痛(통즉불통), 不通卽痛(불통즉통)."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나오는 말이다. 동양 최고의 철학서, 우리 의서의 이 말을 조금 달리 풀면, 퍽 의미 있는 말이 된다. 내가 변하면 남과 통할 수 있고, 그 관계가 오래 간다는 뜻, 남과의 관계가 통하여 오래 가려면 내가 변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소통되면 아프지 않고, 불통되면 아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좀 더 찾아보아야 하겠다.
 

 
 

2. 언어적 의사소통과 비언어적 의사소통: 소통의 방법론

 
언어(言語 language)라는 상징 체계(system of symbols)는 결국 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言(언)과 語(어)는 같이 '말씀'으로 훈(訓)하지만, 각각 말과 글을 뜻한다. 언어 곧 말이나 글로 소통하는 것을 '언어적'(verbal) 소통이라 한다.  언어란 뜻으로 language(명사)와 verbal(형용사), 이 둘을 썼으니, 구분이 필요하다. verbal이란 말은 "동사(verb)와 관련된, 단어로 구성된"의 뜻인 라틴어 단어 verbalis에서 유래되어 고대 불어 verbal을 거쳐 온 말이라는 어원이 주목된다. verbal이란 '동사와의 관련'이니, '행위'[事]를 말한다. language는 '물'(物)로서 말과 글이다.
 
    언어적 소통에 쓰이는 수단, 곧 물(物)로서 언어에 대해 먼저 말하면 이렇다. 영어로 '말'은 oral language(입으로 한 말)와 spoken language(말하여진 말) 둘이 있다. 뜻에는 차이가 없다. '글'은 written language(쓰여진 말), 이것 하나다. 이 차이가 서양문명권에서 글보다 말을 중시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말'은 우리말로 그냥 '말'이다. '구어'(口語) 또는 '음성언어'라고도 하니, 목에서 나오는 소리를 입으로 하는 말이란 뜻이다. 따로 구분하여 표현하면 '입말'이다.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그 밖의 소리(sound)와 구분하여 '음성'(音聲)이나 '어음'(語音) 또는 목소리나 말소리(voice 또는 speech sound)라 한다. '글'은 글[문자]로 쓰여진 말이니, '문어'(文語) 또는 '문자언어'라고 한다. '입말'과 구분하여, '글말'이라 한다.
 
    이 말과 글에 대한 행위[事]는 말듣기와 말하기, 글읽기와 글쓰기로 구분된다. 말을 듣기와 하기는 남의 말을 듣는 행위와 내가 남에게 말하는 행위다. 글을 읽기와 쓰기는 남의 글을 읽는 행위와 내가 글로 적는 행위다. 말듣기와 글읽기는 남의 말을 듣고 남의 글을 읽는 행위이니, '수용'(reception)의 행위다. 말하기는 자기 말을 하는 행위고, 글쓰기는 자기 글을 쓰는 행위이니, '표현'(expression)의 행위다. 글은 글읽기와 글쓰기로 구분된다. 이들 넷의 행위로 남들과 소통하는 것을 언어적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적'이라 쓰니, 그 밖에 다른 소통의 방법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은 언어'없이'도 소통한다. 말이나 글없이 '몸만'으로 소통할 수 있다. '온몸'으로 소통한다. 또, 언어와 '함께' 하여 소통할 수 있다. 언어와 '함께' 또는 '따로' 이 몸이 하는 말을 '신체언어'(body language), '몸짓언어'(gesture)라 한다. 앞의 '입말'이나 '글말'과 구분하여 '몸말'이라 한다. 몸동작이나 몸자세와 같은 몸말로 의사, 메시지, 신호를 전달하는 것을 '비'언어적(nonverbal) 소통이라 한다.
 
    비언어적 소통의 수단은 여럿이다. 셋으로 크게 분류하면, 의사소통 환경의 조건, 화자(송신자)나 청자(수신자)의 신체적 특징, 상호작용 중 화자와 청자의 행동이다.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사회적 단서, 공간, 거리, 높이, 물리적 환경/외양도 있고, 신체 접촉, 시간, 목소리도 있다. 말하고 듣는 동안의 시선을 맞추는 행동과 쳐다보는 행동, 힐끗 보는 행동의 빈도, 응시의 패턴, 동공의 확장, 눈 깜박임의 비율 같은 것도 있다.
 
    이들 비언어적 소통 수단 중에서 목소리를 따로 '준'언어(paralanguage)라고 한다.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글에도 가 있다. 말의 준언어는 목소리의 질, 고저, 크기, 말하는 속도, 말하는 방식과 함께, 리듬, 억양, 강세 등이 있다. 글의 준언어로는 필체, 단어의 공간적 배열, 종이 한 쪽에서의 물리적 레이아웃 등이 있다. 언어와 비언어 사이, 경계에 '준언어'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비언어 소통에도 '수용'과 '표현'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소통은 거의 대부분 언어와 비언어가 함께 쓰인다. 사람들이 소통함에 있어 말이나 글과 같은 언어만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소통의 상대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상대도 마찬가지다. 말하지도 글쓰기도 않는데도 어떤 메시지들이 전해진다. 하지 않음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하니, 비언어적 소통이 언어적 소통보다 단연 더 많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사회 관계에서 우리가 소통을 잘하려면, 말과 글을 모두 잘해야 하고, 비언어 소통에도 능숙해야 한다. 상대의 말이나 글의 내용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도 알아야 한다. 상대의 비언어 행동이 알려주는 메시지도 잘 포착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마음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기술(skill)이 있어야 한다. 일례로, 말을 듣는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고, 의문이 있으면 물어보아야 하고, 잘 듣고 있다는 것을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몸가짐도 잘 해야 한다. 앞에서 쓴 글 "용모 아홉"과 "생각 아홉"이 진실로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오늘부터라도 나의 언어적 소통, 비언어적 소통을 뒤돌아 보아야 한다. 상대의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게 변해 상대와 통함을 이루고 그 소중한 관계를 오래도록 이어가자. 소통으로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 소중한 사람들과 잘 살아보자.
 

2023년 11월 4일(토)
ⓒ H.M. Han

 


언어와 비언어 '소통'에 대한 글쓰기는 이쯤에서 그만둔다. '소통'과 소통에 쓰이는 '수단'에 대해 여러 말들을 하고 보니, 잘 정리된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해진 같다. '말장난'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하나하나 구분하고 이름을 붙힌 것은 본래 이어서 쓸 글을 쓰기 위해 그 기반을 놓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바로 말과 글로 소통하기 어렵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의 소통 방법, 대안적인 소통 방법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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