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22] 글: 한일(韓日)의 차이
본문 바로가기
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

[22] 글: 한일(韓日)의 차이

by I'mFreeman 2023. 11. 5.

 

 

부제: 한국인과 일본인이 글을 대하는 방식

 
한국인과 일본인은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많다. 비근한 예를 들어 보면 이렇다. 한국에서 태안반도 앞에 있던 유조선에서 기름이 유출되었을 때와 일본에서 쓰나미로 후쿠시마현[福島県]에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를 비교해본다. 일본의 초기 대응은 차분했다. '매뉴얼'대로 했다. 대책이 나올 때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그곳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고 남은 사람은 굶주리며 살아야 했다.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구호물품이 필요한 제때 후쿠시마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달랐다. 매뉴얼도 없었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자진해서 달려가 덮어놓고 걸레로 바위나 돌을 닦아냈다. 원상복구되는데 걸린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짧았다. 어느 쪽이 더 잘하고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 문제의 해결에서는 우리가 잘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삼국의 공동 문어가 한문이라는 점은 같다. 그런데 한문이란 글을 대하는 방식은 큰 차이가 있다고 조 교수는 말한다. 한문을 공부하면서 일본인은 글읽기에, 한국인은 글쓰기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중국 고전에 대해 일본인은 그 전문(全文)을 정확히 번역하고, 주해(註解), 곧 주를 달고 풀이하는 방식으로 공부했고, 한국인은 일부의 글에 대해 논의하고 자신의 의견을 글로 쓰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일본인은 글을 정밀히 읽었고, 한국인은 대강 훑어보았다. 일본인은 문장 전체를 읽었고, 한국인은 마음에 와닿는 부분만 깊이 읽었다. 한국인은 대강 훑어보고 옮긴 탓에 오역(誤譯)이나 엉뚱한 말도 많았다. 한문을 읽는 두 방법 중에서 일본인은 원문을 자기 나라 어순으로 바꾸어 읽는 방법[顚讀(전독)]을 택했고, 한국인은 한문 본래의 어순에 따라 읽는 방법[順讀(순독)]을 택했다. 이렇게 한 것은 글을 정확히 읽기에는 전독이 유리하고, 글쓰기를 익히기에는 순독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전독의 방법으로 '원문 읽기'에 중점을 두었기에 중국 고전의 '주해서'를 많이 남겼고, 한국인은 순독의 방법으로 '자기 글 쓰기'에 중점을 두었기에 수많은 문집을 남겼다.
 
    서양문물이 들어왔다. 일본에 먼저 들어오고 나중에 한국에 들어왔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유럽문명권의 책들에 대해서도 그때까지 익혀온 글읽기 방식을 십분 발휘하여, 강독하기, 주석달기, 번역하기에 주력했다. 한문 고전을 공부하던 전통 방식을 이른바 '원서'(原書)라는 유럽문명권 책읽기에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국가가 적극 나섰다. 오늘날에도 서양에서 책이 발간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번역한 책이 나온다. 국가가 나서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사정이 달랐다. '원서'로 번역하기보다 일본의 번역서로 번역한다. 중역(重譯)이다. 국가가 나서지도 않았다. 국가에서 나선 것은 최근 들어서다. 서양 명저(名著)를 선정하고 이렇게 선정된 '원서'의 번역을 국가에서 지원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나섬에 머물러 있다. 여태까지 서양 책의 번역은 학인(學人) 개인(들)의 몫이다. 국가가 적극 나선 번역사업은 우리 옛 어른들이 남긴 기록물, 특히 수많은 문집들을 우리글로 옮기는 것이다. 전에는 전통문화연구회 등의 민간단체에서 이 일을 감당했다. 지금은 한국고전번역원 등의 공공기관에서 우리의 옛글을 체계적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한국의 교육, 특히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하는 교육은 우리의 전통방식보다 일본과 더 가까운 양상이다. 대학, 특히 대학원에서 하는 교육이란 대부분 영어로 쓰여진 원서 한 두 권을 읽고 우리말로 옮겨 발표하는 식의 강의가 다수를 차지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 강의하고 그에 대해 자기 의견이나 주장 같은 것을 글로 쓰게 한 다음, 토론하는 방식의 강의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아온 전통 때문일 수 있다. 서양교육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데는 제국주의 일본의 글읽기 방식이 끼친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다. 또, 자생(自生)의 학문, 우리의 학문을 버리고 서양학문을 대거 받아들인 탓도 있다. 일본에서조차 이런 학문이 '노예의 학문'이라 하여 비판받고 있음에도, 이런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예의 학문'을 버리고 '우리학문'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의 '글읽기' 방식과도 결별하여야 한다. 자신만의 '글쓰기'를 위한 글읽기로 바꾸어야 한다. 독서'교육'도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조 교수는 말한다. 우리네 옛 어른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만의 장기인 '글쓰기' 교육을 중심으로 삼아 우리 조상들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했다.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독서법을 '쓰면서 읽기'로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뜻을 같이한다.
 
    내 사정은 이렇다. 번역과 관련된 것이다. 몇 권의 영어 '원서'를 단독으로 또는 남들과 함께 번역해서 '발간'했다. 통채로 번역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발행'된 것도 두 권 있다. 그 사정이란 것은 그 원서를 발간한 외국 출판사에 지불해야 하는 저작권료다. 또, 논문이나 책을 쓸 때 필요할 '것 같아' 그 일부를 우리글로 옮겼지만, 어디에도 '쓰이지 않은' 쪽지 같은 번역글도 엄청 많다. 서양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은 저마다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버릴 수도 없고, 남길 수도 없다. '유고'(遺稿)로 '남겨' 후학들의 수고를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넘겨' 주면 좋겠다. 하지만 오늘날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역사'가 되어버린 것을 누가 찾아 읽을 것이며, 누가 그 뒤를 이어 온전한 것으로 만들겠는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결국 폐지가 되고 말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처럼, 우리보다 앞선 외국 책이나 글은 지금도 우리글로 옮겨야 한다. 그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우리 것을 만들어야 한다. 같은 책을 읽어야 하는 남들의 수고를 덜어줄 수도 있다. 다만, 진품(眞品)과 명품(名品)만 그렇게 해야 한다. 무분별한 수입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네 선인들이 남긴 글들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 한국고전번역원 등에서 맡아 하여 낸 성과를 국학자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 제가끔 적극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살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글쓰기의 장기를 최대한 살려, 후대에 남을만한 글, 향후에 고전이 될만한 글을 쓰야 한다. 글읽기의 방식, 글읽기 교육의 방법도 바꾸어, '빠져' 읽기, '따져' 읽기를 넘어 '쓰며' 읽어야 한다. 이 블로그를 "다시, 동학"이라 이름한 것도 공부의 방향을 서양학문에서 우리학문으로 바꾸겠다는 다짐이 있어서다. 서양 것과 우리 것, 모두 공부하고, 비교하며, 둘을 때로 따로, 때로 같이 버무려 새로운 우리 것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2023년 11월 4일(토)
ⓒ H.M. Han

반응형

TOP

Designed by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