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나는 나와 내 어머니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나의 친인척 관계를 정리했었다. 한글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성별과 나이를 넣고 그림으로 그렸다. 어딘가에 파일로, 출력한 종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삼족인연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옛날 역모를 꾸미다 발각되면 '삼족을 멸한다'고 하지 않는가. 삼족(三族)이란 친척, 외척, 인척을 말한다. 친척(親戚)이란 피로 맺어진 관계, 혈연관계를 말한다. 혈족(血族)이라고도 한다. 아버지의 가족, 곧 친족(親族)과 어머니의 가족 외척(外戚)을 아울러 친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척(姻戚)은 혈연이 아닌 혼인관계로 맺어진 관계다. 친가, 외가, 처가의 식구들을 친인척, 곧 삼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친가에서 아버지 형제는 고모, 백부, 숙부가 있다(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 뵙지 못했고. 재적등본에는 11남 10녀[!]를 두셨다). 선친은 살아남은 형제들 중 셋째다. 우리 형제는 넷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심장병이 있던 누나가 돌아갔다. 얼마 전에는 바로 밑 여동생이 심근경색으로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지금 남은 형제는 막내 동생 하나밖에 없다. 우리와 배가 다른 동생 셋이 더 있다. 선친이 바람(?)나서 혼외로 낳은, 첩의 자식이다. 호적 때문에 평생을 따라다녔다. 가족관계부제도가 생기고 난 뒤 친생자부존재증명의 소를 제기하여 지금의 우라 가족관계부에는 사라지고 없다. 이제 더는 이름을 볼 일도, 만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선친은 오촌 당숙의 대를 잇기 위해 그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족보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칠성동에서 몇 해 산 것은 이로 인한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뒤고 할머니만 계셨다. 돌아가신 뒤 염하는 것부터 장례를 모두 직접 보았다. 내게 할아버지 두 분, 할머니 두 분이 계셨던 것이다.
고모는 달성 배씨 부자집 도련님과 결혼했다. 고모부는 참 젊잖은 분이었다. 고모와 고모부는 1남 4녀를 두셨다. 내게 고종 사촌 형제가 다섯인 것이다. 백부는 서울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김해 김씨인 백모와 혼인하셨다. 경북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어 교사를 몇 해 했다. 병무청에서 몇 해 근무한 것이 직장생활의 끝이었다. 생계는 백모의 몫이었다. 백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제사 지낼 때는 집을 비워주었다. 두 분 슬하에 1남 1녀가 있다. 모두 내게는 동생들이다. 숙부는 청구대(현, 영남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한 뒤 건강 문제로 2차 시험은 보지 못했다. 그 뒤 세무직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수석하여 대구지방국세청에 잠시 근무하다 곧 본청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숙모는 안동 권씨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 앞의 글에서 말한 의사(교수) 둘이 이 두 분의 아들이다. 둘 모두 나보다 나이가 적다. 내종 사촌 동생만 넷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뵌 적이 없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만 봤다. 외가에는 외숙부 1분과 이모 4분이 계셨다. 지금 생존해 계신 분은 둘째 이모와 막내 이모밖에 없다. 큰 이모는 송씨 성의 이모부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셨다. 자주 만나지 못했다. 큰 형이 둘째 이모님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탓이었다. 또, 나이 차가 많아서이기도 했다. 누나와 내게 동생 되는 막내만 알고 지냈다. 내가 시지동(고산동)에서 한 달쯤 산 것도 그 누나 시가 옆 집에 빈 방이 있어서였다. 그 이모가 어렵게, 어렵게 사시다 돌아가셨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
둘째 이모는 내게 엄마와 다름없다. 일본에서 철공 기술을 배운 밀양 박씨 이모부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셨다. 큰 형은 자주 보지 못했고 나이차 때문애 어려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작은 형은 내가 어릴 때 용돈으로 야구배트, 글러브, 공을 사주기도 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은 누나였다. 우리 엄마랑 친해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많은 물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바르게 살고 솜씨 좋은 이모부는 많은 돈을 버셨다. 선친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한 동안 우리 4형제를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 뒤 언젠가부터 나와 아내를 따로 불러 이런저런 말씀과 함께, 참으로 살갑게 대해주셨다. 마음 씀씀이 좋은 이모는 남들에게까지 많이 베풀고 사셨다. 도움을 받은 작은 형 친구 중에 의사가 되어 치료해주는 분도 있고 일본 여행을 보내드린 분도 있다. 숙부도 도움을 받았다. 우리 친할머니가 경주에서 돌아가셨을 때, 시동생까지 동원하여 시신을 모셔오고 집 앞마당에서 장사지내게 해준 것도 이모였다. 이모님이 말씀하시길, 우리 친가 사람들 중에 사람 같은 사람은 우리 고모부밖에 없다고 하셨다. 요즘도 가끔 전화하셔서 내 안부를 물어보신다. 대구에 가 있는 동안 한번밖에 찾아뵙지 못했다.
셋째 이모는 엄마 바로 위 언니다. 김천에 살던 창녕 조씨 이모부와 결혼했다. 이모부는 말수도 적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시는 젊잖은 분이셨다. 김천은 할아버지가 대구로 오시기 전에 살던 곳이다. 우리 엄마도 김천에서 태어나셨다. 이모와 이모부는 가난한 집에 시집 가서 포도 농사, 벼농사 등 억척스럽게 일하셨다. 그렇게 2남 3녀를 기르고 가르치셨다. 대구와 김천, 그 물리적 거리 때문에 결혼식이 있거나, 간혹 이모들이 김천에 가서나 반대로 이모가 대구에 오실 때 말고는 뵙지 못했다. 막내되는 형이 대구백화점에서 일할 때 조금 가깝게 지냈다. 셋째 누나와는 대구에 살 때 알고 지냈다. 강릉으로 옮긴 누나가 엄마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한 뒤로는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다. 참 정이 많다. 가난한 집에 남편 하나 믿고 시집 가서 시모를 평생 모시고 살았다. 시모가 요양원에 가셨을 때에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그 요양원에 들어가 시모를 챙겼다. 이 시대에 이른 효부(孝婦)가 또 있겠는가 싶다. 큰 아이가 걸어서 강릉까지 갔을 때, 살갑게 맞이하고, 맛난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주고, 봉투까지 주었다. 봉투에 "고모가"라 쓰여 있었다.
외숙부는 엄마 바로 밑 외동 동생이다. 기독교 모태신앙인이었던 외숙모와 결혼하면서, 개종했다.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 모두 나보다 어리다. 외(종)사촌 동생이다. 외숙이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으니, 외숙네 가족들 모두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김천에 있던 선산까지 팔고서도 그랬다. 우리가 칠성동에 살 때 50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외숙네가 산 적이 있다. 하여 매일 보고,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은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제사가 있어 가는 날이면, 언제나 만났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제사를 기독교식으로 했다. 그 후로는 엄마도, 이모들도 외갓집에 가는 일이 뜸해졌다. 그리하여 사이 좋던 관계마저 점점 멀어졌다. 급기야 우리 엄마에게 외숙모가 종교와 관련하여 심한 말을 했고, 목사가 된 외사촌 남동생이 나를 만날 것을 요청했다. 나는 거절했다.
막내 이모는 청송 심씨 이모부의 거듭된 청혼을 이기지 못해 그 분과 결혼했다. 서문시장 건어물 가게 주인의 장남이었다. 이모부는 경북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수학 교사를 했다. 이모부는 얼굴 표정만 봐도 마음씨 좋았다. 시모는 무서운 분 같았다. 얼굴에 모두 쓰여 있었다. 이모는 그 많은 시동생들을 키우고 시집 장가 보내고도 고된 시집 살이를 해야 했다. 선한 분으로 생각했던 이모부의 진면목은 얼마 전에야 알았다. 이모는 시집살이에 남편살이까지 해야 했다는 것을. 두 분 사이에 1남 2녀가 있다. 이 이종동생 셋, 외사촌 셋과 가장 친밀했다. 나이도 비슷하거나 조금 적었기에, 무엇보다 우리 엄마랑 잘 지냈던 막내 이모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석사학위를 받을 때, 결혼할 때, 박사학위를 받을 때, 이 동생들이 기쁨을 함께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소원해졌고 만난 지도 오래되었다.
아내와의 결혼으로 맺은 처가 식구 역시 많다. 빙부님과 빙모님 모두 살아계신다. 이곳저곳 통증 때문에 고생하고 계시지만, 열심히 일하여 자식들을 키워내고 온전한 정신으로 생존하고 계신 것 그 자체가 난 부럽다. 평생 일밖에 모르고 일만 하다 돌아가셨다는 처조부를 뵙지 못한 것은 진실로 아쉬운 것이었다. 그래도 처조모께서 나를 좋아해주시고 따뜻한 밥과 사랑을 주신 것은 정말 고마운 것이었다. 나도 내 나름대로 잘해 드리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나다. 그렇지만 장례 치를 때 내려가 함께 하지 못했다. 늘 마음의 짐이었다. 그 뒤에 처음 창녕에 간 날, 처가로 가기 전에 묘부터 찾아갔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은 평소 즐기시던 술 한 잔, 담배 한 개비 드렸다. 명부에서나마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 손위로 오빠 둘과 언니 하나, 손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있다. 아내는 5형제 중에 넷째다. 큰 처남은 1남 2녀, 작은 처남은 1남 1녀, 처형은 1남 2녀, 막내 처남은 3녀를 두고 있다. 우리는 2남 1녀다. 빙부님과 빙모님은 아내와 결혼한 1993년부터 지금까지 30년도 넘개 쌀, 마늘, 양파를 택배로 보내주신다, 고추가루, 참기름, 들기름 등도 오랫동안 보내주셨다. 우리 큰 아이를 한 동안 키워주셨고, 그 많은 손자들 중에서 제일 좋아하신다. 이 얼마나 고맙고도 미안한 일인가.
나 한 사람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화합하여 살면 오죽 좋겠는가. 그런데 이런 관계망이 자의든 타의든 아니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많이 망가져갔다. 친인척만이 아니다. 천륜이라 하는 자식들과도 그렇다. 대학 다닐 때 마치 독수리 오형제나 되는 양 어울려 다니던 친구 다섯과의 관계도 그렇다. 그 중의 한 사람, 내게 한 사람의 지기(知己)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도 지금은 예전과 딴판이다. 거의 매번 먼저 전화했었고, 나는 받을 때보다 피할 때가 더 많았다. 더는 하고 싶지 않은 그 모임의 일원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너 한 사람' 내 지기가 되어주면 족하다고 했다. 내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는 전화를 내가 먼저 한다. 이제서야 안다. 그 친구들과 소원해진지 오래되어 그 관계의 복원이 불가능함을. 또, 지금까지 통화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은사님이 네 분 계셨다. 지도교수님은 블로그에 쓴 글을 카톡으로 보내주신다. 내게 아낌없는 사랑과 기대를 주셨던 은사님도 한 분 게신다. 교수님은 자신과의 공동저술에 힘쓰지 않고, 이 블로그에 잡글이나 쓰고 있는 내게 크게 실망하신 것 같다. 전화를 드려도 받지 않으신다. 관계를 끊으신 듯하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사람은 섬이 아니다(Man is not an islannd)라고 한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른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어떤 영어 책에서 본 말이다. 하여간, 이런 인연, 저런 만남으로 사람과 사람이 이어져 있으니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와 이어져 있는 망(網)이 세월 따라 해지고, 느슨해지고, 풀어지고, 마침내 끊어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이번 주 초 이틀간 노상차박을 하며 나의 실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린 시절 아무 가진 것 없이 거리를 헤맬 때와는 분명 다른 상황이었다. 돈을 주면 먹을 수 있고, 찬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존적 고독을 회피하고 싶었다. 매서운 세상을 직면하고 싶었다. 내가 가고 싶고 나를 반겨줄 곳을 생각했다. 그런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실망이 극에 달하여 떠날 결심을 하기 직전에 이르렀음에도, 그 사장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진실로 기이하고도 양가적인 감정을 체험했다. 나는 선언한다. "사람, 적어도 나는 '섬' (island)이다." 이런 나의 실존적 상황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이런 엄연한 사실을 모르는 척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회피하지도 않을 것이다.
2024년 11월 23일(토)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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