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이 모두 무척 지친 날이었다. 날씨조차 스산했다. 그 자체로 마음을 불안케 했다. 첫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나간 지는 오래되었고, 겨울에 들어선다는 입동(立冬)도 한참 전에 지났다. 다음 절기는 소설(小雪)이다. 얼마남지 않았다. 지금 달력을 보고 알았다. 무덥고 무더웠던 여름날들이 언제 그랬냐고 반문하는 것 같았다. 가을이 있었나 싶었다. 이렇게 올 한 해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전날 내려간 창녕 처가에서 어제 돌아왔다. 아내와 아들·딸아이와 처형이 함께 했다. 아들이 찾은 막창 맛집을 갔다. 그 명성답게 오래 기다려야 했다. 손님이 많으니 종업원들도 경황이 없었다. 난 이른바 '채식주의자'여서 해물라면을 먹었다. 서점에서 저녁값으로 받아 모아둔 돈이 있어 기분좋게 식사비를 냈다. 육회, 뭉티기, 지례흑돼지까지 사주고 싶었다. 처형은 먼저 갔다. 우리 가족 네 명만 한참을 걸었다. 아들은 그 도중에 날 위해 배라31을 사고, 난 목표했던 곳에서 육회 한 팩만 샀다.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아들아이, 딸아이 기분좋게 술 한 잔 곁들여 맛있게 먹어주었다.
다음날 딸아이의 동기생 결혼식 참석을 위해, 또 나는 인근 지역 구경을 위해, Exco 옆 인터불고호텔에 갔다. 그 곳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매미를 잡으러 자주 갔던 곳이다. 너무 변해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나 다름없었다. 딸아이를 내려주고 서문시장을 찾아 갔다. 일요일 서문시장은 길거리 음식점과 노점만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었다. 평일과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야시장이 있는 날이다. 마침 우리가 찾아간 날이 휴업하는 1, 3주 일요일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셋이서 수제비를 주문했다. 한 그릇 잘 먹었다. 뜨거운 국물을 시원하게.
어느 사람이라고 할것도 없이, 고향이 어디든 상관없이, 그곳은 우리들로 하여금 양가의 감정을 느끼게 할 것이다. 내게 심히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대구란 곳이 내게는 기쁨과 즐거움의 고향이기보다 슬픔과 고통이 훨씬 큰 곳이다. 어제 간 두 곳은 슬픔과 후회와 상처난 마음을 되살리는 곳이다. 약을 먹지 않고 잠들어 밤새 시내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꿈을 꿨다.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가위눌러 일어나지도 못한채 온몸에 땀이 났다. 내의가 축축해질 정도였다. 정말 많이 걸은 것처럼, 종아리와 발바닥이 아팠다.
서문시장 5지구부터 걸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길가의 활엽수 잎들이 며칠 전부터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제는 상당히 많이 떨어져 여기저기에 뒹둘고 있었다. 고엽(枯葉)이 낙엽(落葉)이 된 것도 있고, 반대로 낙엽이 되어 고엽이 되어가는 것도 있었다. 나무를 올려다 보고 사진 하나를 촬영했다. 이 절기에도 푸른잎이 많았다. 떨어진 잎사귀, 마른 잎사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외롭게 살기를 희망하지 않을 것이다. 악몽을 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어떤 사람보다 그렇다. 방법을 모를 뿐이다.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껏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한다.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문제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면, 그것의 온전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면, 깨어진 그 유리잔을 붙이려 하기보다 차라리 유리잔 그 자체를 완전히 깨뜨려 버리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미 깨어져 붙인 유리잔이 또 다시 깨어질까 눈치보거나 노심초사하기는 정말 싫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삶. 제멋대로 살겠다는 말이다.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살고 싶다는 말이다. 남들의 시선이나 생각이나 감정이나 말이나 행동에 신경쓰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 어떤 호의도, 도움도, 찬사도, 이제는 원치 않는다. 그것이 간섭이나 통제로 보인다면 단호히 거부하고 물리칠 것이다. 그 어떤 고통이 뒤따른다 해도. 본시 인생이란 고통의 바다가 아니겠는가.
2024년 11월 18일(월)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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