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9] 머슴과 황소 그리고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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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h!Story: 사생애(私生涯)

[9] 머슴과 황소 그리고 삼국지

by I'mFreeman 2024. 11. 11.

어제 서문시장 주위를 둘러 다니며 이곳저곳 살펴 본 탓에 몹시 피곤했다. 그럼에도 오늘은 이른 시각에 눈이 떠졌다. 오늘도 어제처럼 집에서 족보 관련 자료를 컴퓨터로 입력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들이 출근한 뒤에도 계속했다. 한참만에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불에 누워보니, 좀 누워 있고 싶었다. 곧 어떻게든 움직여 보기로 생각을 고쳐먹고 서점을 향했다.

    어제 함께 한 택배 배송 준비를 사장이 이미 마무리하고 바깥에 내어 두었다. 오늘도 커피를 내려 구운 식빵 한 조각 먹는 것으로 서점 봉사를 시작했다. 서점 바깥 쪽 책장에 있는 잡지류와 토익 등 영어교재는 어제로 대략 정리되었기에, 오늘은 교과서와 참고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장이 내당동에 출장 다녀올 것을 부탁했다. 서점에서 실습할 학생들 문제로 어느 학교 선생님과 약속이 있어 같이 갈 수 없다고 했다. 내당초등학교 인근의 아파트에 가서 책을 받아 사진 촬영 후 사장에게 보내고 가격이 정해지면 퀵 서비스로 책을 가져오면 되는 일이었다. 집 주소와 주인의 휴대폰 번호, 퀵 서비스 업체 전화번호를 갖고 1시 20분 경 방문했다.

 

    4층에 있는 책 주인 댁에 초인종을 누르니, 연세가 많아 보이는 분이 문을 열어 주었다. 책을 보여주셨다. 언뜻 봐도 아주 오래된 책, 그러니까 희귀본 같았다.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물으셨다. 책을 모두 모은 다음 사진 촬영해 사장에게 보내면 가격을 정할 것이고, 책은 트럭에 실어 가져갈 것이라고 설명드렸다. 그런데 다시 그 말씀을 하시며 책을 빼지 말라고 하셨다. 황당한 일이었다. 다시 설명드려도 같은 말씀만 되풀이하셨다. 별 도리가 없으니 가야겠다고 말씀드린 뒤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 어른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판매대금이었다. 얼른 사장에게 전화해서 바꾸어 드렸다. 가격 흥정이 끝나고 나니, 문제가 모두 풀렸다.

 

    그제서야 나에 대해서도 물어보셨다. 나이도, 고향도, 학교도, 지금 사는 곳도 물어보셨다. 내가 연세를 여쭈니 95세라고 하셨다. 연세에 비해 아주 정정하신 것이다. 할머니랑 같이 살고 계신다고 하셨다. 자식들 얘기를 하시면서, 자녀가 몇이냐고 물어보셨다. 그 사이에 아주 친절한 분으로 바뀌신 것이다. 여러 권의 책을 종류별로 나누어 끈으로 묶는 동안, 목 마르겠다 하시며 물을 갖다 주셨다. 귤도 둘 주시며 먹으라고 하셨다. 책을 엘리베이터에 앞에 모으는 일도 거들어 주셨다. 차로 가져갈 거면, 지하 주차장이 편리할 것이라고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그것으로 일단 그 분과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퀵 서비스 업체에 전화했다. 곧 사람이 갈 것이라고 했다. 10여 분 기다리니 젊은 청년이 왔다. 차에 싣고 가는 것을 보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예전에 살던 곳을 둘러보며 서점에 갔다. 

 

삼국지 정음사본

 

    서점 앞에 그 집에서 보낸 책들이 쌓여 있었다. 사장은 약속한 여 선생과 대화 중이었다. 국비로 60퍼센트가 지원되는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었다. 서점에서 40퍼센트를 부담하면, 서점 일 특히 도서정보 입력과 택배 배송 일을 학생들에게 맡길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사장이 꿈꾸는 북로드(Book Road) 만들기 프로젝트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변호사 한 분이 오셨다 가신 뒤에야, 오늘 매입한 책들을 사장이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책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입력하던 사장이 어느 책을 가리키며 이 책은 전설이 있는 책이라 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삼국지였다.

 

    사장이 전한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약 30년 전에 팔십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책방에 찾아왔다. 무조건 3권으로 된 삼국지를 사러 왔다는 것이다. 1963년에 발간된 희귀본(정음사본)이어서 비싸다는 사장의 말에 가격은 상관없다고 그 노인이 대답했고, 결국 5만원에 구입했다. 꼭 그 책을 사야 하는 이유를 묻는 사장에게 노인이 들려준 사연은 또 이렇다. 50년 전 자신이 머슴살이 하던 '대감댁'에서 그 책을 본 적이 있고 한번 읽어볼 요량으로 빌려줄 것을 청했다. 그런데 머슴 주제에 언감생신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일이 평생의 한이 되어 무려 50여 년 동안 그 주인을 원망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한번 꼭 읽어본 뒤라야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사장이 그때 그 노인에게 설명한 말은 또 이렇다. 그 노인이 머슴살이 하던 당시에, 주인댁에 있던 그 책의 가격이 400환이었고, 그 돈은 소를 한마리 살 수 있는 거금이었기에, 1년 세경으로 보리 석 섬 받는 머슴에게 빌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라 했다. 그러니 이제 원망은 그만하고 소주 한 병 사서 묘소에 한 번 가셔서 한을 풀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이상이 3권으로 된 삼국지 정음사본에 관해 내가 사장에게 전해들은 '전설'과 같은 이야기의 대강이다. 우리네 어른들 중에 돈이나 재물과 관련하여, 사랑이나 우정과 관련하여, 특히 학교와 관련하여, 공부와 관련하여, 책과 관련하여, 이러저러한 사연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남들에게 말못할 아픔과 설움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소 팔고, 땅 팔고, 그도 아니면 품을 팔아서라도,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한 것이다. 빙부님이 그렇고, 빙모님이 그렇고, 내 어머니가 그렇다. 그런 어른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고, 오늘날의 내가 있는 것이다. 삯바느질로 번 돈을 모두 내가 공부하는데 쓴 어머니를 다음 주에 만나러 간다.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고맙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2024년 11월 11일(월)
ⓒ H.M. Han


[補] 이 날 서점에 가져온 책의 목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국민족사상사대계(4권), 단재신채호전집(4권, 상중하+별집), 단재신채호의 민족사관, 단재신채호의 사상과 민족독립운동), 고려 조선문학연구(서공생), 경상북도지명유래총람, 일본각판 퇴계전집(상하 2권), 경상북도사(상중하 3권), 대원군(5권), 임진왜란(3권), 소설조선총독부(4권), 신라시대의 언어와 문학, 박종홍전집(7권), 조선민속종합보고서(7권: 충청도[남북], 경상도[남북], 전라도[남북], 제주도), 광복이십년(10권, 5권 결), 여명십년(5권), 삼성판세계문학전집(32권, 28권 결),  삼성판세계사상사전집(26권), 동아세계대백과사전(31권), 자고가는 저 구름아(4권), 삼국지(상중하 3권), 열국지(5권), 후삼국지(5권), 사자후(3권, 1-4중 1권 결), 장길산(10권, 황석영), 불교를 가까이(1,2 2권), 명가의 족보(2: 김해김씨, 사성), 황장엽 비록공개, 라이프 콜랙션, 한방비결, 작명대전 등 작명관련서(3권), 도남조윤제박사기념논총, 00기념현대시총론(1982, 형설출판사), 용접기능사 등(2024.11.14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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