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문중(門中)은 안녕하신가요." 오늘 글로 적어보려는 내용의 주제다. "님의 문중은 안녕하신가요"라는 이 물음은 문중이 안녕할 수도 있고 안녕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가정한 물음이다. 대체로, 안녕하지 못한 문중이 많을 것임을 전제로 삼아 던지는 물음이다. 직접적으로는, 내가 속한 문중이 안녕치 못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굳이 "님"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다른 성씨의 문중에도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안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제인지 실로 궁금해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혹여 문중에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음을 보거나 들어 알고 있는 분은 짧게라도 댓글을 달아주시기를 소망한다. 요즈음 문중을 찾거나, 행사에 참여하거나, 족보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큰 기대를 걸 수는 없을지 모른다. '큰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이 말이 저버려지길 진실로 바란다.
내가 이 글을 통해 하려는 말은 문중과 또는 족보 등에 대해 평소 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할 체험담이다. 도무지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다. 그리하여 이 글을 통해 밖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당한 일이나 그로 인한 사감을 해소하기 위함은 아니다. 앙갚음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말 못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는, 나와 처지가 비슷한 분들과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라도 얻기 위함일 뿐이다. 문중의 치부를 드러내 말하는 것은 솔직히 부끄러운 것이다. 문중과 선량한 종인들의 명예까지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 몇 안 되는 나쁜 무리들과 그 추종자들에게 책임을 묻고자 이 글을 쓴다.내가 살면서 느낀 점과 문중에 참여하게 된 경위부터 먼저 말한다.
나는 내가 한가임을 싫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창씨라도 하고 싶었다. 선친이 내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행한 악행들 때문이다. 그리고 고모, 백부, 숙부 모두 한결같이 무정한 사람들이었다. 외모와 지적능력이 탁월한 멋쟁이들이었지만,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었다. 우리 4남매가 엄마 없이 살던 때, 고모가 걸 건너 살았다. 반찬 한 번 만들어준 적 없다. 백부 옆에만 있어도 얼어죽을 것 같았다. 내가 대진대 교수로 임용되어 포천에 올라와서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일가라곤 하나밖에 없는 숙부 댁을 여러 번 찾아갔다. 전화 한 번 먼저 하신 적이 없다. 그 사촌 동생들과의 만남까지 숙모가 원천 차단했다. 선친밖에 달리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들은 고'모'(母), 백'부'(父), 백'모'(母), 숙'부'(父), 숙'모'(母)라고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오히려 고모'부'(夫)가 더 다정다감했다.
내가 직접 겪은 한가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호적등본 본관 란에 있는 그 지명이 난 몹시 싫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아내가 된 여인이 석사학위를 받던 날, 지금의 장인께서 본관을 물어보셨을 때, 즉시 답하지 못했다. 정말 부끄러웠다. 파명과 *세까지 물어보셨다면,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고, 내가 직접 알아본 적도 없기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호적등본이 아니었다면, 본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아내와의 결혼을 반대한 사유가 되었다. 곧 쓰러잘 듯한 몸매의 가난한 사람, 더구나 제 뿌리조차 모른 채 대학원 공부하고 있는 사람, 그것이 당시의 내 처지였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작업을 참으로 많이 했다. 부산에 있는 어느 분과 통화를 한 적도 있다(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연락처도 없다). 간간히 사진 몇 장 올려져 있는 것과 토지수용에 대한 건만 볼 수 있었다. 집성촌이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란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2017년 금척리 경로당을 무작정 찾아갔다. 어렵사리 족보에서 내 이름을 찾았다. 그때 만난 어른들이 일가 한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왔다며 고맙다 하셨다. 드디어 뿌리를 찾고 그 망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다음 해 4월 부회장이라는 분이 전화하셨다. 정기총회였다.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고 말씀드렸다. 내년에는 꼭 참석하겠노라 말씀드렸다. 그 이듬해부터 몇 해 코로나19 때문에 정기총회는 고사하고 이사회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진 해에 묘제 참석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그 전에 인터넷 홈페이지 구축과 인터넷 족보 편찬 계획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통계청 자료(기초지자체별 인구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런 자료를 내지 않는다. 아마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일 것이다), 개인 자격으로 받은 3곳의 인터넷 족보 제작사 견적, 수운 최제우 선생 관련 자료(생모가 우리 한씨다), 그 밖의 건의 사항을 문서로 만들어 묘제에 참석했다. 우리 4남매, 삼촌 되는 백부와 숙부, 사촌 되는 동생들 외에 두 번째로 우리 한씨를 본 날이다.
묘제 참석 전부터 2017년에 가져온 족보를 한글 파일에 입력하고 있었다. 하루 10시간 정도씩(그 뒤 1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모두 입력했다).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은 어떤 빚진 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족보 구축 비용은 자료입력비가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분들의 마음을 들었나 보다. 좋은 관계를 맺고 짧게나마 그 관계를 유지했다. 이사가 아닌 나를 이사회 회의에 특별 초대했다. 그 전 날 내려갔다. 부회장님을 만났다. 채식주의자라고 말씀드렸고, 어느 집에서 따뜻한 음식을 저녁으로 사주셨다. 같이 먹으며, 양대선생 묘역의 영상제작 건도 말씀드렸다. 해보라고 하셨다. 족보 입력 비용과 영상 제작 비용 모두 주겠다고 하셨다. 족보 입력은 문중에 재능기부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날 내려가기 전 준비하면서,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시조공에 대한 글을 읽었다. 경악했다. 엉터리 번역 때문이었다. 남이 볼까 두려웠다. 내려간 날 부회장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회장님이 입력한 것이라 했다. 묘제 때 "난 검색 기능이 있거든" 하던 그 분. 그 말 하면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그날 그 분이 생각났다. 조금 오만하다고만 생각했다. 부회장님이 속한 파는 몇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를 말씀드렸더니, "저 쪽은 없는 것도 끼워넣고, 우리는 있는 것도 빼고."라고 하셨다. 난 영문을 몰랐다. 균형잡힌 입장을 취하고자 뒤에 회장님께 물어보았다. "옛날 묘제 때 마지막에 절하게 한 것 때문인데,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하셨다. 내가 족보를 입력하고 분석하면서 막연하게 느꼈던 것이 사실로 다가왔다.
그 뒤 족보 입력을 끝내고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규장각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에서 옛 어른들과 관련된 내용을 하나하나 한글파일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혼자서. 열심히 홈페이지 "종친 광장" 등에 올렸다. 부회장님은 내가 찾은 자료에 대해서도 모두 돈을 주겠다고 하셨다. 매번 돈, 돈 하는 것이 좀 싫었다. 내 선의가 돈으로 환산되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또, 어느 날에는 전화로 내게 물어보셨다. 퇴직 후에 경주에서 살 생각이 없냐고. 그럴 생각한 적 있지만, 지금은 아이들 가까이 살기로 결정했다고 말씀드렸다. "오피스텔(?) 하나 사줄테니 경주에서 살아라. 퇴직공무원들 많이 산다. 도시의 편리함과 시골의 아늑함(?)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곳이다."고도 하셨다. 그 무렵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회장님이 전화로 하셨다. 이 두 분을 통하면 만사형통인 듯했다. 그렇지만 첫 회의 참석한 날 식사가 끝나고, 부회장님, h아재, 사무국장님, 나 넷이 모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사양했다. 그건 누가봐도 특혜가 아닌가. 그렇게 할 정도로 권한을 위임받았단 말인가. 그 대신에 말씀드렸다. 먼 곳에서 오시는 분들 하루 머물다 가실 수 있도록 '게스트하우스' 하나 구입하는 건 어떠냐고.
홈페이지 개편안을 h아재가 내게 전달하며 의견을 구했다. 내 나름대로 안을 제시했다. 종합한 안이라고 다시 보내며 의견을 내라 했다. 그 안에 내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가지 사항을 그 이유와 함께 제안했다. 결국 본인 생각대로 했다. 그 사이에 계약기간이 끝난 줄도 몰라 재구축하는 통에 별도 비용이 든 것으로 알고 있다. h아재는 아재대로 돈을 빨리 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런 비용과 과정을 거치고도 홈페이지는 엉망이다. 이미 문중에 알린대로, 홈페이지를 찾으려면 뿌리정보미디어 홈페이지에서 찾아야 한다. 비번을 잊으면 회원가입시 기입한 전자우편으로 임시비번을 보낸다고 하지만 전자우편은 오지 않는다. 내가 쓴 글 중에 한 건은 h아재가 제 마음대로 삭제했다. 이유는 안다. 제멋대로 편집한 것은 여러 건이다. 이런 사정이니, 문중 홈페이지가 h아재 개인 홈페이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홈페이지 관리자 권한을 어떤 근거로 본인 친동생에게 위임했느냐는 것이다. 다른 문중 홈페이지를 둘러볼 것을 권한다. 홈페이지운영위원회가 별도 구성되어 홈페이지 등재여부를 결정한다(문절공 을과 3인할 때 지공거를 맡은 좌의정 성석린공의 창녕성씨 홈페이지가 그렇다).
이렇듯, 족보입력과 홈페이지 관련 등의 문제로, 좋았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회장 명의로 나를 족보편찬위원회 위원(편집에서 뒤에 입력으로)으로 위촉하고도 회의 한번 하지 않았다(회의에 날 부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날 보니 해촉되었고 h아재가 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300만원을 줄테니 족보 입력 파일을 usb에 담아 보내라 했다. 응하지 않았다. 내 큰 아이에게도 전화하고, 내게는 내용증명 우편까지 보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답답해서 결정해달라고 쓴소리를 한 때문일 것이다. 돌아온 회장님 말씀은 "우보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 뒤에 들리는 말들은 나를 파렴치범으로 모는 말들이었다. 문중 돈을 탐한 것이라고. 사무국장님 아지매가 우울증 같아 돕는다는 뜻으로 내 병이 우울증라 했더니, 이제는 날정신병자 취급을 하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자. 옛 어른들 왕조실록 기사와 승정원일기 기사 등을 모두 한글파일로 옮겨 출력하여 만든 파일 3권(충파 이자원자, 덕자후자, 덕자전자 등 몇 분만 작은 글씨로 해도), 청주한씨종친회에서 발간하고 내가 구입한 책 2권(2004년[?] 당시 20만원), 그 밖의 책 1권(사무국장님께 부탁했으나 할 줄 모른다 해서 2-3만원에 구입)을 기증한 사람, 문서로만 회의하는 것이 안타까워 빔 프로젝트 얘기했더니 다룰 줄 모른다기에 퇴직시 집에 갖다놓온 OHP(이것도 돈 준다 했다)를 차에 싣고 문중에 기증한 사람, 1000쪽 넘는 족보입력과 관련 자료들을 검색해 한글 파일 만들기를 봉사하겠다는 사람, 모든 것이 끝난 뒤 정포선생실기와 유선선생문집까지 컴퓨터로 입력하고 한국고전번역원에 문의한사람, 억대 연봉 마다하고 명예퇴직한 사람이 문중 돈을 탐해 포천에서 경주까지 들락거릴 것인지. 내게도 먹고 살만큼의 돈은 있다. 곧 사학연금도 받는다. 무엇보다 돈을 최고 가치로 생각지 않는다.
문제는 결국 돈이었다. 공금 문제였던 것이다. 문중 돈은 눈먼 돈,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주인,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무리들인 것이다. 정관상 목적사업인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이, 토지수용으로 받은 돈으로 야간에 건물 사들이고, 토지매입하고, 온갓 토목건축 사업을 진행했다. 이제 조상 묘까지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 보상금을 받기도 전에, 쓸 궁리부터 한다. 이런 자들이 설치고 다니니 선량한 종인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 그대로다. 우리 문중에도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분들 많다. 인구수에 비하자면 차고 넘친다. 그 분들이 무서워 피하겠는가. 더러워 피하는 것이다. 나는 끝장 볼 생각이다. 멈추지도, 쉬지도 않을 것이요, 좌고우면하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문중이 제자리에 정립(正立)하는 그날까지 직진(直進)만 할 것이다.
처가에 가니, 한 놈이 다 털어먹고 묘제 전 벌초할 일꾼에게 줄 수고비조차 없다고 한다. 출문하기로 하고 각서 받고 공증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가끔씩 나타난단다. 후흑학을 제대로 익힌 것이다. 지금 우리 문중 사람들 대다수는 그저 속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좌고우면하는 자들, 관망하는 자들, 진실로 말하건대, 정신차리기 바란다. 떡고물 얻어먹는 사이에 대들보 빼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불충은 두 마음을 품는데서 온다. 본당부터 처단하고 잔당을 다스려야 한다. 문절공께서 종친 이양우에게 죄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들 무리를 발본색원하여 처단하여야 한다. 족보에 적색으로 표기하고, 영세불환복시킬 자들이다. 이 상소를 세종대왕께서 받아주지 않자, 문절공 '마침내 사직'하셨다(조선왕조실록, 유선선생문집 참조할 것). 이땅에서 우리 한가는 모두 문절공의 후손이다. 문절공께서 보여준 선비의 기개를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정신으로 묘제를 다니는지 지금 내가 그 무리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2024년 11월 24일(일)
ⓒ H.M. Han
[참고] 이 글은 초고 상태다. 보충할 내용이 많다. 모두 증빙할 근거를 갖고 하는 말이다. 소설(fiction)이 아니라는 말이다. 글로 적고 싶지 않은 사실(fact)을 쓰느라고 애썼다는 말을 내게 해주고 싶다.
'Life h!Story: 사생애(私生涯)'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 나의 두류산금룡사답사기 (0) | 2024.12.01 |
---|---|
[18] 나의 어린 시절, 나의 학창 시절 (0) | 2024.11.29 |
[13] 사람은 섬이다 (8) | 2024.11.23 |
[12] 귀향과 귀가 (1) | 2024.11.20 |
[11] 초겨울, 낙엽과 고엽 (0) | 2024.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