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들레[蒲]
한문으로 써여진 원문이 있다면, 한글로 옮긴 글의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 또, 그 해석의 지평이 더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서 원문을 찾아 글머리에 먼저 두는 까닭이다. 민들레가 갖추었다는 아홉 가지 덕, 곧 포공구덕(蒲公九德)은 그 유래 또는 출전과 원문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오전 시간 내내, 한국학중앙연구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등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실마리조차 얻지 못했다. 구덕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적은 글들은 차고도 넘치는데, 어찌하여 그 글의 출전을 밝힌 글, 원문을 실은 글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구전(口傳)된 이야기일뿐 문헌에 기록되지 못한 것일까. 찾아내지 못한 때문일까. 아무튼 이곳저곳에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 있는 글들 중 하나를 취하여 내 나름대로 몇 마디 보태고 빼서 아래에 옮겨 놓는다. 원문을 발견할 때까지...이렇게 비워둘 수밖에 없다.
마소[馬牛]와 수레에 짓밟혀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니, 인(忍)의 덕을 지님이요,
뿌리를 자르거나 캐내어 며칠을 말려도 싹이 새로 돋아나니, 강(剛)의 덕을 지님이요,
돋아난 잎사귀 그 수만큼 그 차례 지켜 한 송이씩 꽃을 피워내니, 예(禮)의 덕을 지님이라.
여린 잎부터 뿌리까지 온몸을 사람에게 바쳐 갖가지 쓰임새가 있으니, 용(用)의 덕이요,
꽃마다 많은 꿀을 품고 있어 벌과 나비가 떼로 모여드니, 정(情)의 덕을 지님이요,
자른 잎과 줄기에서 하얀 젖이 나와 어미의 사랑을 베푸니, 자(慈)의 덕을 지님이라.
약재로 쓰면 머리카락을 검게 하여 늙은이를 젊게 하니, 효(孝)의 덕을 지님이요,
어떤 종기라도 그 다스림에 있어 민들레 즙이 으뜸이니, 인(仁)의 덕을 지님이요,
홀씨 바람 타고 멀리 가서 스스로 번식하고 융성하니, 입(立)의 덕을 지님이라.
이 아홉 덕목(德目)을 포공구덕(蒲公九德)이라 이름한다.
2. 매미[蟬]
頭上有緌則其文也(두상유유즉기문야) / 含氣飮露則其淸也(함기음로즉기청야) / 黍稷不享則其廉也(서직불향즉기렴야) / 處不巢居則其儉也(처불소거즉기검야) / 應候守節則其信也(응후수절즉기신야)
머리 위에 갓끈[緌]이 있음, 곧 선비됨[文]이요,
기(氣)를 품고 이슬[露]을 마심, 곧 맑음[淸]이요,
곡식[黍稷] 먹기를 향유하지 않음, 곧 염치[廉]요,
거처할 집[巢]을 만들지 않음, 곧 검소함[儉]이요,
기후[候]에 응하여 절기[節]를 지킴, 곧 믿음직함[信]라.
위의 두 글을 인용한 것은 그 두 글에서 글감으로 쓰인 민들레 그리고 매미와 나름의 인연이 있어서다. 어린 시절과 근자에 맺은 인연에 기대어 기필(起筆)한 것이다. 이 글의 가르침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시대를 지혜롭고 슬기있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들'(values)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이 땅의 옛 선인(先人)들이 자연으로부터 배운 덕목을 내 것으로, 나의 삶의 지표로 삼기 위한 것이다.
민들레와 그 덕을 소재로 삼아 어느 분이 쓴 글을 오래 전에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민들레"가 아홉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했다. 그 뜻이 마음에 들었다. 전각(篆刻)할 요량으로 그 기사를 잘라냈다. 그때 스크랩해둔 그 글은 찾지 못하겠다. 각석(刻石)에 새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아내가 들에서 캐온 민들레가 우리 집에 있다. 흰색 꽃을 피우는 민들레다. 아내는 토종 민들레라 했다. 흔치 않다며 귀히 여긴다. 토종 민들레는 귀한 약재로도 쓰인다고 했다. 이 땅에서 쉬이 볼 수 있는, 노랑색 꽃을 피우는 민들레는 외래종이라 했다. 이 땅 밖에서 굴러 들어온 노란 민들레가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았던 흰 민들레를 몰아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올 9월 초에 은사님이 지은 시가 카톡으로 왔다. 그 시를 읽으며, 그 시어(詩語)로 쓴 "매미"에 눈길이 갔다. 대구시 칠성동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 사이 그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검단동의 어느 야산에 매미를 잡으러 갔다. 그곳에 매미가 많다는 소문을 들어서다. 매미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을만큼, 높은 나무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매미가 울어댔다. 해질무렵까지 나무에 올라 신나게 매미를 잡았다. 되돌아오니 온동네가 매미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우리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 엄마에게 졸라댔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마리씩 분양했다. 10원씩 받았으니, 내 생애 첫 돈벌이였다.
그리고 그저께 장포(藏抱) 박재교(朴載敎) 선생, 카톡으로 포란회(抱卵會) 전시를 알렸다. 전처럼 달력이 나온 모양이다. 사진에 있는 주제가 '禪'脫(선탈)처럼 보였다. 그 뜻을 알 수 없었기에, 이번에도 전처럼 여쭈어 보았다. "매미의 허물 벗음"으로 이곳 포천을 벗어나 서울에 입성함의 뜻을 담았다 하신다. '禪'이 아니라 ' 蟬'이었던 것이다.
이 땅의 옛 선비들은 《대학(大學)》에 보이는 '격물'(格物), 곧 사'물'의 이치를 궁극에까지 이르는, 곧 깊이 파고드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이를 '관물'(觀物)이라고도 했다. 사물/외물을 세밀히 보고[觀] 살폈다[察]. 그리고 관찰하여 얻은 생각을 글로 적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남긴 문집(文集)에 실린 글들 중에 상당수는 이러한 관찰의 결과물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어디 민들레, 매미 뿐이었겠는가. 물[水], 불[火], 돌[石] 하나에 이르기까지 관찰하고 글로 적었다. 그것이 지닌 덕도 말했다.
작자와 출전은 알 수 없지만, 민들레의 구덕도 관물의 결과일 것이다. 민들레를 포공(蒲公)이라 하였기에 제후의 반열에 올렸다. 하여 민들레의 구덕을 포공구덕(蒲公九德)이라 한다. 중국 서진(西晉)의 시인 육운(陸雲, 262-303)이 관물하여 지은 시라는 <한선부>(寒蟬賦)에서는 매미의 오덕을 군자가 지녀야 할 다섯 덕목(德目)이라 했다. 제목에서 한선(寒蟬)은 매미를 지칭한다. 시의 서문[序]에서는 '지극한 덕'을 갖춘 곤충[至德之蟲]이라 했다.
민들레의 덕 아홉, 곧 인(忍),강(剛), 예(禮), 용(用), 정(情), 자(慈), 효(孝), 인(仁), 입(立)과 매미의 덕 다섯 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은 서로 겹침이 없다. 모두 합하면 덕목의 수가 14가지다. 아름다운 사람을 미인(美人), 착한 사람을 선인(善人), 향이 있는 사람을 향인(香人), 성스러운 사람을 성인(聖人), 현명한 사람을 현인(賢人)이라고 하는 것처럼, 각각 그 뒤에 사람[人]을 붙여 본다.
인인(忍人): 참을 줄 아는 사람
강인(剛人): 강건한 사람
예인(禮人): 예의바른 사람
용인(用人): 쓰임새 많은 사람
정인(情人): 정다운 사람
자인(慈人): 사랑하는 사람
효인(孝人): 부모를 기쁘게 하는 사람
인인(仁人): 어진 사람
입인(立人): 스스로 일어선 사람
문인(文人): 글을 아는/무늬(결)가 고운 사람
청인(淸人): 맑은 사람
염인(廉人): 염치 있는 사람
검인(儉人): 검소한 사람
신인(信人): 믿음직한 사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본다. 3개나 5개를 고른다면, 어떤 사람됨을 고를 것인가.
2023년 10월 22일(일)
ⓒ H.M Han
여담(餘談)으로 말한다. 내가 많고 많은 사물의 덕 중에 민들레와 매미의 덕을 굳이 제일 먼저 택한 것은 덕목의 갯수에 기인한다. 민들레의 덕은 9개이고, 매미의 덕은 5개다. 1-5는 생수(生數=난 수)라 하고, 6-9는 성수(成數=된 수)라 한다. 그러니까 5와 9는 각각 생수와 성수 중에 가장 높은 수다. 양수 셋(1, 3, 5)와 음수 둘(2, 4)이 생수다. 6은 2+4 또는 1+5, 7은 2+5 또는 3+4, 8은 3+5 또는 1+3+4, 9는 1+3+5로 '된' 수다. 동양 최고의 '철학'서라는 주역(周易)에 입문하기에 앞서, 선이해(先理解)가 필요한 배경지식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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