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4] 이규보의 작호법(作號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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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抄書): 베낀 남의 글

[4] 이규보의 작호법(作號法)

by I'mFreeman 2023. 11. 10.
李叟欲晦名(이수욕회명) 。思有以代其名者曰(사유이대기명자왈) 。古之人以號代名者多矣(고지인이호대명자다의) 。有就其所居而號之者(유취기소거이호지자) 。有因其所蓄 (유인기소축)。或以其所得之實而號之者(혹이기소득지실이호지자) 。

 

이씨 늙은이[李叟]가 이름[名]을 숨기고자 그 이름을 대신할 만한 것을 생각해 보았다. 옛 사람은 이름을 호로 대신한 이가 많았다. 거소로 호를 한 이도 있고, 소유물로 호를 한 이도 있고, 소득의 실상으로 호를 한 이도 있었다.

 

若王績之東皐子(약왕적지동고자) 。杜子美之草堂先生(두자미지초당선생) 。賀知章之四明狂客(하지장지사명광객) 。白樂天之香山居士(백악천지향산거사) 。是則就其所居而號之也(시즉취기소거이호지야) 。 

 

이를테면, 왕적(王績)의 동고자(東皐子), 두자미(杜子美)의 초당선생(草堂先生), 하지장(賀知章)의 사명광객(四明狂客), 백낙천(白樂天)의 향산거사(香山居士)는 거소로 호를 한 것이다.

 

其或陶潛之五柳先生(기혹도잠지오류선생) 。鄭熏之七松處士(정훈지칠송처사) 。歐陽子之六一居士(구양자지육일거사) 。皆因其所蓄也(개인기소축야) 。

 

도잠(陶潛)의 오류선생(五柳先生), 정훈(鄭熏)의 칠송처사(七松處士), 구양자(歐陽子)의 육일거사(六一居士)는 소유물로 호를 한 것이다.

 

張志和之玄眞子 (장지화지현진자) 。元結之漫浪叟(원결지만랑수) 。則所得之實也 (즉소득지실야) 。

 

장지화(張志和)의 현진자(玄眞子), 원결(元結)의 만랑수(漫浪叟)는 소득의 실상으로 호를 한 것이다.

 

李叟異於是(이수이어시) 。萍蓬四方(평봉사방) 。居無所定(거무소정) 。寥乎無一物可蓄(요호무일물가축) 。缺然無所得之實(결연무소득지실) 。三者皆不及古人 (삼자개불급고인) 。其於自號也(기어자호야) 。何如而可乎(하여이가호) 。
이씨 늙은이는 이와 다르니, 사방으로 떠돌아다녀 거소가 일정하지 않고, 한 물건도 소유한 것이 없으며,
소득의 실상도 없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그 자호(自號)를 무엇이라 해야 좋을꼬.

 

或目以爲草堂先生(혹목이위초당선생) 。予以子美之故(여이자미지고) 。讓而不受(양이불수) 。況予之草堂(황여지초당) 。暫寓也(잠우야) 。非居也(비거야) 。隨所寓而號之(수소우이호지) 。其號不亦多乎 (기호불역다호) 。
어떤 이가 초당선생을 지목하였지만, 나는 두자미 때문에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더구나 나의 초당은 잠깐 우거한 곳이요 상주한 곳이 아니다. 우거한 곳으로 호를 삼는다면 그 호가 또한 많지 않겠는가.

 

平生唯酷好琴酒詩三物(평생유혹호금주시삼물) 。故始自號三酷好先生(고시자호삼혹호선생) 。然鼓琴未精(연고금미정) 。作詩未工(작시미공) 。飮酒未多而享此號(음주미다이향차호) 。則世之聞者(즉세지문자) 。其不爲噱然大笑耶(기불위갹연대소야) 。翻然改曰白雲居士(번연개왈백운거사) 。
평생토록 오직 거문고와 술과 시, 이 셋을 매우 좋아하였기에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자호하였다. 그러나 거문고를 잘 타지도 못하고, 시도 잘 짓지 못하고,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하면서, 이 호를 누린다면 세상에서 듣는 사람들이 크게 웃지 않겠는가. 그래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고쳤다.

 

或曰(혹왈) 。子將入靑山臥白雲耶(자장입청산와백운야) 。何自號如是(하자호여시) 。曰非也(왈비야) 。白雲(백운) 。吾所慕也(오소모야) 。慕而學之(모이학지) 。則雖不得其實(즉수부득기실) 。亦庶幾矣(역서기의) 。夫雲之爲物也(부운지위물야) 。溶溶焉洩洩焉(용용언설설언) 。不滯於山(불체어산) 。不繫於天(불계어천) 。飄飄乎東西(표표호동서) 。形迹無所拘也(형적무소구야) 。變化於頃刻(변화어경각) 。端倪莫可涯也(단예막가애야) 。油然而舒(유연이서) 。君子之出也(군자지출야) 。斂然而卷(염연이권) 。高人之隱也 (고인지은야) 。作雨而蘇旱 (작우이소한) 。仁也 (인야) 。來無所著 (내무소저) 。去無所戀(거무소련) 。通也 (통야) 。色之靑黃赤黑 (색지청황적흑) 。非雲之正也 (비운지정야) 。惟白無華 (유백무화) 。雲之常也 (운지상야) 。德旣如彼 (덕기여피) 。色又如此 (색우여차) 。若慕而學之 (약모이학지) 。出則澤物 (출즉택물) 。入則虛心 (입즉허심) 。守其白處其常 (수기백처기상) 。希希夷夷 (희희이이) 。入於無何有之鄕 (입어무하유지향) 。不知雲爲我耶 (부지운위아야) 。我爲雲耶 (아위운야) 。若是則其不幾於古人所得之實耶 (약시즉기불기어고인소득지실야) 。
어떤 이가 이르기를, “자네는 장차 청산에 들어가 백운에 누우려는가. 어찌 자호를 이처럼 하였는가.”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그런 것이 아닐세. 백운은 내가 사모하는 것일세. 사모하여 배우면 설사 그 실상을 얻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거기에 가깝게는 될 것이네. 무릇 구름이란 물체는 한가히 떠서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매이지 않으며, 나부껴 동서로 떠다녀 그 형적이 구애받은 바 없네. 경각에 변화하면 그 끝나는 데가 어딘지 알 수 없네. 유연(油然)히 펴지는 것은 곧 군자가 세상에 나가는 기상이요, 염연(斂然)히 걷히는 것은 곧 고인(高人)이 세상을 은둔하는 기상이며, 비를 만들어 가뭄을 구제하는 것은 인(仁)이요, 오면 한 군데 정착하지 않고 가면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은 통(通)이네. 그리고 빛깔이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검은 것은 구름의 정색이 아니요, 오직 화채(華彩) 없이 흰 것만이 구름의 정상인 것이네. 덕과 빛깔이 저와 같으니, 만일 저를 사모해 배워서 세상에 나가면 만물에 은덕을 입히고, 집에 들어앉으면 허심탄회하여 그 흰 것을 지키고 그 정상에 처하여 무성무성(無聲無色)하여 무한한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면,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알 수 없을 것이네. 이렇게 되면 옛 사람의 소득의 실상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或曰(혹왈) 。居士之稱何哉(거사지칭하재) 。曰(왈) 。或居山或居家(혹거산혹거가) 。惟能樂道者而後號之也(유능낙도자이후호지야) 。予則居家而樂道者也(여즉거가이악도자야) 。
어떤 이가 “거사라고 칭함은 어떤 경우여야 하는가.” 하고 묻기에, “산에 거하거나 집에 거하거나,
오직 도(道)를 즐기는 자라야 거사라 칭할 수 있는데, 나는 집에 거하며 도를 즐기는 사람이다.” 하였다.

 

或曰(혹왈) 。審如是(심여시) 。子之言達也(자지언달야) 。宜可錄(의가록) 。故書之(고서지) 。
어떤 이가 “이와 같음을 알고 보니 자네의 말은 통달한 것일세. 기록해 두어야겠네.”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적는다.
ⓒ 한국고전번역원

 


    이 글은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글이다.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20권 <어록>(語錄)에 실려 있는 글의 전문이다. 이 글을 내가 알게 된 것은 ≪선현(先賢)들의 자(字)와 호(號)≫(1997, 전통문화연구회)라는 책을 통해서다. 강헌규의 석사학위논문(1970)과 신용호의 석사학위논문(1977)을 그대로 묶어 한 권의 단행본으로 낸 책이다. 이 책은 이규보의 글 중 앞 부분만 인용되어 있다.
 
    위의 원문과 한글역문은 모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글역문은 1978년 김동주라는 분이 한 것이고, 그 뒤  1990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원문을 표점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글역문 중에 일부는 내가 조금 고쳤다. 원문이 장문이니 역문도 장문이다. 읽기의 편의를 위해 끊어 읽어본다. 그 내용은 자호(自號)하기로 마음먹은 까닭, 작호법(作號法) 넷과 그 예거(例擧),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號)에 대한 문답, 그 경위를 기록으로 남긴 까닭으로 나뉘어진다.
 
    [1] 이 글의 작자는 자기 이름을 숨기기 위해 작호한다고 했다. 작호하려는 이를 이수(李叟)라고 칭했다. 두 번 나온다. 이수(李叟)는 성(姓)이 이(李)인 늙은이(叟)라는 뜻이다(성[姓]과 씨[氏]는 다르다). 물론 이규보 자신이다. 자기 이름을 숨기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니, 한글역문에서처럼 "이수(李叟 이규보(李奎報))"라고 명시할 필요가 없다.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나는 옮긴 이가 보탠 것을 빼고, 이수도 "늙은 이씨"로 바꾸었다. 공교롭게도, 제43권에 실려 있는 서(序)와 연보(年譜)를 쓴 이도 이수(李需)다. 작호를 말했지만, 실상은 개호(改號), 곧 호를 고침이다. 평생 거문고와 시와 술을 심히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 호를 삼았지만,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여겨 호를 고치기로 한 것이다.
 
    [2]  옛 사람들의 전례를 들어, 호의 쓰임새와 호를 짓는 방법[作號法] 셋을 말했다. 호의 쓰임새는 이름[名] 대신에 사용[代用]하는데 있다 했다. 기실, 휘피(諱避)라는 말처럼, 이름[名]을 이름하는 것을 꺼리고 피하기 위하기 위해, 관례 때 지은 자(字)로 이름했고, 그 자의 이름함마저 피하게 되어 호(號)를 짓게 된 것이다. 후대의 일인지 몰라도, 이름으로써 호로 삼는 것[名爲號]도 예가 없지 않다. 이름[名]에 쓰인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는 것도 작호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무튼 작호의 방법 셋은 ㉮ 그 거처하는 곳을 취하는 것[就其所居], ㉯ 그 쌓은 것에 인하는 것[因其所蓄], ㉰ 그 얻은 바의 열매로써[以其所得之實] 짓는 것이다. 이 세 방법으로 호를 지은 사람과 그 호를 각각 예시했다. 다시 말해, ㉮에 4인, 곧  왕적(王績), 두자미(杜子美), 하지장(賀知章), 백낙천(白樂天), ㉯에 3인, 곧  도잠(陶潛), 정훈(鄭熏), 구양자(歐陽子), ㉰에 2인, 곧 장지화(張志和), 원결(元結)을 들었다. 모두 '9명'을 들었다. 자신까지 포함하면 '10명'이 된다.
 
    [3] 어떤 이가 제안한 호를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마침내 백운거사(白雲居士)로 자호하기로 결정했다. 그 말을 들은 어떤 이의 물음과 호 지은 이의 답함이 오고갔다. 흰구름, 곧 백운(白雲)에 대해 장광설을 폈다. 거사(居士)는 거처하는 곳이 어디든 오직 '도(道)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짧게 단언했다. 이런 문답을 듣고 있던 이가 탄복하며, '가히 기록으로 남길만하다' 상찬했다. 그리하여 이 글을 적게 되었다고 했다.
 
    이 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구름과 그 덕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다. 옛 어른들은 자연과 외물(外物)을 '그냥' 보는 법 없이, 가까이 다가가 세밀히 보고[觀] 요모조목 하나하나 살펴[察] 그 속에서 배움을 얻었다. 이런 관찰(觀察)로써, 구름의 성질을 알아낸다. 군자의 기상을 읽어낸다. 인(仁)과 통(通)의 덕을 찾아낸다. 이것은 모두 옛 어른들의 공부법, 곧 격물(格物) 또는 관물(觀物)이라는 공부의 결과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보고듣는다. 닿고 맡고 맛보는 것도 너무도 많다. 천지자연만이 아니라 인공의 외물까지 온 세상이 우리를 자극한다. 그리하여 고개 들어 하늘을 보는 것도, 고개 숙여 땅을 보는 것도 잊어 '버렸다'.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것'마저도 그냥 보기만(視 see) 할 뿐 세밀히 살펴보지(觀 look) 않는다. 그저 들을(聞 hear) 뿐 귀기울여/귀에 담아 듣지(聽 listen) 않는다. 생각도 깊이 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지난날은 틀렸고 지금이 옳은가[昨非今是]. 사람이 발달(development)하는 것일까. 진보(progression)하는 것일까.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이런 물음에 성실하고 정직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2023년 10월 23일(월)
ⓒ H.M. Han

 

 [사족 또는 여담, 더 알아볼 거리]

  1. 왕적(王績, 589?-644)은 수말당초 사람이다. 자는 무공(無功)이고, 호가 동고자(東皐子)다.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 땅으로 돌아와 동고산(東皋山)에 은거하여 농사짓고 살았다. 술을 좋아했고, 금(琴)을 잘 탔다.
  2. 두자미(杜子美)는 그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1-770)다. 시성(詩聖)이라 불린다. 자미(子美)는 그의 자고,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759년 성도(成都)에 정착하고 이곳에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3. 하지장(賀知章 659-744)은 오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 소흥(紹興)으로 돌아가 살았다.
  4. 백낙천(白樂天)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다. 자가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이다. 나이 71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5. 도잠(陶潛)은 전원시인(田園詩人) 도연명(陶淵明, 365-427)이다. 도잠(陶潛)은 명이고 연명(淵明)은 호다. 동진 후기에서 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다.
  6. 정훈(鄭熏)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바이두(baidu.com)에서 찾은 것은 이렇다. 자는 자포(子溥)요, 말년에 거처하던 곳의 이름을 은암(隱巖)이라 하고 그 뜰에 작은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심고 '칠송처사'(七松處士)라 자호하였다. 후세에 그 집을 '칠송가'(七松家), 곧 소나무 일곱 그루가 있는 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7. 구양자(歐陽子)는 송나라 문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높여 칭한 것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이다.
  8. 장지화(張志和)는 당나라 때 은사(隱士) 장구령(張龜齡)이다. 시인이자 화가였다. 자는 자동(子同)이고, 지화(志和)는 당 숙종(肅宗)이 내린 사명(賜名)이다. ≪현진자≫(玄眞子)를 남겼다. 도교에 대한 저서다.
  9. 원결(元結 719-772)은 하남성 노산(魯山) 사람으로 중당(中唐) 시인이다. 자는 차산(次山), 호는 만수(漫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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