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曰(공자왈), 生而知之者(생이지지자), 上也(상야). 學而知之者(학이지지자), 次也(차야). 困而學之(곤이학지), 又其次也(우기차야). 困而不學(곤이불학), 民斯爲下矣(민사위하의).
≪논어≫(論語) 제16편 <계씨>(季氏) 제9장에 실려 있는 공자 말씀이다. 짧게 하신 말씀이고, 어려운 한자를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 말씀에 대한 고금(古今)의 주석과 풀이가 여럿 있다. 말씀이 짧고 쉬운 한자로 쓰여져 있음에도, 제대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한우가 전통적인 번역이라고 한 것과 배움[學]에 초점을 둔 풀이라고 한 주희가 양시(楊時)의 말로 대신한 것부터 먼저 본다.
[전통적 풀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면서 아는 자는 최고요, 배워서 아는 자는 다음이요, 통하지 못한 바[困]가 있어 그것을 배우는 자는 그 다음이요, 통하지 못하면서도 배우려 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최하가 된다."
이 풀이는 사람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수준을 말한 것으로 읽힌다. 생지자(生知者), 학지자(學知者), 곤학자(困學者), 곤불학자(困不學者), 네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성인 공자가 이렇게 앎과 배움으로 사람의 수준을 말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과연 그런 것일까.
[주희의 풀이] "나면서부터 아는 것[生知]과 배워서 아는 것[學知]으로부터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배우는 것[困學]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그 기질이 같지 않으나 앎에 미쳐서는 똑같다. 그러므로 군자는 오직 배움을 귀하게 여기니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도 배우려 하지 하면 최하[下]가 되는 것이다."
이 풀이는 앎[知]과 배움[學]에 세 수준이 있다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생지(生知)와 학지(學知)와 곤학지(困學知), 곧 배움 없이 아는 것, 배워야 하는 것, 당하여 아는 것이다. 그 수준은 달라도 결국 앎에 이르면 다 같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셋으로 나눈 뒤에, 당하고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것이 최하라고 했으니, 이 역시 앎의 방식과 배움의 여하에 따라 사람의 수준에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풀이를 '배움'에 초점을 둔 해석이라면서, '앎'에 초점을 맞추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한 이한우의 풀이를 본다.
공자는 말했다. "나면서 아는 자는 최고요, 배워서 아는 자는 다음이요, 겪고 나서야 그것을 배우는 자는 그 다음이요, 겪고 나서도 배우려 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최하가 된다." (이한우 ≪논어를 논어로 풀다≫(2012, 해냄)
앎[知]에 초점을 두었다는 이 해석도 결국 앎과 배움 여하에 따라 마치 사람이 네 부류의 사람이 있는 듯이 풀이하고 있다. 앞의 둘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더구나 "민사위"( 民斯爲)란 말을 적절히 풀어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논어 전문을 자신 나름으로 재분류하고 새롭게, 요즈음 말로 옮긴 다음의 글을 본다.
공 선생이 터놓고 이야기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가 최상이고, 후천적으로 배워서 아는 이가 그 다음이며,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야 배우려는 이가 또 그 다음이다.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앞뒤 꽉 막힌 사람이 가장 아래니라." (신정근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하는 시간≫(2011, 21세기북스)
선천적으로 아는 이, 후천적으로 아는 이를 구분하고 있다. 후천적으로 아는 이를 다시 배워서 아는 이와 어려움을 겪고 배워 아는 이로 구분하고 있다. 어려움을 겪고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을 "앞뒤 꽉 막힌 사람"이라 했다. "민사위"(民斯爲)란 말을 그렇게 풀이한 것이다. 이 역시 '사람'을 넷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넷의 우리말 옮김을 보아도 그 뜻이 석연하지 않다. 내가 '배우고도, 당하고도, 알지 못하는 사람'인 걸까. 여하튼 명쾌하게 읽히지 않는다. 그 까닭은 대략 이런 것이다. 첫째, 지(知)에서 시작해서 학(學)으로 갔다가 불학(不學)으로 끝난다. 지(知) 곧 "앎"에 초점에 있는지, 학(學) 곧 "배움"에 초점이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둘째, 자(者)란 글자가 앞의 두 구절에만 나오고, 뒤의 구절에는 없다.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사람"[人]으로 풀이한다. 셋째, "민사위"(民斯爲)란 말은 맨마지막에만 나오고 앞의 셋에는 나오지 않는다.
나의 이설(異說)은 이렇다. 먼저 "민사위하"(民斯爲下)란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사대부(士大夫)도 아닌 민(民), 곧 백성들조차 곤경에 처하고도 배우는 않음을 최하로 삼는다는 것이다. 아예 앎과 배움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자(者)는 사람의 뜻이라기보다 '것'(thing)이나 '상태'(condition)으로 읽는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예가 있지 않은가. 곧 "농사라고 하는 '것'이 천하(하늘 아래)에서 큰 근본이다."라고 풀이하지 않는가. 자(者)는 "것"[物]이요 "상태"다.
앎은 지식(knowledge)이요 지혜(wisdom)다. 지식이나 지혜는 태어나면서 아는 것[생지(生知)]도 있고, 배워야 아는 것[학지(學知)]도 있고, 곤경한 처지가 되고서야 아는 것[곤학(困學)=곤지(困知)]도 있는 것이다. 태어남과 함께 아는 것도 있고, 배움 없이 성장과 함께 그냥 알게 되는 것들도 있다. 배가 고프면 울 줄 알고, 엄마 젖꼭지를 빨 줄 알고, 기분이 좋으면 웃을 줄도 안다. 최상(最上)이다.
배워야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글을 읽는 것, 수학 문제 푸는 것 같은 것들이다. 중상(中上)이다. 평소에는 잘 모르고 살다가 어떤 시련이나 곤경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아는 것도 있다. 부모님의 마음이나 은혜 또는 가족의 소중함 같은 것이다. 중하(中下)다.
또, 태어나서도, 배우고도, 당하고도 알지 못하는 것도 있지 않은가. 천명(天命), 성(性), 도(道)와 같이 형이상(形以上)의 어떤 것 말이다. 그렇더라도 배움의 끈을 놓는 일[불학(不學)]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알려고도, 배울려고도 하지 않음이 최하(最下)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 최고요, 배워서 아는 것이 그 다음이요, 시련을 겪고서야 배우는[=아는] 것이 또 그 다음이다. 시련을 겪고서도 배우지 않는 것, 그것을 백성들도 최하로 삼는다."
나는 위와 같이 풀이해 본다. 생(生)이 앎을 낳고, 학(學)이 앎을 낳고, 곤(困)이 학(學)과 지(知)를 낳는다. 곤(困)이 불학(不學)과 부지(不知)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배워서 알아야 한다. 지식·지혜는 생지(生知)하는 것, 학지(學知)하는 것, 곤학(困學)·곤지(困知)하는 것, 곤불학(困不學)·곤부지(困不知)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다시 사람의 품격 또는 수준과도 연관지어 본다. 생지(生知)하는 사람도 있고, 학지(學知)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곤학(困學)·곤지(困知)까지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곤불학(困不學)·곤부지(困不知)에 머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최고의 호학자(好學者)를 자처한 공자 말씀이 이런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23년 11월 11일(토)
ⓒ H.M. Han
[일기] 이 글을 쓰는 동안, 아내는 김장 준비를 했다. 어제(11.10) 배추를 뽑아 소금에 절였다. 밤늦게 나가 뒤집었던 모양이다. 아내 홀로 아침 내내 김장 준비를 했다. 이 글을 블로그에서 발행한 올린 뒤에 조금 도왔다. 작은아들과 어제 온 아들친구가 아내를 도와 버물이는 작업을 많이 도왔다. 큰아들이 촬영마치고 집에 왔다. 아내가 준비한 보쌈을 아이들과 먹으며 즐겁게 보냈다. 큰아들이 오랫만에 당구치러 가자고 했다. 아내는 일하느리 지쳐서 동행하지 못했고, 아들친구는 볼일 있어 함께 못했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내가 오랫동안 운전했다. 삼부자만 함께 당구장에 갔다. 두 게임을 했다. 첫 게임은 작은아들, 두번째 게임은 큰아들이 이겼다. 모두 진 내가 당구비를 내려 하니, 현금은 받지 않는다고 해서 큰아들이 냈다. 노래방에 갔다. 참 오랫만이었다. 아들 둘이 나와 눈높이를 맞추려 한 것인지, 80년대 애창곡들을 불렀다. 친구 같았다. 셋이 고르게 노래를 불렀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음 한 켠에는 멀지 않은 곳에 계신 엄마 생각이 났다. 집에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내와 두 아들은 다시 조금의 술을 마셨다. 모두 지켜 이내 자리를 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딸아이가 함께 하지 못해 아쉬운 하루였다. 아내와 의논하여 아이들 모두 모이는 날, 호 풀이 잔치를 하기로 했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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