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교육은 학문인가." 지금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진다. '사연'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매사 그 나름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까닭도 있고, 목적도 있고, 계기도 있다. 지금 "특수교육은 학문인가"라고 자문(自問)하는 것 또한 나름의 까닭이 있고, 목적하는 바도 있고, 계기도 있다. 곧 나로 하여금 이런 물음을 품게 만든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또, 이 그 물음을 이렇게 글로 적는 행동을 하게끔 만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한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힘을 동기(動機 motive)라고 한다.
동기를 흔히 자동차의 엔진(engine)과 운전대(steering wheel)에 비유한다. 엔진은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힘, 곧 동력을 만들어낸다. 운전대는 자동차가 가려는 곳, 그 곳에 정확히 갈 수 있도록 방향을 알려준다. 때로 가고자 하는 곳을 바꾸어야 할 때 그 방향을 수정하기도 한다. 엔진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우리를 실제로 데려다 주는 에너지 같은 것이라면, 운전대는 그곳에 정확히 데려다 주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도 엔진과 운전대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실로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면, 그럴만한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는데도 힘이 필요하고 그 정리된 생각을 말이나 글을 쓰는데 필요한 힘도 있어야 한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 그 내면에서 솟구치는 힘이기도 하고, 우리가 보고들은 남의 말이나 글 또는 행동에서 힘을 얻기도 한다. 앞의 것을 내발(內發)의 동력이라면, 뒤의 것은 외발(外發)의 동력이다. 생각한 바를 정확히 행동으로 옮기려면, 그 방향을 바르게 설정해야 한다. 스스로 정한 방향을 스스로 새로 고침해야 할 때도 있다. 남의 말이나 글 또는 행동이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동력의 발생과 조절도, 방향의 정함과 바꿈도 자타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내가 자문자답하려는 이 물음은 옛 은사님들로부터 특수교육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때 새싹 같이 피어난 것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싹을 고이 간직하고 키워왔다. 외발에서 내발로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 과정에서 공부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물음을 잊지 않고 마음 속에 품고 있다. 그간 답을 구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내가 쓴 책에서 나름대로 그 답을 시도해 보았다. 미진한 점이 많았다. 10여 년 전에는 논문으로 쓸 계획까지 세웠다. 논문 하나 쓰고자 이곳 저곳 참 많이 기웃거렸다. 이런저런 자료도 찾았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읽은 어떤 책이 내가 구상한 계획에 어떤 실마리를 주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위에 그 자료들이 나란히 그대로 있다. 여태까지 그 해답을 정리하지 않아 글로 적지 못했다. 이 글에서 그 구상과 계획만이라도 먼저 밝혀두려 한다. 나중에 내 생각을 모두 밝히기 위한 단서로 삼는다.
1. "특수교육, 학문도 아냐."
지금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게 한 외발의 동기부터 먼저 말한다. 앞의 내발화된 학문적 동기와는 다른 사연이 있어서다. 직접 체험한 사연이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모교의 은퇴한 어느 노교수가 15년 여전에 내게 건넨 말이 모멘텀(momentum)이 된 것이다. 짧게 말했지만 그 여운은 큰 것이어서, 편린의 글이 될지 몰라도, 그때 그 경험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남기려 하는 것이다. 그때 그 분은 나의 모교 특수교육과 소속의 여러 교수들 중의 한 분이다. 내가 대진대 아동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그때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때는 천안에 있는 백석대에서 한국지적장애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그날 그곳에서 진로교육·직업재활 관련 학회의 학술대회도 열렸다. 나는 앞의 대회에 참석했고, 그 교수는 뒤의 대회에 참석했던 모양이다. 공교로운 것이다. 오전 발표가 끝난 뒤에 이어진 점심시간도 끝나갈 무렵이었다. 대회장에 다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교수도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 선생, 요즘 공부 좀 한다며... 특수교육, 학문도 아냐!"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 교수가 그런 말을 한데에는 여러 가지 사연과 사정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적인 것도, 간접적인 것도 분명히 있다. 대학과 대학원 석·박사학위과정을 모교에서만 했으니, 그 세월이 9년이다. 석사학위과정에 입학하기 전, 한 학기를 무적(無蹟)으로 있었고, 박사학위과정 중에 한 학기를 휴학한 채 보냈으니, 10년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또 1년 반을 묘교에서 보냈으니, 11년 이상의 세월을 모교에서 보낸 것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인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들었겠는가. 좋은 경험만 있었겠는가. 관계가 좋기만 했겠는가.
그런 일들은 다음에 써서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지금은 그 교수가 내게 한 그 말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만 글로 적으려 한다. 내가 하려는 말은 대강 이런 것이다. 남의 공부를 왜 비아냥대는 듯이 말하는가. 왜 어른답게 처신하지 못하는가. 내게만 그렇게 하는 것인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그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교수의 애제자와 나는 이런저런 문제로 많이 부딪혔다. 저작권 관계 문제도 있었고, 어떤 '학과의 폐지'와 관련하여 격렬한 글들이 오고갔다. 그런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기회가 그날 온 것이다. 그렇게 말로 표현한 감정은 그저 그렇게 흘려 듣고 잊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애제자는 지금 고인(故人)이 되었다.
실로 내가 그 교수의 대답을 듣고 싶고, 꼭 들어야 하는 물음은 이런 것이다. 특수교육과에 '소속'되어 '오랜 세월' 동안 남들이 선망하는 교수란 신분으로 잘 살지 않았는가. 학위 수여 여부를 놓고 나름대로 큰 권한과 권력도 행사하지 않았는가. 구하기 어려운 외국 자료로 권세도 부렸지 않았는가. 그 긴 세월 동안 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제자도 두었고, 게 중에 특수교육과 교수가 된 이도 많지 않은가. 자기가 '기른' 제자들이 소속하고 있는 특수교육과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과에 소속되어 학생들에게 특수교육을 가르치고 강의하는 것, 연구하고 논문 쓰는 그 제자들이 하고 있는 일도 "학문"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조차 부정하는 것인가. 자신의 공생애에서 기반이 되었던 것을 이제와서 왜 부정하는가, 그 까닭이 진실로 궁금하다. 그 교수가 어느 때 기회가 되어, 이 물음에 답했으면 좋겠다. 성실하고 정직한 답을 들어야겠다. 답을 듣기 위해서라도 '한 번' 만나야겠다.
2. 교육과 특수교육
이제부터 스스로 던진 의문에 대해 말해본다. "특수교육은 학문인가." 교육(敎育)이란 인간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을 것이다. 고대로부터 먹을 것을 구하는 방법, 맹수로부터 몸을 지키는 방법 같은 것을 가르치고 배웠을 것이다. 그런 지식과 기술과 지식을 후세대에게 전수하는 것에서 교육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말로, 체험으로 교육했을 것이다. 그러다 문명이 발생하고 글이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부터 교육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었을 것이다. 문자와 지식의 전수가 중심이 되고 개인교수의 형태로 교육했을 것이다. 특권층의 자제 소수의 사람들이 소요하면서 가르치고 배웠을 것이다.
일부 특권층에게만 허락되던 교육이 19세기 말 국민국가의 출현과 의무교육의 제도화와 함께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 사적 교육에서 공적 교육으로 전환되었다. 사회와 국가의 필요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대중교육의 시대가 열렸다. 국가의 발전이 국민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모든' 국민에게 교육하기 시작했다. 교육을 받을 권리가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었다. 동시에, 자녀를 학교라는 곳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모든 국민의 의무가 되었다.
이와 같은 교육의 대중화는 사람들마다 능력이 똑같지 않음을 알게 했다. 개인차의 발견이다. 능력이 특출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자란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차이를 연구해야 했다. 그런 차이의 정도를 측정해야 했다. 그리하여 지적능력을 측정하는 도구가 개발되었다. 지능검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결과 나이가 같은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너무도 다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교육의 편의와 고도화를 위해 평균적인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로 모아 교육해야 했다. 그런 사람들을 교육할 방도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균 이하의 사람들을 따로 모아 교육함으로써, 특수학급(special class)이 생겨났다. 특수학급을 시작으로 특수학교(special school)가 생겨났다. 특수학교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세워짐으로써 기숙학교(residential school)의 형식이 대세를 이루었다. 시설(institution)이나 병원(hospital) 같은 곳에서 이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교육을 받게 된 사람들은 대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장애가 있어 보통의 방법으로 교육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특별히 다른 방법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특수교육(special education)이 탄생했다. 장애인의 배제로부터 특수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고안해냈다. 교육하는 장소도 다양화했다. 교육의 목적도 달리 했다. 목적이 다르니 내용도 달리 했다. 교육내용을 달리 하니 방법과 수단도 달라야 했다. 점자가 발명되었고, 수화로 교육의 수단으로 삼았다. 점자로 읽고 쓰는 방법도 교육의 내용이 되었다. 수화도 가르쳐야 했다. 배우는 속도가 느리니, 교육연한도 늘려야 했다. 성취의 평가 기준도 다르고 평가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했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도 따로 훈련시켜야 했다. 일반하여 말하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 특수교육을 받는 사람이 보통의 사람과 다르니, 교육의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특수교육은 특별히 다른 교육이 되었다. '특수'교육이라 했기에, 그 이전 보통의 교육을 '일반'교육이라 했다. 특수교육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면, 그 정체성(identity)을 밝히려면, '특수'한 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일반'교육이든 '특수'교육이든, 교육은 그 대상이 되는 인간의 행동을 계획적으로 변화시키는 행위다. 교육이란 인간의 행위는 그 교육이 어떤 것이든 무엇인가 공통되는 것이 있다. '보편성'(universality)이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차별되는 무엇인가도 있다. '특수성'(speciality)도 있다. 예를 들건대, 국어교육과 수학교육은 교육하는 행위[事]란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가르치는 것[物]이 국어와 수학이라는 차별성도 있는 것이다.
'특수'교육 역시 그 밖의 다른 교육과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특수교육만이 가진 '특수성'을 분명히 밝히는 것으로 그 정체성을 해명할 수 있다. '특수'교육은 '일반'과 여러 모로 다른 점, 특수성이 있다. 이 모든 '특수성'은 그 교육을 받는 대상이 '장애인'이라는 '특수성'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로 인해, 특수교육의 목적, 내용, 방법, 평가, 곧 '교육과정'(敎育課程 curriculum)이 다른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다르고, 가르치는 장소도 다르고, 가르치는 기간도 달라지는 것이다. 교육의 과정(process of education) 모든 면이 다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연구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3. 학문: 교육학과 특수교육학
학문(學問)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말한다면, 학문이란 배움[學]이요, 물음[問]이다. 학문이라 하니 거창한 무엇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배움이요 물음일 뿐이다. 배워서 묻고, 물어서 배우는 것이다. 줄여 말하면, 학(學), 곧 배움이다. 학문학(學問學), 곧 학문 일반에 대한 학문을 깊게 연구한 조동일 교수는 ≪우리 학문의 길≫(제2판, 1996)에서 "학문"을 이렇게 정의했다. 학문이란 진실 탐구의 행위요, 논리로 이루어짐, 실천의 지침인 이론을 마련함, 독백이 아닌 대화라고 했다. 이 넷을 상세히 설명했다.
또 다른 책 ≪인문학문의 사명≫(1997)에서는 학문을 수입학, 시비학, 자립학, 창조학, 이 넷으로 구분하고 각각 2방향이 있다 했다. 이른바 "사학팔방"(四學八方)을 논했다. 앞의 셋을 넘어 창조학을 해야 하고, 그 방법으로 생극론(生克論)을 제시했다. 그리고 개별 학문을 지칭하는 말은 있지만, 학문 일반을 지칭하는 말이 서양언어에는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wissenshaft란 말이 있지만, 우리의 학문이란 말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했다. [discipline이란 말이 도야(陶冶)나 훈육(訓育) 외에 학문의 뜻도 있지만(학문중심 교육과정을 discipline-centered curriculum이라 함), 통칭하는 용어로는 쓰이지 않는다.]
서양에서 개별 학문은 접미사 -ology, -nomy, -ics, -[s]try 등을 붙여 표현한다. 최근에는 studies도 많이 쓰인다. psychology(심리학), sociology(사회학), atronomy(천문학), atonomy(해부학), economics(경제학), mathematics(수학), chemistry(화학), geometry(기하학), child studies(아동학), American studies(미국학) 등이 그 예다. 여기에도 우리와 서양 간에 차이가 있다. 서양은 개별학문마다 이름이 다르지만, 개별학문 전체를 말하는 말은 없다. 우리는 학문 전체를 학(學)이라 하고, 개별학문은 어느것 할것없이 "○학"과 같이 학 앞에 그 개별학문의 대상을 붙여 표현한다. 교육과 교육학은 영어로 구분하지 않는다. 둘 다 education이다. pedagogy를 교육학이라고 옮기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예는 너무 많다. 문헌/문학(literature), 역사/역사학(history)은 그 일부일 뿐이다. 특정 학문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대학 내의 학문공동체를 "○'학'과"라 하는 것과 달리, "교육'학'과" 외에는 모두 "○교육과"라 한다. 일반대학의 교육/사범 계열 학과에만 이렇게 쓴다. 전문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므로 모두 "○과"다.
교육학은 학문인가. 물론 학문이다. 사회과학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묻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육학이 여타의 학문과 비교하여 그 성격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과학, 심리학, 사회학, 교육학 등이 철학에서 분과된 것은 그 연구에서 사용한 '방법'이 다른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심리학은 1879년 독일에서 분트(Wilhelm Wundt)가 인간의 심리 연구에 종전의 '내성'(內省 introspection)이 아닌 '실험'(實驗 experiment)이란 방법을 적용한데 기원을 두고 있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라고 정의한다. '과학적'이란 학문하는 방법이나 태도를 말한다. 곧 실험이란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기에, 과학의 일종인 되는 것이다.
심리학은 '개인의 심리 현상'을(사회심리학이란 분야도 있지만), 사회학은 '사회 현상'을 연구한다. 연구의 '대상'이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학문으로 분과된 것이다. 연구하는 '방법'의 다름(곧 "과학적" 방법)과 연구 '대상'의 다름이 학문의 조건이다. 교육학은 '교육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교육학이 연구하는 대상이 여타의 학문과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다. '교육 현상'에 여러 것이 개입되기에 꼭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기도 하다. 교육이란 현상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사회학과 중첩된다. 그 상호작용에서 각자의 심리가 개입된다는 점에서 심리학과도 겹쳐진다. 무엇보다 연구하는 독자적인 '방법'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차별성이 뚜렷하지 않다.
교육학은 독일 철학자 헤르바르트(Johann Friedrich Herbart 1776-1841)가 1861년에 정립한 교육학 체계에 기원이 있다. 그가 한 유명한 말 "교육의 목적은 윤리학에서, 교육의 방법은 심리학에서"(실천윤리학과 표상심리학을 말한다)는 교육학의 기초학문을 둘로 밝힌 것이다. 교육학의 인접학문에서 목적과 방법을 빌려쓴 것이다. 교육의 방법은 관리(management), 수업(teaching), 훈육(discipline)의 셋으로 나누었다. 수업의 단계를 준비(prepation), 제시(presentation), 연합(association), 체계화(systematization), 적용(application)의 다섯으로 나누어 제시했다. 그 이후,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오늘날 교육학은 교육철학, 교육사학, 교육심리학, 교육공학, 교육사회학, 교육행정학, 교육법학, 교육정치학...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교육과 인접학문의 결합이다. 교육학 고유의 것은 교육과정학과 교육평가학(측정학) 정도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교육학 산하의 하위학문을 이루고 있다. 그런 만큼, 교육학의 성격이 차별화되지 않는 것이다.
교육학이 연구하는 '교육 현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교육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교육내용,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 그 목적의 달성 정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연구하는 교육학 분야가 교육과정학이다. 교육학은 곧 교육과정학인 셈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순수하게 교육학의 논리만 작용하지 않는다. 교육목적을 정하는 것부터 국가와 사회의 필요가 개입되고, 교육할 내용의 범위와 순서를 정하는데도 학습자의 발달 정도까지 고려된다. 또,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 모두 법률과 제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홍우 교수는 교육학을 '보는' 교육학과 '하는' 교육학으로 구분했다. '교육 현상'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 교수-학습활동이 연구하는 현상의 중심이다. 이것이 '하는' 교육학이다. 교육목적·목표,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평가 등이 '하는' 교육학이다. 교육과정학이 '하는' 교육학의 밑바탕이다. 그 밖의 교육학은 '보는' 교육학이다. 조동일 교수의 '학문'에 대한 정의를 대입하면, 교육학이란 학문은 '교육 현상'이란 교수-학습활동 실제 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 그 진리란 객관적이고 검증할 수 있는 사실, 사실과 사실 사이에서 법칙이나 원리여야 한다. 그런 법칙과 원리로 모든 교육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일반화된 이론을 도출해야 한다. 이론 정립을 위해 치열한 논쟁이 있어야 한다. 이론을 정립하여 교육 실천이 나갈 방향의 지침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육학이 학문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특수교육의 이론화(theorizing)는 불가피한 것이다. 필요하며 가능하다. 이미 특수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특수교육의 '특수성'에 대한 논의로 '정체성'도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이런 선행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삼아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특수교육학의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다. 시급한 일이다. 급하다고 아무렇게나 할 일은 아니다. 학습자가 가진 장애의 범주별로 이론화하고 있는 관행과는 과감히 작별해야 한다. 그런 관행은 특수교육의 '특수성'이 주로 학습자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수교육학이 서양학문인 탓에 서양의 분류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결과일 것이다.
교육학의 하위학문 분류는 이와 다르다. 특수교육학은 교육학의 한 분야이므로 교육학의 하위학문 분류방식과 다르게 할 것이 아니다. 교육학의 하위학문 분류 방식과 같이 해야 한다. "특수교육(학) vs. 교육(학)"이 아니라 "특수교육(학)@[또는 in] 교육(학)"이기 때문이다. 하위학문의 "장애별" 분류에서 교육학의 "하위학문별" 분류로 전환해야 한다. "시각장애아교육학, 청각장애아교육학..."에서 "특수교육법학, 특수교육교육과정학..."으로 바꾸어 특수교육학의 학문체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같은 시각장애라 해도 필요한 것이 서로 다를 수 있고, 녹음도서의 필요성 같은 것은 오히려 맹인과 읽기 학습장애인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또, 일반학교 일반학급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장애인을 교육하는 통합교육이 대세가 된지 오래되었다. 특수교육과 일반교육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특수교육개론서도 이런 방식으로 집필해야 한다. 지금처럼 모든 장애를 다 포함해서 그 정의부터 교육까지 다루는 책으로는 특수교육학에 입문하기 어렵다. 눈과 귀부터 뇌까지, 우리 몸만 아니라 마음의 작용까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체계 정립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특수교육학"의 "학"(學) 아래에 "론"(論)을 두는 것이다. 교육학의 하위학문처럼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특수교육종사자론(특수교육 교사, 관련서비스 제공자 등), 특수교육대상자론(장애와 특수교육요구 등), 특수교육교육과정론(목적론, 내용론, 방법론, 평가론), 특수교육시공간론(기간/시기와 장소), 특수교육법학론"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분류한 선례도 있다. 그 예를 참고하여 내 생각을 조금 더 다듬어 보려 한다. 정리되는대로 글로 쓸 것이다.
2023년 10월 27일(금)
ⓒ H.M. Han
'들안길과 SE&SS: 공생애(公生涯)'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4K님과의 만남: 4. 청구선생전 (2) | 2023.11.23 |
---|---|
[5] 4K님과의 만남: 3. 평촌선생전 (2) | 2023.11.21 |
[4] 4K님과의 만남: 2. 송담선생전 (2) | 2023.11.19 |
[3] 4K님과의 만남: 1. 심재선생전 (7) | 2023.11.14 |
[1] 학습장애인의 수적 차이, 한미(韓美) 간에 왜 이리 큰가 (1) | 2023.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