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의 '참된 만남'(encounter)으로 여태까지 내가 존경하고 내게 가르침을 주시는 '영원한 은사님'(eternal teacher)이 네 분이다. 네 분 모두 성씨가 김(Kim)씨다. 그래서 4K 교수님이라 한다. 이 글에서 4K 교수님에 대해 간략히 적고 나의 경험담을 적으려 한다. 내가 쓴 글이 혹여라도 은사님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을 이미 염려하여 아호(雅號)와 영문 이니셜로 지칭한다.
이 네 분과의 '단순 만남'(meeting)은 이렇다. 심재(心齎) KJK교수님은 철없던 시절 대학 1학년 때, 유일한 전공과목이었던 "특수교육개론" 수업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평촌(坪村) KBH교수님은 2학년 때 수강한 교직과목 중 하나였던 "교육철학및교육사" 수업을 들으며 뵈었다. 송담(松潭) KBK교수님은 3학년 때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 만남의 계기가 되었고, 4학년 때 "학습장애아교육"이란 과목을 배웠다. 이 세 분은 내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은사님이다. 청구(靑丘) KYW교수님은 박사학위과정에서 모든 교과목을 이수한 뒤에 만났기에,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늘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고마운 분이다. 내가 사숙(私淑)하는 은사님이다. 지금 이 네 분 모두 정년은퇴 하셨다. KBK교수님은 영천에서 사시고, 세 분은 경산에서 사신다. 매달 한 차례 만난다고 하셨다.
1. 심재선생전(心齎先生傳)
서울 분이다. 1937년 생이시다. 아호는 심재(心齎)다. 교수님과 대구대에 많은 보탬을 주셨던 경북대 김학수 교수님께서 지어 주신 호다. 중학교에 다닐 때 6.25전쟁이 나서 피난열차 지붕에 타고 대구에 피난오셨다. 1961년 계명대 교육학과를 졸업하시고, 1964년 경북대 대학원에서 교육학으로 석사학위를, 1980년 대구대에서 특수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사셨다. 어느 분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천주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셨다. 침산제일교회 장로로 오래도록 봉직하셨다. 지금은 원로장로로 계신다. 자제분들이 미국에 유학 가고 뒷바라지를 위해 사모님도 미국에 가서 사셨다. 교수님은 장모님을 모시고 사셨다. 장모님이 소천(召天)하실 때까지 그렇게 모시고 사셨다. 방학이 되고 교육대학원 수업과 교원연수 등이 끝난 뒤에야 미국(시애틀)에 다녀오시곤 했다. 미국에서 엽서를 보내 안부를 전하실 때도 있었다.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1964년 대구대 교수가 되셨고, 2002년 정년퇴직을 하셨다. 그 기간 동안, 그리고 은퇴하신 뒤까지 특수교육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특수교육의 학문적 기초를 놓으셨다. 한국 특수교육의 발전을 위해 정말 수없이 많은 일을 하셨다. 예비 특수교육 교사교육과 교육현장의 교사교육·연수, 그리고 학문후속세대를 기르는 일에 매진하셨다. 교외 강연도 많이 다니셨고, 논문과 저서도 참으로 많이 쓰셨다. 영친왕비 되시는 이방자 여사와의 교분도 깊어, 여사님이 운영하시던 자행회에 연구로 많은 기여를 하셨다. 이들 연구보고서는 한국특수교육의 초창기 역사자료다. 소중히 소장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부 정책과제도 많이 수행하셨다.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연구의 연구책임자를 세 차례나 역임하셨다. 교사용 지도서와 학생용 교과서를 연구하고 집필하신 것도 많다. 한국특수교육백년사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 편찬에서도 책임을 맡았다. 특수교육에 관한 귀한 사진을 수집하여 사진집도 몇 권 내셨다. 아시아지적장애연맹(AFID) 회장으로 1993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11차 아시아지적장애대회(ACID)를 성공적으로 치뤄내셨다. 이때 첫 연구년을 받아 이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에 온 시간을 다 쓰셨다. 장애아동 부모교육에도 열정을 쏟으셨다. 워크숍으로 시작해서 전국 곳곳에 부모대학을 만들었다. 정년 퇴직 무렵부터 그 뒤까지 장애인의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 운동을 벌이셨다. 교수님의 공생애(公生涯) 중에서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여 아는 것만 적어도 이렇다. 하신 일들이 너무 많아 모두 적지 못한다.
내가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 1학년 1학기에 "특수교육개론"이란 과목의 수업에서다. 교재가 영어원서였다. 커크 교수(S.A. Kirk)와 갤러거 교수(J.J. Gallagher)의 공저 ≪Educating Exceptional Children≫ 제4판이었다. (뒤에 이 책의 제6판이 박사학위과정 주교재였고, 교수님과 함께 번역하여 출판했다. 특수교육학 번역서로 처음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한글로 쓴 책이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특수교육이 수입학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한 공부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교수님의 너무도 멋진 모습이었다. 참으로 신사였다. 그 뒤에 교수님이 담당했던 전공과목 몇 과목을 더 이수하고 졸업했다.
졸업한 다음 군입대를 기다리며 친구일을 도우고 있었다. 가끔 학교에도 갔다. 그러다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어느 날 어느 교수님 연구실에서 선배 한 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퇴근길에 교수님이 들리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나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셨다. 가신 뒤에, 그 선배가 말하길, "곧 부르실거야"라 했다. 과연 어느 날 나를 연구실로 부르셨다. 그날로부터 교수님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교수님 일을 도와드리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교수님이 내 지도교수님이 되셨다. 같은 학기에 입학한 어떤 분은 지적장애아전공 소속의 교수님 3분을 놓고 이런저런 사연을 이야기하며 어느 분을 지도교수로 할지 따져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가만히 있었다. 지도교수님이 그렇게 정해졌으니, 그 분은 선택지가 줄었다. 교수님께서 하시는 많은 일들을 성실히 도와드렸다. 기대하는 마음 같은 것은 조금도 없이 도우며 배웠다. 연구실 생활을 하니, 수업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도 배울 수 있었다. 배울 것이 너무 많았다. 귀한 자료들과 책들을 볼 수 있었고 가질 수 있었다. 학문하는 방법과 학문을 대하는 자세도 배웠다. 교수님은 어떤 강의든 시간을 정확히 맞추셨다. 일찍 끝내는 법도 없었고, 길게 이어갈 때도 없었다. 그 비결도 알았다. 강의가 있을 때마다 원고를 강의시간에 알맞은 분량으로 쓰시고 그 원고를 사전에 읽으시며 시간을 재보셨던 것이다.
원두커피도 그때 처음 접했다. 커피를 내리는 일은 같이 있던 여학생의 몫이었지만, 가끔 나도 내려 드렸다.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커피원두를 조금 덜어내 갈고 그 가루를 필터로 거르면 커피가 내려왔다. 그러고 나면 4층 곳곳에 그 향이 진동했다. 그 향을 맡은 다른 교수님들이 참지 못하고 한 분 두 분 오셨다. 커피를 나눠 드시며 담소하셨다. 우리도 한 잔씩 얻어마셨다. 다들 그 커피 한 잔 못 마셔 난리였는데, 나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단맛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커피 드시러 온 교수님들 중에 지리교육과 교수님 한 분이 계셨다. 나를 좋게 보셨던 모양이다. 어느 날 교육학 전문 학원에 강사로 추천해 주셨다. 학원에 알아보러 가기는 했지만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 학원의 강사가 되었다면, 지금쯤 유명한 강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석사학위과정에서 공부하는 동안, 교수님께서 따로 만든 강의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을 스스로 했다. 하나는 "교육·심리통계" 과목의 교재에서 추려낸 핵심 내용과 연습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개별화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앞의 것은 그대로 강의에만 사용되었다. 뒤의 것은 그 결과물을 출력해 드리니, 그에 이어 원고지에 적어놓은 원고를 주셨다. 나는 그 원고를 입력했다. 이런 주고받음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책으로 출판되었다. ≪IEP 구안 실제≫(1992)다.
그때 교수님은 출판사 사장님께 말씀하셨다. 원고입력비를 내게 주라 하셨다. 그 사장님은 나도 잘 아는 분이었다. 석사학위과정에 입학할 때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 어느 날 대구에 오셔서 나를 불렀다. 어느 호텔에서 만났다. 등록금은 대줄 테니 박사학위과정에 진학하라 하셨다. 그런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 개인적 친밀 때문일 수도 있지만, 교수님께서 아끼는 사람이라는 점을 더 많이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힘입어 박사학위과정 공부에 도전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과정에서도 그대로 지도교수가 되셨다. 2학기를 마친 때 1000명 현직교사 대상 연수강의를 맡겨 주셨다. 당시 이것은 너무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샘을 많이 받았다. 교수님에 대한 원망의 말도 많이 들었다. 난생 첫 강의고, 그것도 무려 1000명의 현직교사 대상의 강의여서, 나는 정말 벌벌 떨며 겨우 '해냈다'. 그 다음 학기에 대학 정규과목으로 교직과목 강의 하나를 내게 맡기셨다. "교육과정및교육평가"란 2학점 과목이었다. 매 학기마다 같은 과목의 강좌 셋을 맡겨 주셨다. 대진대에 부임하기 전까지 9개 학기 동안 이 과목을 강의했다. 시간 강의로 내가 제일 오래 강의한 과목이다.
이렇게 대학에서 강의를 한 경력이 있었기에, 경북실업전문대학(현, 미래대학교)에도 출강할 수 있었다. 2년 반 동안 그 대학에 출강하여 "교육학개론"과 "실기교육방법"을 가르쳤다. 유아교육과 전공과목인 "특수교육개론"도 한 학기 강의했다. 이 모든 것이 교수님께서 주선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곳 담당교수님이 현직교수로 있으면서 대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수님이 지도교수였다. 그래서 그 교수님께 나를 추천해 주셨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제11차 아시아지적장애대회가 열리기 전에, 준비 점검과 관련 인사들과의 의논을 위해 서울에 일찍 올라오셨다. 그때 나도 같이 왔다. 여러 분들과 식사를 함께 했다. 특수교육과 인연이 있는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본대회 전에 2박 3일 일정의 워크숍이 있었다. 참가자가 20명으로 제한되었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추천해 주셨다. 소피텔 엠베스터 호텔에서 숙식하며 참가했다. 나는 저녁 무렵에 교보문고에 가서 교수님이 학위논문 주제로 제안하신 장기기억 관련 미국 학위논문을 UMI(University Microfilm International)에서 검색했다. 교보문고에서만 가능한 것이니, 값진 기회였다. 본대회는 소공동에 있는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대회전 워크숍과 본대회 모두 교수님 덕분에 무료로 참가할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 회갑을 맞이한 해에, 그 기념행사를 교수님 스스로 기획했다. 기념하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집필하셨다. 그 책이 ≪완전통합교육과 학교교육의 재구조화≫(1997)다. 이 일을 하실 때에는 옆에서 조금 도왔을 뿐이다. 오신 분들에게 드릴 답례품도 홀로 마련하셨다. 그 밖에 적당한 장소를 알아보는 일, 초청할 분을 정하는 일, 다과 준비와 답례품(책 포함) 준비 등의 일들은 나와 함께 하셨다. 대구파크호텔에서 하기로 결정하고, 당일날 조금 일찍 가서 모든 일에 소홀함이 없는지 점검했다. 이 행사 역시 오신 분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이렇게 나를 많이 키워 주셨다. 특수학교 교육과정 "운영자료"를 만드는데 여러 현직교수님들, 미국 텍사스대학(오스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막 귀국한 한 분, 선배 한 분과 함께, 나도 그 작업에 참여하게 하셨다. 공저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운영자료를 보완하여 ≪정신지체아의 학습이론≫(1994)이란 책을 낼 때에도 그랬다. 내게 2개 장을 맡기셨다. ≪Handbook of Early Childhood Intervention≫이란 책을 번역하기로 하고 30명으로 역자진을 구성했을 때에도, 내게 실무작업과 1개 장의 번역을 맡기셨다. 그리고 용어를 통일하여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사전에 그 책의 색인을 우리말로 정하는 작업을 했다. 이 일은 현직교수 두 분(한 분은 은사님이다)과 선배 한 분 그리고 나까지 4명이 했다. 이 모든 일에서 나는 과분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 책은 출판사에서 조판까지 했지만 결국 출간되지 못했다. 그 교정본은 아직도 내 손에 있다.)
박사학위과정 중에 이런 일들을 하다보니, 힘에 부쳤다. 몸이 힘들어 한 학기를 휴학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교는 휴학했지만, 연구실은 휴학 아니네." 그렇게 내내 교수님 옆에 있었고, 하시는 일들을 거들었다. 박사학위를 되도록 빨리 받을 수 있도록 하려 하셨다. 경북대 현직교수이자 교수님 제자인 한 분만 나보다 앞에 있었다. 이 분이 졸업하면 내 차례가 되는 것이다. 이 제자를 졸업시키려고 많이 애쓰셨고, 마침내 졸업했다. 이제 나보다 먼저 입학한 분들이 모두 졸업한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차례가 된 것이다.
학위논문을 쓰던 그때, 특히 본논문을 쓸 때, 학교도, 연구실도 나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집에서 홀로 했다. 밤에 아이가 울면 아파트 복도를 거닐며 달래고, 분유를 타서 먹이면서, 모든 역량을 쏟아 논문쓰기에만 집중했다. 그리하여 학과 예심과 연구계획서 발표, 본논문 발표, 그에 이은 초심, 중심, 삼심, 세 차례의 심사를 무사히 통과했다. 인준서에 심사위원의 서명과 도장을 받을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인준서를 받기도 전에, 연구실로 나가야 했다.
그때 교수님 책임 하에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위한 기초연구가 막바지에 있었다. 문헌과 법령에 대한 검토, 현행 교육과정의 문제점 진단, 그리고 설문조사까지 모두 끝나 거의 완료되어 있었다. 그 결과를 담은 답신보고서를 그해 6월 30일까지 교육부에 제출해야 했다. 그 보고서의 내용을 체제에 맞게 고치는 작업을 했다. 교정이 들어오면 고치기도 했다. 이틀간 학교에서 집중작업하여 마무리되었다. 제 날짜에 제출한 것이다.
기초연구에 바탕을 두고 총론(안)을 개발하는 일이 뒤를 이었다. 이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치료교육"이었다. 개발연구진에서는 "치료교육 및 관련지원활동"이란 영역명을 제안했지만, 치료교육과에서는 "치료교육활동" 밖에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를 놓고 감정 싸움이 있었다. 이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 하위의 영역, 곧 "물리적 훈련, 작업 훈련, 청능훈련, 심리·행동적응훈련, 보행훈련..."에서는 "훈련"이라 하고, 이 전체를 "'치료'교육활동"이라 함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영역별 교육과정(안)도 조정해야 했을 것이다.
이들 중요 사항에 대한 결정은 모두 교수님들이 하실 일이다. 나는 결정되는대로 검퓨터에서 고치기만 하면 된다. 교수님과 다른 교수님 한 분,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선배와 나, 이렇게 네 사람이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운영하는 경주교육문화회관에 갔다. 1박 2일간 총론(안) 전체를 가다듬었다. 컴퓨터로 고치는 일은 내가 맡았다. 그때 교육부에서 연구사님 한 분이 내려 오셨다. 두 가지를 지켜달라 요청했다. 그 하나는 종전처럼 여러 권이 아니라 한 권으로 만들 것, 다른 하나는 그 명칭을 "특수'학교' 교육과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총론(안)이 완성되고 그 배경설명자료까지 완성되었다. 뒤의 자료에 각론(안) 개발지침도 포함되었다. 답신보고서를 교육부에 제출했다. 그리고 교육과정심의회가 교육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나도 연구진의 한 사람으로 교육부에 갔다. 처음 가본 것이다. "치료교육및관련지원활동" 외에 특별히 지적된 바가 거의 없었다. 이 명칭이 맞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다. 뒤에 교육부에서 결정한 것은 "치료교육활동"이었다.
그 다음의 작업은 각론(안) 개발지침에 따라 각론(안)을 개발하는 것이다. 연구비 신청을 해야 한다. 이 작업은 수성관광호텔에서 1박 2일간 집중작업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잠자지 않았다. 이틑날 난 전주에 가야 해서였다. 마무리 작업을 정리하고 분류해 두고 나와 집으로 갔다. 대략 이 일까지 내가 동참했다. 이틀간 공주교대와 진주교대에서, 남은 날도 대구와 경산에서 강의해야 해서, 학교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후임자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학교에 가는 날이면 그를 도왔을 뿐이다. 여하튼 국가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해본 경험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다음 학기에 전주에 있는 모 대학에서 내가 전공한 분야의 교수채용이 있었다. 유아특수교육과였다. 특수교육과여서 지원했다. 3명이 지원했다. 한 분은 전에 지원했다 잘 되지 않았다. 교수님께서 경주에서 있었던 행사를 마치고 전주에 가서 제자이면서 그 대학 교수인 분을 따로 만나 부탁하셨다. 모두 잘 될 것 같았다. 영어시험과 전공시험도 잘 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이사장 면담밖에 없다. 다른 과와 달리, 나를 포함해 2명이 그 대상으로 선발되었다. 뜻대로 안 될 것 같았다. 대구대에서 공부하고 이 대학에 교수로 있었던 몇 분이 차례대로 다른 대학으로 가신 것이 내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 점에 대해 물어보셨다. 결국 이 대학 특수교육과 교수가 되지 못했다.
대구대 사범대가 경산 캠퍼스로 이전되고, 교수님도 정든 연구실, 사범대 1호관 413호를 떠나 경산 캠퍼스로 가야 했다. (내가 대진대에서 쓴 연구실도 413호다. 인문학관 413호!) 내가 대진대로 가고부터는 거의 뵙지 못했다. 이따금 대구에 갈 일이 있을 때 만나뵈었다. 퇴직하시고 사모님과 함께 창녕에 있는 실버타운에 대략 6년을 사셨다. 창녕은 내 처가가 있는 곳이고 아내와 결혼한 곳이다. 교수님께서 주례를 맡아주셨다. 어떤 사례도 받지 않으셔서 옥도장 하나 새겨 그것으로 답례했다. 학위논문 인준서에 늘 그 도장을 쓰셨다. 창녕에 계셨던 그 6년간 나는 창녕에 가지 않았다. 가지 않았으니 뵙지도 못했다. 그렇게 무심하게 세월이 흘러갔다.
김학수 교수님께서 교수님께 호를 둘 지어 주셨다. 심재(心齎)와 심경(心耕)이다. 교수님은 아호로 심재(心齎)를 택하시고 심경(心耕)은 교수님 박사학위과정 제자들 모임 이름에 쓰셨다. 심경회(心耕會)다. 많은 제자들이 교수님을 사랑했고 존경했다. 이 모임은 1994년 쯤 만들 때에는 이름도 없었다. 내가 제안하여 한 달에 회비 1만원씩 내어 적금을 들자고 했다. 모두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결성된 이 모임이 뒤에 심경회(心耕會)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서로 친목을 도모함과 함께 교수님 정년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2년 교수님 정년퇴직 하시던 해,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함께 기뻐하지도, 함께 축하하지도 못했다. 교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내기로 기획한 책, ≪탈산업사회와 특수교육≫(2002)에 한 편의 글을 실었을 뿐이다. 정말 아쉬운 일이다.
교수님은 가끔 소장하신 책을 여러 권 골라 우리들로 하여금 갖고 싶은 것을 고르게 하셨다. 중복되면 조정해서 원하는 책을 보내주셨다. 교수님은 장서가(藏書家)다. 대구대 특수교육과 교수 초창기에 자료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깊이 느끼신 때문일 것이다. 나의 박사학위논문의 참고문헌 목록에 있는 옛 논문들은 거의 대부분 교수님이 소장한 것에서 뽑은 낸 것들이다. 할머니(교수님의 장모님)께 말씀드려 놓았으니, 집에 가서 필요한 자료를 찾아보라 하셨다. 13개 미국 저널을 구독하시고 계신 것을 보았다. 그리고 통합교육에 대한 논문들을 따로 모아 파일에 넣어두신 것도 있었다. 한 부씩 복사해두라 하셨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논문들이었다. 틈나는대로 몇은 우리글로 완역해서 ≪실천특수교육≫에 실었다. 퇴직하시면서 그동안 수집한 그 많은 귀한 책들은 대구대에 모두 기증하신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자진해서 교수님을 도와드린 사실을 지금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 시작했고, 교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이 나를 길러주신 것으로 받아들인다. 길러주심이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침[敎(교)]보다 기름[育(육)]이 더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정년하신 해 내 병이 재발하여 참석하지 못했던 것, 처가가 있는 창녕에서 6년 가량 사셨는데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던 것,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싶다.
지금은 벌썩 퇴직하신지 2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시를 쓰시고, 시집도 내시고, 시인으로 등단도 하셨다. 성경 독법에 대한 책도 내셨고, 고난 주간 묵상에 대한 책도 내셨다. 이어 영광학원과 대구대를 설립한 성산(惺山) 이영식 목사님의 평전 ≪이영식 목사의 생애와 건학이념≫(2023)을 쓰는데도 참여해 제2부의 건학이념을 쓰셨다. 지금도 글쓰시고, 운동하고, 묵상하면서, 건강하게 지내신다. 블로그에 쓴 글을 카톡으로 보내주신다.
작년 7월에 명예퇴직이 결정되고 전화를 드렸다. 나더러 "영민한 사람이니 글을 계속 쓰라"고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센서티브하다" 하셨다. 블로거가 되어보기로 결심한 것도 이 말씀이 작용했다. 먼저 올 1월 10일에 경주에서 만나자 하셔서 정말 오랫만에 만나뵈었다. 숙소며 저녁·아침 식사까지 모두 준비해 두셨다. 내게는 아버지 같은 교수님이시다. 통화할 때마다 삶의 지혜와 조언을 주신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가르침을 주시는 은사님이 있다는 사실,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2023년 11월 8일(수)
ⓒ H.M. Han
[후기] 40개 성상(星霜)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있었던 일들을 글 한 편에 모두 적을 수 없다. 몇 가지 자료는 있지만, 교수님과의 상호작용은 태반이 머리 속의 기억과 추억이다. 생각나는 것만 적었다. 또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아래에 계속 추록하기로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한다.
[補1] 1964년 대구대 교수 되셨으니, 내년 2024년 3월이 되면, 대구대와 만나신지 한 갑자(甲子)가 된다. 환갑, 새 갑자가 시작되는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2023.11.1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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