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의 '참된 만남'(encounter)으로 여태까지 내가 존경하고 내게 가르침을 주시는 '영원한 은사님'(eternal teacher)이 네 분이다. 네 분 모두 성씨가 김(Kim)씨다. 그래서 4K 교수님이라 한다. 이 글에서 4K 교수님에 대해 간략히 적고 나의 경험담을 적으려 한다. 내가 쓴 글이 혹여라도 은사님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을 이미 염려하여 아호(雅號)와 영문 이니셜로 지칭한다.
이 네 분과의 '단순 만남'(meeting)은 이렇다. 심재(心齎) KJK교수님은 철없던 시절 대학 1학년 때, 유일한 전공과목이었던 "특수교육개론" 수업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평촌(坪村) KBH교수님은 2학년 때 수강한 교직과목 중 하나였던 "교육철학및교육사" 수업을 들으며 뵈었다. 송담(松潭) KBK교수님은 3학년 때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 만남의 계기가 되었고, 4학년 때 "학습장애아교육"이란 과목을 배웠다. 이 세 분은 내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은사님이다. 청구(靑丘) KYW교수님은 박사학위과정에서 모든 교과목을 이수한 뒤에 만났기에,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늘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고마운 분이다. 내가 사숙(私淑)하는 은사님이다. 지금 이 네 분 모두 정년은퇴 하셨다. KBK교수님은 영천에서 사시고, 세 분은 경산에서 사신다. 매달 한 차례 만난다고 하셨다.
4. 청구선생전(靑丘先生傳)
서울 분이다. 1954년 생이시다. 아호는 청구(靑丘)다. 심재선생께서 지어주셨다. 교수님께서 졸업한 초등학교 이름으로 아호를 지어주신 것이다.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를 다니시다 중퇴하시고, 육군에 입대하셨다. 그로부터 미국 유학하시기까지 짧지 않은 공백기가 있다. 1983년에 미국 오레곤주립대(Oregon State University) 전산과학과(Department of Computer Science)에 입학하시고 1986년 전산과학 학사학위를 받으셨다. 한국에서 공부하신 때부터 10여년만에 학사학위를 취득하신 것이다. 이어 네바다대(University of Nevada)(라스베이거스[Las Vegas])로 가셔서 1988년 특수교육학과에서 특수교육(학습장애아교육)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셨다. 곧이어 유타주립대(Utah State University)에 입학하시고 1994년 특수교육학과에서 특수교육(학습장애아교육, 특수교육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학부부터 대학원 박사학위과정까지 모두 미국에서 취득하신 것이다.
유타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하시는 동안, 특수교육학과 함께, 새로 생긴 특수교육공학(special education technonogy) 까지 공부하셨다. 학습장애아교육과 특수교육공학을 함께 공부하신 것이다. 오레곤대에서 "한사대"(현, 대구대)를 알게 되신 뒤부터 대구대 교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고 하셨다. 졸업하신 초등학교 이름, 청구(靑丘)는 곧 한국을 말한다. 또, 대구에도 청구고등학교가 있다. 대구(大邱)란 지명 또한 본래는 大丘였다. 공자의 휘[孔丘(공구)]를 피해 大邱로 바뀐 것이다. 이곳 달성서씨들 선조분 묘비에는 大丘로 쓰여 있다. 대구대 교수가 되신 것이 마치 어떤 운명의 힘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타대에서 2여 년 연구교수로 계시다가 1995년 9월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수로 오셨다. 그때 대학원생들 사이에 어느 분이 새로 오시게 되었는지를 놓고 많이들 궁금해했고 이런저런 소문도 많았다. 당시 학습장애아교육으로 석·박사학위를 하신 분은 여럿 있었지만, 실상 학습장애아교육을 전공하신 교수님은 대구대에 한 분도 없었다. 교수님이 대구대에 오심으로써 학습장애아교육을 '진짜' 전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또, 특수교육공학까지 전공하셨기에, 이 분야만큼은 대구대, 아니 한국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특수학교 교과서와 지도서를 당시로선 교육부에서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전자책(CD-ROM)으로 발간하게 된데도 큰 공헌을 하셨다.
대구대에 오시고 특수교육공학센터 운영 책임을 맡으셨다. 우리 몇몇이 후배이자 교수님 제자인 K선생에게 인터넷의 사용법을 처음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교수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국립특수교육원 원장이 되셨을 때에는 특수교육 정보화 대회를 처음 개최하셨다. 정년 퇴임하실 때까지 본인의 두 전공 분야에서 수많은 논문과 저술을 남기셨다. 한국연구재단 연구자정보를 보면 정말 놀라움 그 자체다. 논문으로 수상도 여러 차례 하셨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받은 연구비만도 60억원 정도였다. 연구비의 30퍼센트를 산학협력단에서 간접연구비 명목으로 가져가니, 적어도 18억 이상의 연구비가 학교로 갔을 것이다. 학교재정에 크게 기여하신 것이다. 당시 총장께서 대구대에서 받은 봉급을 모두 돌려준 것이라고 하셨다.
1995학년도 2학기 교수님이 부임하신 때, 나는 이미 수료했다. 강의실에서 뵐 기회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박사학위 청구논문 연구계획서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 이듬해 1학기 초반까지 본논문 준비 때문에 학교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따로 뵙지 못했던 것 같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교수님께 내가 각별한 마음을 갖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본논문 발표 시작하기 전 내게 하신 말씀 한 마디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 다는 읽어보지 못했는데 논문 잘 썼네. 그리고 '재인용'이라 밝힌 논문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봤다." 교수님께서 조금 일찍 오셔서 그렇게 좋게 평해주신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학위논문 쓰느라 극도로 지쳐 있었다. '논의'에서 막혀 자신감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그때 교수님께서 건네신 그 한 말씀에 조금의 용기와 자신감을 되찾았다. 힘입은 바가 진실로 컸다. 말 한 마디의 위력을 체감했다. 그 뒤에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을 하나 주셨다. 미국에 계실 때 만든 프로그램이라 하셨다. 효과 크기(effect size)를 통계학적으로 검증하는데 쓸 수 있다고 하셨다. 덧붙여 말씀하시길, 효과 크기는 '실제적' 크기여서 통계적 방법, 곧 확률적 검증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참고할 필요는 있다고 하셨다.

박사학위 청구논문 심사가 모두 끝나고 학교에 다시 나갔다.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지도교수님께서 맡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교수님과 '참 만남'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몇 개월 뒤, 나는 대진대로 떠나가야 했다. 그러니 교수님과의 참 만남은 길지 않았다. 대략 1년 6개월 정도 가까운 곳에서 뵐 수 있었다. 주로 계셨던 특수교육공학센터에서 뵙는 날이 많았고, 5층에 있던 연구실로 찾아가기도 했다. 좋은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고, 책도 여러 권 소개해 주셨다. 두 권의 책이 내게 특별했다. 지금도 소중히 소장하고 있다. 하나는 ≪Research and Evaluation Methods in Special Education≫(S. Hegarty & P. Evans[편], 1985)이다. 다른 하나는 ≪Single-Case Research Designs: Methods for Clinical and Applied Settings≫(A.E. Kazdin, 1982)다. 둘 모두 연구방법론 책인 것이다.
앞의 책은 특수교육 연구와 평가의 방법을 단일대상연구와 질적연구 둘로 제시하고 2개 부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 앞의 제1장은 서장으로 특수교육연구의 특수성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큰 보탬이 되는 것이었다. 이 장을 우리글로 옮긴 뒤에 빼고 보태 한국정신지체아교육연구회(현, 한국지적장애학회) 소식지 ≪특수아동교육≫에 실었다. 뒤의 책은 단일대상연구 설계법에 대한 책이었다. 단일대상연구 설계의 유형별로 그 방법을 소상히 다루고 있었다. 내게 특별한 부분은 연구결과로 얻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법(제10장)과 그 실제를 예시로 설명한 부록 A(시각적 분석)와 B(통계적 분석)였다. 이 장들을 우리글로 옮겨 도서출판 특수교육에서 발간하는 ≪실천특수교육≫지에 9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1996년 2학기에 대구대 장애인종합연구소에서 미국 캔자스대(Kansas University)의 스클틱(T. Skric) 교수를 초청하여 경주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연 적이 있었다. 그의 저술 ≪Behind Special Education≫을 심재선생께서 교재의 하나로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때 그 분의 원고를 선배 한 분(현, 진주교대 교수)이 번역했고, 교수님께서는 통역을 맡으셨다. 그 다음 날 나와 다른 선배 한 분(전, 강남대 교수)이 교수님과 함께 스클틱 교수를 따로 만날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 주선해주신 것이었다. 불국사에서였다. 남은 기억은 스클틱 교수가 점심을 햄버거 하나로 드시고 연구에 열중한다는 것, 내게 박사학위논문 주제를 물어보셨던 것 정도밖에 없다. 말로 영어를 잘 못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 회의에 참석했던 몇 분 교수님들과 연구소 식구들은 "방구집"에 갔다. 감포 가는 길, 동해바다 가까운 곳에 있던 횟집이었다. 그 전에도 경주 행사 뒤에 자주 갔던 곳이다. 스클틱 교수에게 화투도 가르쳐드리고 소주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깜깜한 밤에 대낮처럼 환하게 불켜고 오징어를 잡는 배도 보았다.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뒤에 들어 알게 된 일이 하나 있다. 교수님께서 나를 캔자스대로 박사후과정을 보내 스클틱 교수의 가르침을 받게 하려 하셨다고 들었다. 유학비용은 본인이 어떻게든 연구비를 받아 마련하겠다고 하셨다. 내가 대진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성사되지는 못했다. 교수님의 그런 배려는 내게 너무도 과분한 것이었다. 너무도 고마운 것이었다.
대구에 내려간 날마다 학교에 가서 심재선생을 뵙고, 또 그때마다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어떻게 생활하냐고 물어보셨다. 조용히 공부만 할 수 있어 좋다고 말씀드렸다. 대구대는 해야 할 일도 많고 시끄럽다 하시며, 오히려 잘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시끄러운 일은 "특수교육은 학문도 아냐!"라고 내게 말씀하신 '그 분'의 애제자, 지금은 이승 사람이 아닌 그 '애제자' 때문이었다. 많이 힘들어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으로 되돌아갈 생각까지 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2003년 11월에 마침 국립특수교육원 원장(개방직) 초빙공고가 나서 원장으로 취임하셨다. 2006년까지 3년 계셨다. 그때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직전에 대학 동기지만 형님이었던 연구사(현, 나사렛대) 덕에 1급 정교사 자격연수에서 강의 하나를 한 적이 있었다. 또, 대학 동기인 연구사(현, 원공대 교수) 책임의 연구과제 "특수교육행정실태"에도 참여했다. 교수님께서 원장이 되신 뒤로는, 매년 연구과제 하나에 참여했다. "치료교육 현황과 대책", "특수교육대상자 실태조사", "특수학교 교육과정(기본교육과정", "특수교육교사 양성모형"이었다. 국내 세미나 발표도 한 번 했고, 미국으로 선진지 견학 가는 분들께 미국장애인교육법에 대한 강의도 했다. 그 밖에 교원연수 강의를 몇 차례 했다. 이 일들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는 몰라도 교수님께서 원장으로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을 할 때 안산에 참으로 많이 다녔다. 국립특수교육원에 가는 날이면, 교수님이 계실 때에는 늘 교수님부터 찾아뵈었다. 그때마다 항상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바쁘신 와중에도 그랬다. 독대(獨對)한 적도 많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밥도 여러 번 사주셨고, 퇴근하신 뒤에는 연구과장님(전, 서울맹학교 교장), 후배 연구사와 함께, 자주 가시던 곳에 가서 술 한 잔 나눠 마시며 대화했다. 그 시절이 내게는 진실로 즐거운 호시절의 나날이었다.
원장 임기가 끝나고 교수님은 대구대로 복귀하셨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후임으로 오신 원장님께서 나만 따로 부르신 적이 있었다. 출신 학교 구분하지 말고 널리 중용하시라 말씀드렸다. "실태조사" 결과를 놓고 담당 연구사를 많이 힘들게 했다. 그때매다 그 후배를 돕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과정" 문제로 곤혹을 치러야 했다. 마지막으로 했던 과제에서 새로 온 연구과장의 부당한 개입으로 문제가 생겨 그만두었다. (다른 방법으로 책임을 다하여 보고서가 나오게 하여 문제없이 마무리되었다.) 교수님께서 원장이셨다면, 이런 문제들도 생기지 않았을 그런 것들이었다. 그것으로 국립특수교육원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2017년 쓴 논문 한 편을 ≪특수교육저널: 이론과 실천≫에 싣기 위해 대구대 특수교육문제연구소에 투고했다. "한국장애분류체계"에 관한 것이었다. "문헌비평적 연구"를 부제로 단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을 받아 줄기있게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심사결과 2분은 게재가, 1분이 게재불가 판정을 내렸다. 다시 수정하여 두 번째 심사를 받았다. 그 결과는 초심과 똑같았다. 이런 일이 내게는 처음이었다. 두 차례 게재불가로 판정한 1분은 불가의 사유조차 밝히지 않았다.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 분이 누군지 대략 짐작했다. 그 얼마 전 어느 학회 학술대회에 토론자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학회 회장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편집위원장께 전화를 드렸다.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다. "학문을 참칭하여 권력으로 삼는다." 바로 전화가 왔다. 대뜸 한다는 말이 이랬다. "무슨 말이고. 한 교수, 니 내 후배 아이가." 학문을 하자는데 동창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난 후배가 아니라 했다. 그 당시 평촌선생에 이어 소장을 맡고 계시던 교수님께 말씀드리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교수님께 그 사정을 모두 말씀드렸다. 한국연구재단에 사정을 말해야 하겠다고 했다. (이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른 곳에 계셨던 교수님께서 긴급 편집회의를 직접 소집하셨다. 최종 심사결과는 "게재가"로 판정되었다. 본인 일도 아닌 이런 일을 누가 나서서 해결해줄 것인가.
본인이 전공한 두 분야에서 실로 엄청난 업적을 남기셨다. 한국연구재단에 등재되어 있는 모든 것이 그 증거다. 학문 연구와 함께, 학생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주셨다.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몹시 즐겁게 여기셨다. 격의없이 어울렸다. 권위 같은 것은 조금도 내세우지 않으셨다. 심경회 모임, RIRI 행사 등에서도 함께 했다. 그때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셨다. 본마음대로 말씀하셨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긴 것이다. 얼마 전 두 차례 통화한 진주교대 교수로 있는 그 선배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먹고 살도록 해주셨다고 했다.
2019년에 정년 퇴직하셨다. 그 흔한 논총이나 문집 하나 없이 제자들과의 세미나 한 번으로 은퇴하셨다. 평촌선생의 강권으로 그 세미나 자료를 ≪특수교육저널≫에 특집으로 낸 것이 전부였다. 그 특집을 보기까지 나는 퇴직하신 줄도 몰랐다. 나와 진주교대 교수로 있는 선배를 특히 아끼셨던 그 교수님은 그렇게 소리소문도 없이 특수교육학 일선에서 물러나신 것이다. 참으로 교수님'다운' 것이다.
교수님은 대학 선배가 아니다. '공식적' 강의를 하나도 듣지 못했으니, 엄격히 말하면 은사님이라 할 수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게 그동안 베풀어 주신 것은 '선배 그 이상'이었다. 나를 '길러' 주셨다. 교수님의 인격, 사람'됨'을 직접 보고, 듣고, 겪었다. 그렇기에 은사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숙(私淑)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사숙하는 은사님인 것이다. 교수님은 교수이기에 앞서 정말 '멋진 사나이'셨다.
지난 해에 나도 퇴직하였음을 전화로 알려드렸다. 축하한다는 말씀과 함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국특수교육에서 한 획을 그었다."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셨지만, 내게는 과분한 것이다. 지금은 대구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한 달에 한 번 모이시는 "4K 모임"의 총무를 맡고 계신다. 교수님 허리가 많이 아파 수술해야 한다고 심재선생께서 전해 주셨다. 마음이 쓰였다. 수술받고 좀 괜찮아졌다 하셨다. 오래도록 강건하시기만 바랄 뿐이다. 언제든 찾아뵐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년 따뜻한 봄날, 4K 교수님을 만나뵈러 가야 하겠다. 맛난 음식을 한 번이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다.
2023년 11월 21일(화)
ⓒ H.M. Han
이 글로 4K 교수님과 대학, 대학원에서 맺은 인연을 모두 글로 적었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용비어천가"처럼 볼지도 모른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말한다. "조금의 꾸밈도 없다. 긍정의 일만 골라 적은 것이 아니다. 부정의 일은 없었다. 있었던 사실 그대로, 그 사실에 대한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적었을 뿐이다."
[후기] 교수님을 처음으로 뵌지 30개 성상(星霜)에 가까운 긴 세월이 흘렀다. 가까이 살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게 베풀어주신 것은 결코 적지 않다. 교수님과의 관계지사는 거의 머리 속의 기억과 추억이다. 생각나는 것만 적었다. 또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아래에 계속 추록하기로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한다.
[補1] 어제(2023.11.23) 카톡으로 보내드렸다. 답글이 왔다. 세 곳에 오류가 있다 하셨다. 바로잡았음을 밝힌다. 학위를 전산과학이라 하셨으니, 학과도 전산과학과로 하여 통일했다. // computer science(컴퓨터학)와 computer technology(컴퓨터공학)가 다르다고 심재선생께 들은 적이 있다. 큰 아드님이 computer science을 전공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공대에 입학하니, 전기공학과(electronic engineering)과 전산과학과 둘 있었는데, 전산과학과를 선택했다고 하셨다. 답글로 보내주신 글은 이렇다. "너무 잘 쓰셔서 마치 내 과거를 새삼 돌이켜보며, 유학시절을 잠시 회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류는 단지 1. 공군이 아니라 육군 2. 학사학위는 특수교육이 아니라 전산과학 학사(Bachelor Degree of Computer Science)입니다. 수고 많으셨고 감사하며 글이 완성되면 다른 교수님들 내용도 같이 보고 싶습니다. 언제 내려와서 출판기념 파티도 합시다." "심재, 송담, 평촌 선생님 글들도 찾아볼 수가 있군요. 잘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내 연구비 수주는 약 60억원 남짓으로 부풀어져서 기술된 것 같습니다." "블로그에 들어가니 좋은 글들이 있네요. 역시. 자주 들어가 보겠습니다." 카톡 글에 대한 내 답글은 이렇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오류는 고치겠습니다. 뵐 날을 기약합니다. 내내 평안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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