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의 '참된 만남'(encounter)으로 여태까지 내가 존경하고 내게 가르침을 주시는 '영원한 은사님'(eternal teacher)이 네 분이다. 네 분 모두 성씨가 김(Kim)씨다. 그래서 4K 교수님이라 한다. 이 글에서 4K 교수님에 대해 간략히 적고 나의 경험담을 적으려 한다. 내가 쓴 글이 혹여라도 은사님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을 이미 염려하여 아호(雅號)와 영문 이니셜로 지칭한다.
이 네 분과의 '단순 만남'(meeting)은 이렇다. 심재(心齎) KJK교수님은 철없던 시절 대학 1학년 때, 유일한 전공과목이었던 "특수교육개론" 수업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평촌(坪村) KBH교수님은 2학년 때 수강한 교직과목 중 하나였던 "교육철학및교육사" 수업을 들으며 뵈었다. 송담(松潭) KBK교수님은 3학년 때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 만남의 계기가 되었고, 4학년 때 "학습장애아교육"이란 과목을 배웠다. 이 세 분은 내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은사님이다. 청구(靑丘) KYW교수님은 박사학위과정에서 모든 교과목을 이수한 뒤에 만났기에,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늘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고마운 분이다. 내가 사숙(私淑)하는 은사님이다. 지금 이 네 분 모두 정년은퇴 하셨다. KBK교수님은 영천에서 사시고, 세 분은 경산에서 사신다. 매달 한 차례 만난다고 하셨다.
3. 평촌선생전(坪村先生傳)
선산(현, 구미)분이다. 1945년 생이시다. 아호는 평촌(坪村)이다. 교수님이 어릴 때 사시던 마을 이름으로 자호(自號)하신 것이다. 얼마 전에 교수님 블로그에서 보았고 여쭈어서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구미중학교를 다니셨고, 부산에 가서 명문고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 1964년 연세대 철학과를 다니시다 다음 해에 중퇴하셨다. 1965년 대구대 특수교육과에 입학하여 1969년 졸업하셨다. 1971년 경북대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철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셨고, 1981년 대구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신앙인으로 사시지는 않았다. 기독교, 유교, 불교를 두루 공부하셨다. 신앙이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인 것이다. 기독교를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으로, 유교를 유학(儒學)으로, 불교를 불학(佛學)으로 표현하셨다.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학, 공자의 가르침을 유학, 부처의 가르침을 불학이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찾는 일에 힘쓰셨다. 원효 대선사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疎), 중용(中庸), 근자의 동학(東學)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역사를 특수교육학과 접목하려고 노력하셨다. 한국특수교육학을 우리학문으로 하려는 시도의 일환일 것이다.
대구대에서 이태영(李泰榮) 총장님의 직강(直講)을 듣고, '영원한 은사님'으로 모셨다. 지금도 그렇다. 총장님이 집필하신 ≪특수교육개론: 문제아 지도≫(1963, 집문사)를 금과옥조로 여기신다. 1972년 한 해 대구영화학교 교사를 역임하시고, 그 이듬해인 1973년 대구대 교수가 되셨다. 특수교육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일찍이 ≪특수교육의 역사적 이해≫(1977)를 저술하셨다. 이 책으로 대한특수교육학회 학술상(저술부문)을 받으셨다. 그 뒤로 저술 부문으로 학술상을 받은 분이 없으니, 교수님의 수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교수님의 주된 연구 분야는 특수교육학의 학문적 성격과 정체성 정립, 특수교육의 역사와 철학, 특수교육 교사교육이다. 특수교육의 보편성과 특수성 연구로 다수의 논문과 몇 권의 저술을 남기셨다. 근대 특수교육의 역사를 깊이 연구하셨다. ≪한국특수교육 백년사≫에서 이 땅의 특수교육 성립에 관한 글을 집필하셨고, 대구대를 중심으로 한 대구특수교육사, 대구대 특수교육과 40년사 등 여러 역사서 편찬에 많은 공헌을 하셨다. 청각장애 교사의 전문적 수행능력(competency)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것이 계기가 되어 특수교육 교사교육의 교육과정 등을 여러 차례 연구하셨다. 후속연구의 발판을 마련하신 것이다.
또, BK 21 특수교육 교육·연구단 단장을 맡아 많은 수고를 하셨다. 연구와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해, 이때 창간한 ≪특수교육저널: 이론과 실천≫은 특수교육문제연구소가 이어받았다.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학술지다. 교외 활동도 함께 하셨다. 대구의 장애인단체와 장애인야학에 참여하여, 장애운동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 지금은 블로그에 글쓰시는 일과 또 다른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계신다.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2학년 때 교직과목에서였다. 다부진 몸매에 말씀을 잘하셨다. 내용도 알찬 수업이었다. 멋진 교수님이라 생각했다. 연구실 생활 같은 사적 경험은 없었다. 심재선생, 송담선생과 친밀하게 지내셨기에, 그나마 조금 잘 알고 있을 뿐이다. 교수님 연구실이 심재선생 연구실 맞은 편에 있었고 송담선생 연구실과도 멀지 않아 학부 때, 대학원 다닐 때, 자주 뵈었다. 그때 교수님께 나는 그저 특수교육과 학생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학교에서 연구하시고, 글쓰시고, 강의하시고 나면, 다른 교수님들에 비해 조금 일찍 퇴근하셨다. 그렇지만 댁에 가셔서도 늘 책 읽으며 지내셨다. 직접 본 것도,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마음에 맞는 신간 서적이 나오면, 논문에서 인용하고 우리들에게도 소개해 주셨기 때문이다.
교수님과의 '참 만남'은 대학원에 진학하고서부터였다. 석사학위과정 과목으로 교수님께서 맡으신 연구방법론 수업에서였다. 이 수업은 양적 연구방법과 질적 연구방법, 둘로 진행되었다. 수강생들의 발표와 그에 대한 토론으로 강의를 진행하셨다. 그때 결과의 통계 처리 부분 발표자로 직접 나를 지목하셨다. 그렇게 잘 알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그 중에 낫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었다. 실상 발표는 엉망이었다.
교수님은 양적 연구방법보다 질적 연구방법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스타인백 부부 교수(S. Stainback과 W. Stainback)가 공동 저술한 ≪Understading and Conducting of Qualitative Research≫(1988)가 부교재였다. 미국 특수아동평의회(CEC: Council for Exceptional Children)에서 발행한 책이었다. 이 책의 첫 장은 내가 맡았다. 읽고 우리글로 옮겨 발표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발표원고를 모아 전부 입력하고 조금 고쳐 교수님께 드렸다. 책 제목 중에서 "conducting"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어보셨다. 이 말을 놓고 고심하셨던 모양이다. "실제"보다 "실천"이 낫다고 말씀드렸다. 결국 ≪질적연구의 이해와 실천≫(1992, 특수교육)이란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내게 수고비를 많이 주셨다.
석사학위과정부터 박사학위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매주 월요일에 대학원생들과 책 하나를 정해 같이 읽고 토론한 일이다. 이른바 "월요세미나"였다. 영어로 쓰여진 책을 영어로 읽고 우리말로도 번역하여 읽었다. 그때 그 세미나를 거의 빼먹지 않고 참석했다. 그래서 내가 발표할 때가 많았다. 학생들과의 '비공식적' 만남에서도 가르치고, 또 배우셨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딱 맞다.
박사학위과정에 진학하여 부전공 문제로 남다른 고민이 있었다. 이때 교수님이 계셔서 그나마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실상은 전공이 지적장애아교육이니, 정서장애아교육을 부전공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송담선생전(松潭先生傳)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시각장애, 청각장애, 지체장애 중에서 어느 하나를 부전공으로 해야 했다. 교육과정과 담당교수님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청각장애아교육을 부전공으로 결정했다. 교수님께서 두 과목을 담당하고 계셨으니, 남은 과목 하나만 다른 교수님 강의로 채우면 되었기 때문이다. "청각학" 과목을 먼저 이수하고, 교수님 담당과목 둘을 뒤에 이수했다. 부전공 문제가 해결되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을 그렇게 해결한 것이다.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발표할 때, 새로운 연구방법의 사용을 놓고 높이 평가해 주셨다. 석사학위논문 발표 때도, 좋게 평해 주신 적이 있다. 박사학위 청구논문에 대한 심사가 모두 끝나고 학교에 다시 나갔을 때, 교수님과의 본격적인 만남과 배움이 시작되었다.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작업에서다. 기초연구 책임자는 교수님, 총론(안) 개발 책임자는 심재선생께서 나누어 맡으셨다. 기초연구의 마무리 작업을 도우면서 교수님 원고를 접했다. 한 번 제출로 끝내지 않고 계속 읽고 수정하셨다. 그때 교정 작업을 하면서 글을 어떻게 쓰시는지를 직접 보았다.
박사학위를 받던 날, 교수님께서도 경산 캠퍼스에 오셨다. 식전에 뵙고 사진도 남겼다. 교수님께서 한 권의 책을 선물로 주셨다.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1996, 녹색평론사)였다. 생각지도 못했다. 폭넓은 독서를 하시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내 서재의 책장에 꽂혀 있다.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다른 일이 또 있다. 교수님 추천으로 공주교육대에서 강의할 수 있었다. 교수채용서류 중에 추천서를 써주신 일도 있다. 시간이 촉박했고, 달리 부탁드릴 분이 없었다.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없이 곧바로 써주셨다. 진실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수학교 교육과정 총론(안)을 만들 때 그 최종 작업을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심재선생, 교수님, 선배 한 분(전, 강남대 교수), 그리고 나도 참여했다. 각론(안) 개발 지침에 따라 각론 개발을 해야 했다. 연구비 신청서를 쓰는 작업부터 해야 했다. 교수님 지도 아래 몇 분과 함께 했다. 수성관광호텔에서였다. 이때에도 글을 쓰는 방법을 배웠다.
서울대 조동일 교수, 그의 4학8방론, 학문론을 알게 된 것도 교수님을 통해서다. 1998년 5월에 공주대에서 열린 대한특수교육학회 기조강연에서 처음 들었다. 내가 대진대 교수가 된 직후의 일이다.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나는 학술상(논문 부문)을 받았다.
그 뒤로는, 자주 뵙지는 못했다. 그래도 연구실로 찾아뵙는 날이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때마다 새로 출간한 저서를 주시곤 했다. 6-7권 쯤 주신 것 같다. 지금도 가지고 있다. 어느 날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송담선생과 함께 셋이서 만나 뵌 적이 있다. 그때 총장선거 출마를 결심하셨다고 하셨다. 호적에는 1947년 생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2년을 덤으로 대학에 더 있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전후로 몇 차례 다른 사람, 다른 문제로 무례히 행한 적이 있었다. 나 같으면 더는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교수님은 달랐다. 나를 예전처럼 대해주셨다. 언제나 격려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신 것이다. 나의 말이나 행동만 보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전하려 했던 뜻을 읽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죄송스럽다. 다시 용서를 구한다.
작년 7월에 명예퇴직이 결정되고 얼마 있다 교수님께 전화로 알려드렸다.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논문은 그만하면 됐다. 이제는 자네 글을 쓰시게." 그 전부터 내가 논문 하나를 써서 발표하면, 그때마다 문자 메시지로, 통화로 격려해 주셨다. 지금도 안부 전화를 드릴 때마다 읽으신 책과 그 소감문을 쓴 글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신다. 교수님께서 건강하시고, 현직에 있을 때만큼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다. 무엇이라도 여쭈어 볼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 참으로 복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세 분의 은사님과의 '참 만남'을 이야기했다. 세 분이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그러니 각기 다른 것을 배웠다. 세 분 은사님의 가르침은 내 머리 속의 기억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내게 주신 책들과 논문들은 내 서재의 서가에 나란히 보관하고 있다. "심재선생문고", "송담선생문고", "평촌선생문고"다.
심재선생께는 특수교육의 어려웠던 초기 역사를 배웠다. 문헌의 중요성을 배웠다. 교육과정 개정이란 국가 대사(大事)를 통해, 특수교육의 큰 그림(big picture)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송담선생께는 심리학, 특히 행동수정의 원리와 실제를 깊이 배웠다. 지적장애, ADHD, 자폐증 등의 장애가 있는 아이를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방법(effective teaching)을 배웠다. 평촌선생께는 특수교육의 철학과 역사의식을 배웠다. 특수교육(학)의 정체성(identity), 글쓰는 방법을 배웠다. 내가 논문에서 쓴 글은 '상당 부분' 교수님의 글을 모방한 것이다.
특수교육(학)에 대해 내 나름대로 거시적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효과적인 특수교육 방법을 갖출 수 있었다. 내 생각을 논리적인 글로 표현할 줄도 안다. 이 모든 것이 이 세 분의 은사님께서 베풀어주신 가르침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한 번 뵈러 가야 하겠다.
2023년 11월 20일(월)
ⓒ H.M. Han
[후기] 40개 성상(星霜)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있었던 일들을 글 한 편에 모두 적을 수 없다. 교수님께서 주신 자료는 여럿 있지만, 교수님과의 상호작용은 태반이 머리 속의 기억과 추억이다. 생각나는 것만 적었다. 또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아래에 계속 추록하기로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한다.
[補1] 2023.11.21(화) 카톡으로 보내고 전화를 드렸다. 고맙다 하시며 메일로도 보내달라 하셨다. 제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하셨다. 바로 모두 읽으시고 카톡을 보내오셨다. "나이들어 나를 기억하고 나로부터 받은 영향과 추억을 남긴 귀한 글을 받으니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나도 한현민교수를 다시 반추하는 소중한 기회로 삼을께요. 고마워요. 부디 건강하시길." 답글을 보냈다. "지금의 저는 세 분 선생님께 받은 가르침과 기름의 결정체라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오늘 좋다 하시니, 다행입니다. 괜한 글로 불편을 드리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오래도록 늘 가르침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제자/후학 현민 삼가 올림" 메일에는 이렇게 답하셨다. "보내온 파일 잘 받았습니다. 내게 지도 받은 제자들과도 함께 공유할 꺼요. 한 번 더 고마운 마음전합니다. 경산서 평촌 김병하"
[補2] 2023.11.22(수) 카톡으로 그간 정리하신 글 "삶의 여정"을 한글파일로 보내주셨다. "나의 <삶의 여정>을 이야기로 정리한 원고를 보냅니다.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남은 삶의 가르침으로 삼고자 합니다. 더 보충해야 하지만 우선 아들과 딸에게 보냈고, 나의 수제자인 강창욱 교수께, 김용욱 교수도 관심이 있다기에 보내고 이제 한현민 교수에게 보냅니다. 내가 어떻게 기억될지 나이 들면서 두렵기도 하답니다. 한 교수 블로그 <다시, 동학> 제호가 눈에 확 들어옵디다. 물질이 개벽되니, '다시' 정신개벽을 하는 데 힘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카톡에 답했다. "교수님, 제목 같은 옛 책이 아니네요.잘 읽겠습니다. 도올선생 용담유사 읽고 생각한 제목입니다. 서→서+동부터 시작해 보려는 정도일 뿐입니다. 거창한 제목이니, 걸맞는 글 쓰려고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 "종심의 연세에다, 당대 지식인으로 곧게 사시지 않았습니까. 남의 이목, 평가를 두려워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補3] "삶의 여정"을 읽었다. 28쪽에 이렇게 적어셨다. "2008년 1월 정초에는 <한국특수교육문제연구소> 주최로 제1회 <창파 학술제>를 개최했다. 「한국특수교육(학)의 정체성 논쟁」이라는 주제로 ‘한국 특수교육(학)의 학문적 정체성’은 내가 발표하고, ‘한국 특수교육의 실천적 정체성’은 김원경 교수(당시 한국체대 교수)가 발표했다. 그때 패널 토의로 참석한 한현민 교수와 정용석 교수의 내 발제에 대한 토의가 돋보였다." 그 학술제의 이름이 대구대 이태영 총장님의 아호로 삼았고, 또 첫 학술제로 나를 토론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 당시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토론문을 작성하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내게는 과분한 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023.11.23(토)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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