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부과정 "전공 셋의 선택"
1986년 대구대 특수교육과 2학년이 되니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특수'교육과이니 셋을 선택해야 했다. 학교과정 전공, 교과 전공, 장애 전공이다. 학교과정 전공은 초등특수교육, 중등특수교육, 치료특수교육이 있었다. '치료'란 말에 잠시 매력을 느꼈지만, (중등)특수교육전공(그때는 중등이란 말이 없었다)을 선택했다. 장애 전공은 지적장애아교육을 선택했다. 중등특수교육전공을 선택했으니, 교과전공도 선택해야 했다.
교과 전공은 한 학기 전에 영어교육을 선택했다. 1학년 2학기에 영어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영어교육과 전공기초과목 "영어학개론"을 수강했다. 영어교육과에서 14과목(42학점)을 취득했다. 영문학 2과목(6학점), 영어학 10과목(30학점), 영어교과교육학 2과목(6학점)이었다. 특수교육전공에서 공부한 전공과목은 공통과목을 제외하면, 거의 정신박약아교육 전공의 과목이었다. 교직과목 10과목(20학점)도 취득했다. 나머지는 교양과목과 선택과목이다. 교원자격증을 취득하는데 필요한 것을 모두 이수했다. 1989년 2월 졸업하던 날, 졸업장과 함께 교원자격증을 받았다. 자격증 표시는 "특수학교 교사(정신박약) 외국어(영어)"다.
졸업하기 전에, 교사임용고시를 한 번이라도 볼 요량으로, 교육대학원에 입학하고 등록했다. 병역의무 미필이었기에, 학적이 필요해서였다. 내가 전공한 분야(정신박약, 중등, 영어교육)의 교사채용을 위한 임용고시는 아예 없었다. 강의 하나 듣지 않고 곧바로 휴학했다. 군입대를 기다렸다. 한 학기 뒤 (일반)대학원 석사학위과정 입학과 함께 자퇴했다. 등록금만 납부하고 그냥 그렇게 끝난 것이었다.
내가 KBK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 학과조교일을 하던 때였다. 3학년 때 1년 선배, 곧 4학년 선배 중에 장님 한 분이 있었다. 그 선배는 성이 함씨여서 함장님이라 불렸다. 나와 나이 차가 많았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다. 어느 날 그 선배가 시험을 봐야 하는데, 답안 대필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부탁을 받고 나는 대필자로 강의실에 같이 들어갔다. 그 과목을 '가르친' 교수는 바로 '그 분'이었다. 과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시험기간은 아니었다. 수업이 퀴즈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 학기 내내 강의없이 퀴즈 풀이만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좀 놀랐다. 배우지 않고 자습해서 퀴즈를 풀고 학점을 받는다는 것이 자못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내가 4학년이 되었을 때, 그 과목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미 학점을 많이 취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보다는 3학년 때 본 것이 있어서였다. 학부 4년 과정을 이수하면서, 나는 '그 분'이 담당한 과목을 하나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 분'은 실상 가르침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나는 '그 분'을 존경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분'도 그런 나를 탐탁치 않게 여겼을 것이다. 더구나, '그 분'과 KBK 교수님 두 분만 대학원 "정서장애아교육전공" 소속이었다(학부 과정에는 이 전공이 없었다). 실력 차이가 너무도 현격했다. 비록 학부 3, 4학년 학생에 불과했지만 그 반대 쪽의 연구실에 있었던 나를 좋아할 까닭이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다만, 대구덕희학교 한** 선생님과 가깝게 지낸 연유로 만나뵙는 일은 더러 있었다. 대학원 전공 선생님들이 체육대회 같은 것을 하고 난 뒤에, '그 분'은 저녁식사를 사주셨다. 몇 차례 따라가 얻어먹은 적이 있다.
KBK 교수님 연구실에 있던 그 시절, 그 전공에는 대학원 선생님들이 참 많았다. 내가 연구실에 들어갈 때에는, 이** 선생이 졸업하여 군입대한 뒤였고, 뒤에 부산에서 온 김** 선생밖에 없었다. 그때 김** 선생을 통해 '그 분'의 대학원 강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았다. 두 권의 영어원서를 각각 한 장(章)씩 1주일 동안 읽어야 했다. 수업에 들어가서는 퀴즈 풀이를 했다. 그 뒤 연구실에 와서 답을 맞추어 보는 것이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4학년이 되고 연구실이 5층으로 옮겨졌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분' 지도를 받던 정** 선생이 영어로 쓰여진 논문을 잔뜩 가지고 와서 같이 읽을 것을 부탁했다. 논문을 쓰는데 필요하여 인용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교수님께서 퇴근하신 뒤, 저녁 무렵부터 내가 본문을 해석하며 종이에 적고, 정** 선생은 중요한 부분만 적었다.
2. 석사학위과정 "전공의 변경"
내가 교육대학원 자퇴를 하고 1989년 2학기에 대학원에 지원했을 때, 입학원서의 희망 전공 란에 "정서장애아교육"이라 적었다. KBK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입학하자마자 교수님은 휴직하셨다. 캐나다에 가신 것이다. (작년올 1월에 교수님 댁에서 사진으로 본 둘째 따님은 정말 미인이었다. 수퍼모델을 꿈꿀만했다.) 그때 '그 분'은 재활과학대 학장이셨다. KBK 교수님은 심리요법과 교수이자 학과장이셨다. 휴직 승인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제출하고 휴직하셨다.
'그 분'은 "휴직계 미제출, 근무지 무단이탈"이라 했다. 당시 이태영 총장님께서 와병으로 유고상태였다. 학과 교수님 한 분이 총장대행을 하셨다. 총장직무를 대리하신 그 교수님이 학장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셨다. 그리하여 결국 본의아니게 대구대를 떠나야 했다. 참으로 억울하게 대구대를 떠나신 것이다. 대구대는 이 땅 최고의 행동심리학자, 숱한 임상경험과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교수님을 말도 안 되는 그런 이유로 떠나게 한 것이었다. 설사 단과대 소속 학과의 교수가 휴직 과정에 다소의 흠결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학장이라면 보호해주어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그 직위를 권력으로 삼았다. '그 분'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여기에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때 이 문제로 한 동안 학과 교수님들 간에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KBH 교수님이 어느 분과의 통화에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걸 처음 보았다. 내가 입학하여 첫 학기 초에 수강한 수업시간 중에 있었던 일이다. 그 통화의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그 뒤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학생들 사이에 전해졌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그 분'이 KBH 교수님께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교수일 때, 김 교수는 학생이었잖아."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분'이 참으로 치졸한 일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결국 나는 "정신박약아교육"(현, "지적장애아교육)으로 전공을 바꾸어야 했다. 입학 직후에 바꿀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학부에서 전공한 것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지도교수님으로 KJK 교수님을 참되게 만나뵙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3. 박사학위과정 "부전공의 선택"
이런 사정으로 내가 석사학위과정 전공을 바꾼 것을 다른 교수님들은 모르셨다. 그런데 정서장애아교육을 전공하던 선생님들은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놀리기도 했고, 걱정도 해주었다. 석사학위 청구논문 발표장에서 안** 교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다. 깜짝 놀랐다. 시간이 한참 지난 일이었고, 학생 하나 전공을 바꾼 그 사실을 그때까지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여간 석사학위과정에서공부할 때에는, '그 분'을 수업시간에 만날 기회가 애초에 없었다. 다행이었다. 공통과목과 전공과목만 이수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석·박사학위과정까지 모두 KJK 교수님 지도를 받게 되어 큰 행운이었을 뿐이다.
박사학위과정에서는 달랐다. 부전공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3과목 9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아무래도 정신박약아교육이 주전공이라면, 정서장애아교육을 부전공으로 하는 것이 순리다. 다른 대학원생들은 거의 그렇게 했다. 나는 사정이 달랐다. '그 분'과 그 분의 애제자가 정서장애아교육전공 소속 교수였기 때문에, 부전공의 대안을 찾아야 했다. 이런저런 것을 찾아보고 고민한 끝에 청각장애아교육을 부전공하기로 했다. 청각장애아교육전공의 과목 둘을 KBH 교수님이 맡고 계셨기 때문이고, 또 KBK 교수님과 KJK 교수님, 이 두 분과 절친하셨기 때문이다. 그 전공 소속 교수로 다른 두 분이 계셨다. 남은 한 과목만 다른 교수님 과목을 이수하면 되었다.
"청각학" 과목을 먼저 이수하기로 했다. 이 과목은 이** 교수님이 맡고 계셨다. 수업 첫날 주전공하던 선생님 한 분과 부전공으로 신청한 나와 다른 한 분이 재활원에 있는 교수님 연구실로 갔다. 20개 남짓의 토픽을 과제로 주시면서 짧은 영문글을 하나 주셨다. 2주간 조사해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격주로 수업이 있었다. 둘째 수업 날 나는 그 영문글의 번역글로 첫 토픽의 내용으로 삼아 보고서를 제출했다. 교수님께서 그 글에 나오는 "Veterans Administration(VA)"에서 본인이 청각학 공부를 했다 하시며 칭찬해주셨다. 재활원 이곳저곳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에, 교수님이 부전공으로 그 과목을 수강하던 우리 둘을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청각장애보다 정서장애가 주전공과 더 잘 어울리니 그렇게 할 것을 권유하셨다.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미 결정한 그대로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셋째 수업날, 한번 더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부전공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교사/교수채용 관련 일을 많이 해보셨다며, 김** 교수님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다. 시각장애아교육을 전공했지만, 심리요법학과 교수로 오실 수 있었던 것이 정서장애아교육을 부전공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람 간의 관계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정서장애아교육"으로 부전공을 바꿀 것을 선언한 말씀이었다. 잠자코 있다가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부전공 첫 과목 수업이 모두 끝났다. 그때 이**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두 과목은 KBH 교수님이 담당하던 두 과목을 이수하였다. "청각장애아교육연구"와 "청각장애아교수-학습론", 이 과목이었다. 부전공 마지막 과목, 마지막으로 받은 과제는 교수님이 주신 주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내 맘대로 주제를 바꾸어 제출했다. 그 보고서는 스클틱(T.M. Skrtic) 교수가 "Focus on Exceptional Children"이란 저널에 실은 장문의 논문을 우리글로 옮긴 것이다. "특수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이란 제목을 붙였다. 지도교수님께도 한 부 드렸다. 이렇게 하여 난감했던 부전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전공선택과목의 "선택"이었다. '그 분'이 맡은 박사학위과정 전공선택과목은 "특수교육행정"이었다. 교재는 과목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심리학 관련 영어원서 세 권이었다. 해답은 '그 분'만이 '갖'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주 각각 한 장(章)씩 읽고 퀴즈풀이하는 그 '일'에 너무도 힘들어 하던 선배들을 참으로 많이 보았다. 그럼에도 다들 이 과목을 이수했다. 이 과목을 신청하여 이수하면, 당시에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미국 책, 논문, 학위논문을 '그 분'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분'은 학생들 학기를 꼽으며 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 분'의 '기다림'에 '응답'하지 않았다. 대학원 박사학위과정까지 일관된 수업방식, 곧 '퀴즈풀이'로 그 과목을 이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분'으로 인해 내가 진로를 바꾸어야 했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대학 1학년 입학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나는 '그 분'이 담당하던 과목을 하나도 수강하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뵌 적도 없었으니, 받은 가르침도 없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나의 모교 대구대 특수교육(학)과에 소속한 '교수 중의 한 분'일 뿐이다. '스승'이나 '은사님'이란 말은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날 주전공/부전공과 관련되어 있었던 모든 일들을 나는 이렇게 본다. 나의 전공 변경과 부전공 선택 문제부터 말한다. 결과적로 참으로 잘된 것이다. 만일 내가 석사학위과정에서 정서장애아교육을 전공했었더라면, 얼마의 세월도 되지 않아 학업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명백하다. 그랬더라면, 박사학위과정에 진학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박사학위과정에서 그 전공을 부전공으로 했거나, 또 '그 분'이 담당한 과목 수강을 선택했더라면, 어쩔 도리없이 해내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심히 힘겨웠을 것이다. 3과목의 부전공과 1과목의 공통과목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경험칙(rule of thumbs)은 이렇다. 권위'적인' 사람, '억지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 대개가 나중에 알고 보면, 내면의 열등감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분'이 가르침 외로 하신 이러저러한 일들은 그 이면에 '열등감' 같은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랜 미국 유학 생활에서 생긴 것이고, 다른 교수님들과의 비교에서 더욱 커졌을 것이다. 학인(學人)으로서 자질과 능력없음을 자인(自認)한 분이 그토록 오랫동안 대학에 몸담고 있었다. '그 분'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 분'을 생각한다. 측은함 같은 것은 감정, 연민의 정을 느낀다.
2024년 11월 17일(일)
ⓒ H.M. Han
[補] 작년 이맘때(2023.11.8) 쓴 원고를 조금 고쳐 공개 발간한다. 이 글과 연관하여 어떤 사적인 문제가 하나 있어 미공개 글로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공개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그 문제란 나에게 참으로 큰 기대를 건 은사님께서 대학 교수 노릇을 오랫 동안 한 사람이 이런 류의 산문보다 학술서의 공동 또는 단독 저술에 힘써야 하지 않겠냐 하는 취지로 호되게 질책하신 것이다. 퇴직이란 학교에서 물러남일 뿐 학문에서 물러남은 아니기에, 나 역시 아직은 학문의 길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 다만, 논문이나 저서 같은 연구업적 쌓기에 쫒기지 않는 퇴직 교수의 신분이기에, 절실함도 없었고, 나태함도 있었고, 실력의 부족함도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일개 개인으로서 내가 살아온 공적·사적 삶의 역사와 함께, 일상의 삶 속에서 내가 보고들은 어떤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느낀 어떤 것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기록해두는 것도 학문만큼이나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런 생각의 편린들이 내 머리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에, 어떤 형식의 글이든 되도록이면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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