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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안길과 SE&SS: 공생애(公生涯)

[9] 아동학과와 아동행동치료실

by I'mFreeman 2024. 11. 25.

1998년 3월 대진대학교 아동학과 교수(전임강사)로 부임했다. 채용 전공 분야는 "특수아치료"였다. 특수아란 곧 장애를 지닌 아동을 말한다. 치료란 심리치료를 말한다. 나의 박사학위논문은 <성공경험, 목표설정과 귀인훈련이 정신지체아의 비인지적 동기특성에 미치는 효과>다. 정신지체아동(지금은 '지작장애아동')은 '정상'범위보다 낮은 지적능력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성공이든 실패든 그 원인을 본인 능력이나 노력 밖의 외부 요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성공(성취)보다 실패할 것을 기대하고, 그런 실패가 모든 상황에 일반화되어 성격 특성을 이룬다. 그렇기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기보다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한다. 이런 비인지적 동기특성을 외적 통재소재(locus of control), 낮은 성공기대(expectancy), 외부지향성(outerdirectedness)라고 한다.

 

    이것은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로터(J. Rotter)의 사회학습이론과 그를 바탕으로 한 지글러(E. Zigler)의 이론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종합하면, 특히 시설에 수용되어 살아가는 지적장애아동은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이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공을 경험케 하는 것,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 행동결과의 원인에 대한 지각을 바꾸어주는 것, 이 셋의 효과 여부와 상대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내 학위논문의 요지다. 그렇기에, 내가 공부한 분야가 채용 분야와 직접 관련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분야는 내가 대학 3학년 2학기에 그 연구살애 들어간 은사님의 전공 분야다. 그 은사님으로부터 정규 교과목 수업을 통해, 그리고 개인적으로 많은 가르참을 받았다. 그 은사님은 행동심리학자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등록된 심리학자이셨다. 이 땅에서 최고의 행동심리학자다. 아직도 정신의학자의 일부와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S. Freud)의 정신분석이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행동심리학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장애아동의 행동문제를 바로잡고 적응적인 행동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행동심리학밖에 없다. '불가능한 미션'(mission impossible)로 여겨졌던 자폐증 아동을 대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로바스(I. Lovaas)와 그의 저서(프로그램) 약칭 "Me book"이 이 사실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수교육에서조차 행동심리학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미국의 2004년 장애인교육법이 이른바 '긍정행동지원·중재'(PBIS: positive behavior support and intervention)가 개별화교육계획(IEP: Individualized Education Plan)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규정할 때까지 그랬다.

 

    내가 대진대학교에 부임한 1998년부터 명예퇴직한 2022년까지 교육하고 논문쓰는 일 외에, 자원하여 한 일이 둘이다. 하나는 교내에서, 다른 하나는 교외에서 했다. 이 글에서는 교내에서 학과 실습실을 이용하여 했던 일에 관해 적는다. 이 둘 모두 그 은사님과 은사님의 가르침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짧게 그리고 깊게 생각한 다음 일단 일부터 벌리고 보는, 때로 저돌적으로, 때로 충동적으로 시작하고 보는 나의 행동방식도 한몫했다. 또, 그때는 나를 따르는 학생들이 있었다. 부임한 뒤에 아동치료실습실이 내 책임이었다. 그 밖에 아동관찰실습실, 아동상담실습실, 아동교육실습실도 학과 소속으로 있었다. 교육부터 관찰, 상담, 치료까지 공간이 있었고 얼마 뒤에 조교 1명도 확보했다. 네 곳의 실습실을 모두 활용하여 One Stop Service를 지역에 제공하는 사업을 계획했다. 시청 사회복지과와 교육청 초등교육과에 찾아가서 협조를 요청했다. 그 당시 포천에 사는 장애아이들은 의정부나 서울 강남까지 가야 했다. 행동치료실 운영 참여를 자원하는 학생들을 서둘러 모잡했다. 많은 학생들이 동참해주었다. 심리검사의 실시와 채점과 해석을 가르치는 워크숍부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단골로 가던 마트에도 알리고 후원금모금함도 하나 받았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교가 사직하여 새로 구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학교에서 시설공사와 물품구입까지만 해주고 사업은 허가하지 않았다.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일이든, 책임은 내가 져야 했다. 미국심리학회의 윤라강령에 따르면 광고는 불가한 것이었다. 이 사업을 알리는 일도 학교의 불허 결정으로 할 수 없었다. 다행히, 교직원 중에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분이 있었다. 또, 우리 집에 1주일에 한번 오는 웅진싱크빅 선생님이 아내로부터 사실을 알고 어린 아이 한 명을 소개해주었다. 이 두 아이로 1999년 10월 경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알음알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오는 분들이 있었다. 그 수가 점점 많아졌다. 개별치료와 함께 그룹수업도 진행했다. 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풍에 돛단 듯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심리검사비와 행동치료비는 조금 받았다. 그 돈은 심리검사, 교재교구, 부모용 참고, 각종 비품(예: 에어컨, 캠코더) 구입과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한 치료사 급여에 모두 썼다(한 동안 대학원에 아동학과가 설치되지 않았다). 수입과 지출 모두 결의서를 작성하고 장부에 기록하게 했다. 나는 결재만 했다. 돈은 일전도 만지지 않았다.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자, 시기와 질투와 음해의 말들이 들려왔다. 다른 학과 교수들은 아동학과 살습실이 과다하다고 불평했다, 내부 총질도 있었다. '받은 돈을 어디 쓰나,' '아동학과 실습실을 왜 지역 아이들이 사용하나' 같은 말들이었다. 앞의 것은 앞서 말한대로였기에 언제든 장부를 공개하여 해소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교수 중 한 분이 제시한 대안대로 학과에서 관리하기로 했다(뒤에 철회한 것도 그 교수가 한 것아다). 뒤의 것은 말 자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동학과 실습을 아이들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동관찰 실습은 무엇을 관찰한다는 말인가. 포천과 같이 낙후한 지역에 사는 장애아동과 그 부모에게 그 지역의 유일한 4년제 대학에서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이 학교의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에 조금도 도움아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학교에 대한 지역만들의 이미지를 높이는 첩경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러저러한 말들을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법인 사무국 부장 두 분 중 한 분이 치료실습실을 방문하셨다. 조교의 연락을 받고 내려갔다. "치료"를 한다니, 무슨 말이냐고 했다. 의사가 아닌 내가 병의원도 아닌 아동학과 실습실에서 "치료"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간 있었던 일도 하나하나 말씀드렸다. 그제서야 이해되었다. 좁은 부모대기실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더 넓은 곳에서 하라고 했다. 외국인 교수 연구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건물 날개 부분을 모두 치료실습실로 사용하는 것(우측 출입문은 전용으로 하고), 시청각강의실로 옮기는 것을 공문으로 학교에 올리라고 했다. 다른 부장님은 음기가 강한 그 곳(정말 습한 곳이었다)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좋지 않으니 반대편으로 옮기라고 했다(4층에 있던 연구실 밑이어서 관리에도 큰 보탬이 되는 것이었다). 결국, 학과장 회의에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인문학관 건물 앞에 신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예산은 5억. 이 일은 기실 공간조정을 이유로 들어 치료실습실을 어떻게 해보려는 학장의 사악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분 뜻대로 되지 않았고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뒤에 그 부장님이 여러 가지 방안을 얘기했다. 쓰레기 분리수거장으로 함께 갔다. 이곳이 예정 부지라고 말했다. 진실로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왜 나를 돕느냐고. 대답은 아런 것이다, "교수님이 예쁘서가 아니다. 다른 교수들이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는 일, 하지 않아도 돠는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의 진의를 알아봐준 그 분이, 법안 사무국이, 이사님들이 정말 고마웠다. 설립계획서를 만들어 학교 경유 없이 법인에 올리되, 대외비로 하라고 했다. 시설명은 "아동개발센터"로 하고 어린이집, 유치원, 특수학교, 각종 치료실을 포함하였고 대진대 주도로 설랍한 경기북부테크노파크와도 연계했다. 그 설립 필요의 근거를 학교, 법인, 지역사회로 나누어 빠짐없이 적었다. 다만, 돈에 대한 관심도, 지식도 없는 탓에 예산안은 세우지 못했다. 예산안은 뒤에 추가로 제출했다. 각각의 시설에 대한 기준을 규정한 법률을 모두 조사해야 했다. 조금 넉넉하게, 부지매입비를 포함하여 150억 정도를 적어냈다. 교지 외 법인 소유의 토지가 있으니 토지매입비 빼고 150억으로 다시 제출하라고 했다.

 

    법인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되어 신설이 결정되었다고 했다. 그 예정부지에. 그런데 그때 그 일과 아무 관련 없는 일로 뜻하지 않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법인, 정확히는 종단에 대해 교수협의회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방학 중에 학생회관 앞에서 천막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법인에서는 이 문제의 해결이 시급했다. 아동개발센터 설립 같이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일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루하루 지나감과 함께, 내 속은 타들어갔다. 그런 문제 제기는 교수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날로 교수협의회에서 탈퇴했다. 사립학교에서 학교나 법인에서 특정 교수에 대해 부당한 행위를 하는 경우, 교내에서 이를 지켜줄 곳은 교수협의회밖에 없다. 교내 정치를 하는 협의회, 그럴 의도는 없었을 것이지만 여러 모로 학교에 보탬이 되는 그 센터의 설립을 가로막은 그 협의회에 매달 회비를 낼 이유가 없어졌고 그에 소속한 것이 부끄러웠다. 비겁한 자들이었다. 학생이 없는 때, 단식 아닌 단식투쟁, 철야 없는 철야투쟁, 바로 그것이었다.

 

    아동치료실습실에서는 1년에 한번 2박 3일 하계캠프를 갔었다. 가평에 있는 도대수련원을 이용했다. 폐교한 학교를 국립경진학교에서 이용하여 교사 한 명을 파견하고 운영하던 곳이다(지금은 아니다). 경진학교 수련기간이 아닌 때 이용할 수 있었다. 이용료가 너무도 저렴했다. 산 깊고 물 맑은 곳이었다. 그래서 매년 그곳으로 캠프를 갔다. 그 해도 그랬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인원 점검을 했다. 한 명이 없었다. 큰일이 난 것이다.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물가로 달려갔다. 그 녀석이 튜브로 물놀이그렇를 하고 있었다. 작년에도 그렇게 애태웠던 녀섯이다. 얼른 데리고 나와 치료사들에게 안계했다. 그리고 숙소 마루 바닥에 엎어져 누웠다. 온갓 생각이 다 들었다. 내 친구 중에 이런 일로 징계받고 피해보상하고 결국 그 학교를 떠난 친구가 있다. 경진학교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나의 경우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면, 민·형사상 책임과 교내 징계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무몰했음을 비로소 느꼈다. 다음 날 부모님들께 전할 편지를 썼다. 치료사들로 하여금 소견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 둘의 전달과 함께 아동행동치료살 운영을 그만두었다. 아동개발센터 설립의 꿈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하여 텅빈 공간만 존재하고 있었다. 2012년 연구년 승인을 받아 한 해 쉬면서 번역작업을 했다. 학교에 돌아가니, 조교 자리는 이미 회수된 뒤였다. 나 없는 사이에 치료실 반납까지 학과에서 결정하여 단과대학에 알린 뒤였다. 내 의견만 남아 있었다. 학과장 회의에서 학과 의견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 공간에 있는 물건들을 치워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이제 홀로 남은 내가 모든 것을 정리해야 했다. 그 무렵 병원에 갔다 오는 길에 넘어져 깁스 하고 목발 짚고 그렇게 정리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퇴직 후에 치료실 관련 기록들까지 불태워 없앴다(아이들과 학생/치료사 기록은 학교 공문에 따라 벌써 없앴다). 그 공간은 몇몇의 박사학위 취득자, 다수의 석사학위 취득자(내가 지도한 석사학위 소지자는 25명이다)를 배출한 곳이다. 난 일복이 많다. 가는 곳마다 일이 있고 또 스스로 일을 만든다. 내가 실습실을 이용하여 벌인 아동행동치료실 사업은 참으로 허망하게 끝났다. 아니다.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JP가 말하지 않았는가. 교육도 '허업'이다. 제자들을 길러낼 뿐, 내게 남는 것은 없어야 마땅하다. 나를 딛고 더 휼륭한 인재가 되어 나라와 사회에 기여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렇게 잘 해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2024년 11월 25일(월)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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