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떤 은사님에 대해 쓴 글의 일부였다. 그 은사님이 나의 모교를 떠나 카이스트로 옮기시고 경북대학교에서 은퇴하시게 된 것에 '그 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내가 전공을 변경하고 부전공을 다른 전공으로 선택한 데 '그 분'이 있다. 그 분은 내가 입학한 대학과 대학원에 소속한 여러 교수님들 중에 한 분이다. 교수는 논문으로 말해야 한다. 실력으로 존재감 있는 교수님은 지도교수님을 포함한 네 분밖에 없었다. 그 밖의 교수님들은 존재감을 느낄 만한 분이 아니었다. 그 분은 논문을 통해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분의 존재감은 범상치 않은 외모와 그 많고 많은 영어로 된 전공 서적들, 그리고 권위주의 때문이었다. 그런 그 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그 분의 그런 권위주의를 몹시도 혐오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 분과 먼 곳에 있었다. 몸도 그랬고 마음은 더 그랬다. 3학년 2학기부터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그와는 반대 편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 분'을 아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주 잘 알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내가 그 분에 대해 보고들어 아는 것은 많지 않다. 내가 한 곳의 대학에서 10여년 공부하는 동안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된 것의 대강은 이렇다. 사모님이 미국에서 의사로 있다는 것, 돈을 많이 벌어 부유하다는 것이었다. 그 분은 웨인주립대(Waine State University)에서 교육학박사(EdD)를 취득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박사학위논문을 본 적은 없다. 미국에서 교육학박사는 철학박사(PhD)와 달리, 연구방법 또는 통계학 과목 등 학점을 추가로 취득하면, 학위논문을 면제받고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위논문 없는 박사학위 소지자일지도 모른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 때가 되면 미국에 들어가셨다. 그때마다 수많은 영어원서를 구입해 오셨다. 본인 과목을 수강한 대학원생들이 부탁한 미국 학위논문이나 서적들도 가져오셨다. 그렇게 구입한 그 엄청나게 많은 책들만으로 연구실이 가득 찼다고 말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분은 그렇게 우리 대학 특수교육과, 아니 우리나라 특수교육과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장서가'였다. 최고의 '독서가'였는지는 모른다. 나는 독서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이런 경험이 있어서다. 우리 연구실 어느 선생님, 수료 후에 오랫만에 학교에 왔다. 그 분께 인사드렸다. 그 분이 그 선생님과 내게 밥을 사주셨다. 논몬 얘기가 나왔다. BGT로 논문을 쓸 생각이라고 그 선생님이 말씀드렸다. 그 분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약어 BGT의 본말만 했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 지도교수님께서 퇴직하신 뒤에 후학들에게 사료로 남길 목적으로 기획하신 책을 촘촘히 살펴본다. 초창기 특수교육에 관여했던 여러 분들이 글로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채집한 책이다. 제목은 <특수교육의 뒤안길>이다(내 생각으론, 자기과시 등 기획의도에 잘 맞지 않는 글들이 많아 소기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되지 못했다). 이 책은 교육부에서 모 연구관이 내게 준 책이다. 마산에 살고 계신다는 말을 최근에 후배로부터 들었다. 그 후배의 부친과는 부산맹학교에서 인연을 맺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책에서 본인이 직접 밝히신 글로 그 분의 삶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대략 이렇다.
'그 분'의 부친은 검정고시로 의사가 되셨고, 모친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셨다. 마산에서 태어나셨고, 비교적 부유하게 사셨다. 공부를 잘하셨다. '그 분'에 대한 부친의 바람은 정규 대학의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시험검정으로 의사가 된 부친이 아들만은 의과대학 졸업으로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셨던 것이다. 부모 마음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모친은 고려신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셨다. 목사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그 분'은 연세대 신학과를 선택하셨다. 1960년 연세대를 졸업하신 뒤의 진로에서도, 부친과 모친의 바람은 달랐다. 부친은 부산대 의학과 학사편입을 추천하셨고, 모친은 거듭 고려신학교 진학을 간절히 바라셨다. '그 분'이 어릴 때 중병으로 생명을 잃을 뻔하여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분'은 이 둘 모두 관심 밖의 것이었다. 부산대 대학원 철학과 진학을 준비했다. 그런던 중에, 부산맹아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1960년부터 1969년까지 부산맹아학교 교사로 봉직하셨다. 교원자격증 둘도 취득하셨다. 1963년 부산대에서 철학으로 석사학위도 취득하셨다. 사모님이 의대 학생일 때 맞선보고 결혼하셨다. 부친의 도움으로 사모님이 먼저 미국으로 유학가셨다. 수련의로 있을 때, '그 분'도 미국으로 가셨다. 웨인주립대(Wayne State University) 석사과정 특수교육과(정신지체전공)에 '조건부' 입학을 하셨다. 그 대학에서 이영식 목사님께서 손수 적은 감사장을 보았다고 했다.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셨다. 마침내 1972년 5월에 정신지체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셨다. 같은 해 11월에 한국에 오셔 한사대(현,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단국대에서도 세미나로 하셨다. 그러던 중에 어수선한 시국사정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셨다. 박사학위과정에 진학할 것인지 아니면 특수교육 전문가 자격과정을 할 것인지 고민하셨다. 미국에서 계속 살 생각으로 특수교육 전문가(Special Education Specialist) 과정을 선택하셨다. 직업재활도 공부하셨다. 1976년 이 과정을 끝냈다. 다시 박사학위과정에 진학하여 1981년 정신지체아교육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그 기간에 대구대와 인연을 맺어 초빙교수로 오셨고, 1977년 정식으로 조교수가 되셨다. 1978년 대구대에서 처음으로 정서장애전공 강의를 하게 되면서, 정서장애아교육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자술(自述)하신 '그 분'의 생애에 대해, 내가 직접 보고들은 경험담과 함께 내 나름대로 해석해본다. 내가 은사님 연구실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 하나 있다. 1학년 말에 선배 한 분이 "특수교육문헌목록"이란 것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책과 논문의 제목 등을 모으는 작업을 했다. 이 일에 참여하여 그 선배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1차 작업이 끝나고, 2학년 어느 무렵에 외국문헌까지 포함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외국문헌 최고 장서가인 '그 분'의 연구실에 있던 자료들을 하나하나 보고 종이에 적었다. (이때 조사한 것은 나중에 발행된 책에 포함되지 못했다.) 특수교육에 막 입문한 내가 보기에도 좋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그 분'의 박사학위기를 보았다. 박사학위논문은 보지 못했다. 앞에서 말한 미국 학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교육학 박사학위(EdD)는 철학박사학위(PhD)와 달리, 연구방법론이나 통계학 과목 이수 또는 외국어 시험 통과로 학위논문을 면제받고 취득할 수 있다는 그 얘기 말이다.
그런 탓일 것이다. '그 분'은 자신이 맡은 교과목 강의를 하지 않았다. 모두 퀴즈로 진행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모두 말했다. 학위논문 지도는 더했다. 그럴 만한 역량이 없었다. 앞의 책에서 본인 스스로 인정한 말씀과 같다. "스스로 생각해도 학자가 될 소질/소양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또, 석사학위과정 '조건부'로 입학한 것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에 박사학위과정에 바로 진학하지 않고 '특수교육 전문가' 과정에 들어가신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정신지체"를 전공하고도 "정서장애" 전공을 맡았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사정이 그러했기에, 정서장애아교육을 전공한 그 분 지도학생들은 학위논문을 쓸 때가 되면, 같은 전공의 다른 교수님께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자리잡고 있던 전공에 실력 있는 교수가 와서 학생들을 잘 지도하니, 질투나 시기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야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 분'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드러내야 했을 것이다. 사람 욕심이 많았다. 자신을 인정하고 떠받드는 학생들을 좋아하셨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다. 책이며 논문이며 필요한 것은 모두 구해주셨다. 본인 제자들이 교수가 될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왔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다수의 제자들이 교수가 되었다. 학생들(대부분 학부전공은 특수교육이 아니었다)이 몰려 들었고 잘 보이려 애썼다. 이들로 무리를 지었다. 자기 눈밖에 난 제자들에게는 가혹했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무릎 꿇어 용서를 빌고서야 학위를 받은 분도 있었음을 뒤에 들었다. 이런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은 설자리가 비좁았다. 결국 공부를 중도에 그만둔 사람도 여럿 봤다.
대명동 캠퍼스에 있던 가정대학이 경산 캠퍼스로 옮겨가고, 그 건물에 부속학교 대구광명학교 일부가 옮겨갔다. 강영우 박사 생애를 다른 드라마 촬영지이기도 했던 대구광명학교(이 역사적인 건물, 지금은 없다. 참 애석한 일이다) 2층에 "학습장애교육센터"가 생겼다. 내가 알기 로는, 본래 그 일을 송담선생께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름을 지으신 것을 보았다. 지금은 그 영문이름의 맨뒤 단어만 생각난다. "○○ Programme"이다. 청소를 한다기에, 나와 후배 그리고 K선생도 그렇게 알고 도왔다. 그런데 그곳의 제일 넓은 방으로 '그 분'의 연구실이 옮겨졌고 '그 분'이 책임을 맡았다. 이름도 그렇게 바뀌었다. 그 이면의 사정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무렵을 전후로 총장께서 그 분을 대동하여 외국에 가신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곳은 그 분의 지도를 받는 정서장애아교육 전공자들의 아지터가 되었다. 여기서 아이들을 받아 임상이란 것(?)을 했으니, 학생들이 더 몰려갔다.
한국정서·학습장애아교육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계간으로 32쪽의 "정서·학습장애아교육"을 발간했다. 1989학년도 1학기에 '그 분'의 애제자가 대구대 치료특수교육학과 교수가 되었다. 정서장애아교육전공에 속했다. 그 애제자가 오기 전, 바로 전 해의 어느 날 나를 불러 복사를 부탁했다. 영문글 둘이었다. 조금 읽어보니 추천서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그 분'의 애제자에 대한 미국 지도교수의 추천서임을 나중에 알았다. '그 분'과 그 애제자, 그 두 분이 정서장애아교육전공 소속 교수였다. '그 분' 말씀대로 그 애제자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연구회를 학회로, 학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었다. 본인의 회고대로, 정서장애아교육전공과 학습장애교육센터가 중심이 되어 대단한 맨파워(man power)를 가진 것이다. 석사학위 취득자만 대략 15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 연구회가 한국정서·행동장애아교육학회가 되었다. 그 소식지가 어느 날 학회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당시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 학술지가 되었다. 이건 정말 꼼수다. 앞의 소식지는 소식지였을 뿐인데, 앞의 것까지 학술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관련 전공 학생들과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연수회를 연 2회 실시했다. 일정 시간을 채우면 행동치료사 자격증을 주는 연수였다.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것으로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다. 곧 사단법인을 설립했다. 지금은 미국의 비영리단체 행동분석가자격인정위원회(BACB: Behavior Analyst Certification Board)의 한국위원회가 되었다. 이런 것으로 '대단한 맨파워'를 이룬 것이다. 그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그 애제자와 나는 여러 일로 부딪혔다. "치료교육" 문제가 가장 큰 것이고 내가 쓴 원고를 통채로 도용하여 책의 한 장으로 끼워넣은 것이 가장 작은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더할 말을 더하지 않는다. 다만, '그 분'과 그 '애제자' 그 주위의 분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 위원회가 요구하는것처럼, 행동분석가로서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공익을 위한 전문가로서 윤리강령을 잘 준수하고 있는지.
2024년 11월 29일(금)
ⓒ H.M. Han
"글감창고"에 넣어둔 글들을 덜어내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의 초고는 작년 11월 8일(수)에 쓴 것이다. 앞의 어느 글에서 말한 사연으로 글을 마무리하지 못했고 공개하지 못했다. 그런 사유은 아직 해소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글감창고에 저장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여 오늘 글을 마무리하고 공개하기로 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의사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행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유권의 행사는 남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 글의 내용이 특정 사인과 또는 집단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지만, 그건 사실(事實)과 그 사실에 입각한 내 생각일 뿐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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