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10] (학교)폭력과 더불학교
본문 바로가기
들안길과 SE&SS: 공생애(公生涯)

[10] (학교)폭력과 더불학교

by I'mFreeman 2024. 11. 26.

 

바로 앞의 글에서는 나는 내가 대학의 교수로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둘 했다고 말했다. 앞의 일을 하는 동안, 그리고 그 일을 모두 접은 뒤에도 그런 종류의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글로 적으려 한다. 앞의 일과 짝을 이루는 일이다. 2000년대 초반 내가 쓴 논문이 몇 편의 논문이 특수교육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국립특수교육원에서 하는 과제에 매년 공동연구자로 참여했다(연구비가 아니라 원고료로 수고비를 받았다). 또, 교육부 일에도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외부 일과 함께, 앞 글에서 말한 은사님이 주력하고 계셨던 조금 참여하며 어쩌다 공저자가 되었다. 오전에는 머리 아픈 외부 일을 하고, 오후에는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행동심리학을 연계하여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공헌하고자 한 은사님의 글을 교정·교열하는 작업을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계정혜 삼학에 입각하여 행동심리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 책에서 제시하고 후학들이 계속 연구하여 이어지길 바라셨다. 대구에 내려간 어느 날 교수님 자택으로 찾아뵈었다. 그 책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내게 잘 맞는 것이라 하시며 책 한 권을 보여주셨다. 친사회기술(prosocial skills)을 청소년들에게 단계적으로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담긴 책이었다. 계정혜 삼학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다. 아동학과 행동치료실습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과 제목이 같았다. <스킬스트리밍>(Skillstreaming)으로 골드스타인(A. Goldstein) 교수와 맥기니스(A. McGinnis) 박사가 공저한 것이다. 적용 대상은 달랐다. 초등학생과 청소년. 동료 교수 한 분은 이 둘 외에 유아를 위한 프로그램도 소장하고 있었다.  대진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이 책 세 권 모두 있었다. 우리글로 옮겨 국내에 소개할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청소년용이 시급했지만, 자료가 더 풍성한 초등학생용부터 번역하기로 했다.

 

 

    그 즈음에 아내가 활동하던 아동도서 관련 모임 회장의 전횡으로 회원들 일부가 지쳐가고 있었다. 아내와 아내가 친하게 지내는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 초등학생들에게 친사회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같이 해보자고. 학교 내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고, 또 대학원 아동학과 특수교육전공 원생들의 실습장이 필요했던 것도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우선 우리 집에서 이 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모두 번역하고도 출판하지 못한 책의 일부를 기초공부 자료로 만들었다. "우리아이들의 건강한 발달을 생각하는 모임"을 발행처로 했다. 내가 임시로 표기했던 단체명은 "우리아이건강발달회"(약칭, 우아회)로 바꾸었다. 우리 가족 서예·전각 선생님을 교장으로 모셨다. 서예·전각으로만이 아니라 인품으로도 지역민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나 역시 존경한다. 직인을 직접 새겨주셨다. 학교 이름은 교장직을 맡으신 그 선생님의 제안대로 "더불학교"로 정했다. 사업계획서 1쪽을 만들어 인근의 포천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뵙고 취지를 말씀드렸다. 그 교장선생님과는 국립특수교육원과 교육부 공동의 일을 할 때 알고 지낸 분이었다. 취지를 십분 이해하시고 흔쾌히 수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부모교육도 필요하다며 평생교육 강사로 나를 위촉해주셨다. 그리하여 겨울방학 기간에 첫 마당이 열렸다. 담임선생님이 추천한 아이들 10여 명과 함께.

 

 

    기실, 그 책을 온전히 번역하지도 못한 채 프로그램만으로 시작했기에, 허점이 많았다. 나는 급한대로 수업절차부터 우리말로 옮겼다. 나머지 부분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우리말 번역에 매진했다. 맥기니스 단독 저술 <스킬스트리밍: 수업계획과 활동>의 우리말 옮김이 절실했다. 출근 전 1-2시간 사무실에 가서 그날 수업에 필요한 부분(CD에 들어 있는 활동지 포함)을 번역해 놓고 출근했다. 수업 마당이 거듭될수록 점점 더 발전했다. 그런 반면 이제는 사무실이 필요했다. 말만 학교일 뿐 교지도 교사(校舍)도 없는 '찾아가는 학교'였기에, 수업 나가기 전 아이들에게 전달할 스크립트를 맞춰 봐야 했고, 모델링 시연과 수업자료 제작 등 수업에 필요한 물품들을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을 통해 뵌 상이군경회 회장님이 3층을 임시 사무실로 쓸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리하여 대학원 원생들이 동참할 수 있었다. 수업을 모두 무료로 진행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수고비가 없었다. 학교 운영을 위해 회원을 모집했다. 여러 분이 동참해주었다. 그리고 이것 반월문화제가 열리는 날 바자회를 열었다. 내 이종사촌 누나가 보내준 천염염색 옷들, 내 친구의 친구가 지정 기탁한 유명 메이커의 아동복, 교장 선생님과 그 지인으로부터 받은 도각(陶刻) 작품, 가방 등의 소품, 낙화(烙畵), 그 지도를 받는 분들이 건네준 서예, 전각, 동양화 등, 선생님과 우리들이 함께 제작한 족자, 도각, 천연비누 등을 판 돈으로 운영했다. 선생님 사모님이 내게 선물로 주신 그림도 아는 사람에게 내다 팔았다. 강매나 다름없었다.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원회비와 바자회 수익금만으로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군 상담관으로 근무하다 동참한 제자가 있었다. 학부 다닐 때 내 연구실에서 공부했고 뒤에 건국대에서 박사학위과정을 수료하고 논문만 남아 있었다. 논문 쓰는 동안 동참하가로 한 것이다. 그가 있어 더불학교 식구들이 함께 여러 일들을 해냈다. '법인으로 보는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되어 시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계간으로 소식지도 만들어 후원해주시는 분들께 모임의 소식을 전했다. 연말에는 시로부터 받은 보조금으로 <더불학교 이야기>란 책자도 발간했다. 사업이 진행될수록 지역의 호응도 있었다. 단체 수상도 하고 운영위원장 개인 수상도 했다. 조금씩 모아둔 발전기금도 쌓여갔다. 이제 출구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을 너그럽게 좋게 봐주신 회장님이 서운함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그 3층 옥탑방에 있는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간 신세를 너무 많이 졌다. 자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물 2층을 전세내어 사무실을 옮겼다.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생에게 교통비와 소액의 수고비를 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운영위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었으니, 학위를 받고 졸업한 이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그리고 학교 아동행동치료실습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쪽 공부를 하려는 학생이 더는 없었다. 아동학과 교수들은 진로를 어린이집만으로 제한했고 학생들은 그렇게 따라갔다. 집안 문제로 돈이 필요했던 또 다른 학과 교수는 대학원 외로 별도의 과정을 만들어 학생들을 그쪽으로 유인했다. 이런 행위들은 결코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실로 심각한 것이다. 보육교사교육원 1년 과정만 마치면 보육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에게는 '전문성'과 '정통성'을 인정받는 진로, 그런 것이 없다면 개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행동문제 전문가, 친사회기술교육 전문가, 장애아동전담 보육교사(보통의 보육교사라고 해도)가 그 대안이 돨 수 있다고 생각했다. 뜻만 모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교육과정의 일부만 조정하면 돨 이 문제 때문에, 학과 회의 때마다 다투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부터 앱 개발, 만화 제작, 전문가 양성 등을 생각했다. Why 시리즈로 유명한 예림당을 찾아갔다. 창업주가 고등학교 선배다. 연세가 많아 아들이 경영한다고 했다. 내 얘기를 들은 담당자는 인문사회 분야를 회사에서도 생각하고 있다며, Why 시리즈에 하나 또는 별도 출간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 분야에 대한 지식도, 기술도, 자금도 없었다.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바자회 때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참으로 많은 고가의 아동복을 지정 기부해준 친구의 친구를 친구와 같이 찾아갔다. 노원구나 강남권에 교육장을 마련할 생각에서였다. 그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본인도 사회복지재단 같은 것을 설립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사업계획서에서 막혔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사업계획서, 특히 설립자금 그리고 수입과 지출에 대한 계획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만 무심하게 흘러갔다.

 

    두 권의 책을 모두 번역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원저를 출판한 미국 회사와도 계약이 성사되었다. 1차 교정까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해를 걸러 2011년에 겨우 넘길 수 있었다. 2012년 1월 5일 정식 출판되었다. 그 해는 1998년 임용 후 나의 첫 연구년이요 마지막 연구년이 되었다. 무려  15년만의 외출이였다. 연구'년' 제도 덕분에, 대학 교수는 6년마다 한 해를 연구만 할 수 있다. 평소에도 방학 넉 달은 연구'월'이요, 수업이 없는 날은 연구'일'이니, 대단한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월급이 대폭 준다는 괴담(사실은 달랐다)의 영향도 있었지만, 내가 연구년을 신청조차 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되면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이 졸업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2011년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연구년을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대구에서 한 학생이 학교폭력 문제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번역한 책이 출간된 그 무렵이었다.

 

    나는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교육부에 전화하니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대책회의냐고 물으니, 황당한 답변이 돌어왔다. 국회에서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 그 대책을 의논한다는 것이었다. 경기도교육청에서도 비슷한 답변을 들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홈페이지를 모두 뒤졌다. 그 중 한 곳에서 이름을 알 듯한 어떤 사람의 글을 봤다.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대진대 졸업생으로 몇 해 전에 전문상담교사(2급) 양성과정에서 두 과목 내 수업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를 통해 교육부와 학교폭력피해자협의회 회장에게 책을 전달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역구 국회의원실에 전화했다. 보조관과 약속을 정하고 만났다. 내 얘기를 경청했다. 교육위원회 의원실에 전하겠다고 했다. 진실로 고마운 분이었다(얼마 전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내게 그 책을 소개한, 경북대 교육학과에서 은퇴한 그 은사님은 은사님대로 대구시 교육청 등 여러 곳에 알렸다. 별 소득이 없었다고 하셨다. 그 대신에 나주시 소재 국립정신병원에서 작업치료사가, 부산에서 교사들이 연락해 왔다(더 있었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건강상태 때문에 응할 수 없었다. 부산은 아내가 내려갔다. 또, 내 수업을 들은 그 전문상담교사가 교육청 직무연수 60시간을 모두 내가 맡아달라고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이었기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일단 승락했다. 결국에는 이 또한 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더 없는 기회를 내 사정으로 놓친 것이다. 그 해 연말, 포천초등학교 교장이 우리 회원이기도 하고 나도 아는 분이고 교장 선생님과는 각별한 사이인 분으로 바뀌었다. 학교 자체 직무연수를 우아회에 맡겼다. 나는 행동심리학에서 말하는 행동의 원리와 행동문제 수정방법, 그것과 친사회기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강의했다. 실제 교실현장에서 이들 기술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은 모임을 같이한 분들과 대학원생들이 진행했다.

 

    이 일을 몇 사람이, 주위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맨 바닥인 상황에서 이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더 이상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박사학위논문 제출과 함께 그 제자도 떠났다. 남은 대학원생들도 학위취득과 함께 모두 떠났다. 아내와 절친인 사람, 그렇게 두 사람만 남았다. 사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휴업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또다른 교육사업(바우처사업)을 하던 어떤 사람이 협업을 제안했다. 그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조정했다. 먼저 학생들을 가르칠 사람들에게 방법을 가르쳐야 했다. 이 일은 아내가 도맡았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그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의혹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협업 관계를 종결하자 아내에게 배우던 그 쪽 사람들이 아내와 함께 하겠다며 함께 나왔다. 그들로 운영위원(이사)을 교체하고 단체명도 "사람사이행동연구소 더불"로 변경하였다. 얼마가지 않아 한 사람, 두 사람 빠졌다. 명맥만 유지하다 우리까지 사정이 생겨 휴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폐업했다.

 

    경기도 동북부 낙후된 도시, 포천에서 중학교 한 곳과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이 교육을 시도했다는 사실, 그것도 몇몇 사람의 희생과 봉사만으로 이룩한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업에 관한 사실을 대략 알렸다. 십여 년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기억하는 것만 적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책에 관한 것이다. 최종 교정지를 출판사에 넘긴 날 그 원저의 출판사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기이한 일처럼 여겨졌다. 유아, 초등학생, 청소년용 모두 개정판(제3판)이 출간된 것이다. 공저자 골드스타인이 사망한(2002년) 뒤이기에, "골드스타인의 접근"이란 부제가 붙은 맥기니스 단독 저술이었다. 3권 모두 구입하고 개정된 부분을 대조하여 청소년용 스킬스트리밍을 번역하는 작업을 연구년 기간에 했다. 연구년 과제는 제쳐두고 이 일에 몰두했다. 출판사를 통해 판권도 확보했다. 또 다시 몸이 길을 가로막았다. 초고(草稿)를 다듬을 힘을 주지 않았다. 계약부터 1년이 지나자 출판사에서 판권을 포기했다. 또 하나의 미출판 번역원고로 남은 것이다. 요즘 같이 어려운 사정에 번역서를 선뜻 출판하겠다는 출판사를 찾기는 어렵다.

 

    나는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친사회기술을 교육하는 <스킬스트리밍> 프로그램은 <공격성대체훈련>(ART: Aggression Replacement Training)에 속한 세 프로그램의 하나로 중핵적인 것이다. <공격성대체훈련>과 그 프로그램 셋은 <준비하라 교육과정>(Prepare Curriculum)의 10대 영역에 포함된다. 이 교육과정은 1998년 개정판으로 발간된 골드스타인의 단독 저술이다. 그 전애 일부 번역한 것도 있고, 나머자는 대학에서 은퇴한 무렵부터 번역을 재개하여 일단 초고는 끝냈다. 교정·교열과 함께 문장을 다듬고, 특히 문화적 차이를 적절히 처리하여 '나만의 교육과정'을 만들 것이다. 들판의 학인이 된 지금은 연구실적을 쌓기 위해 꼭 출판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나만의 이것으로 유·초·중·고등학교 그리고 어린이집의 현직 교사와 교사 후보자들을 전문가로 양성하는 일을 해보려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다. 청소년들만이 아니다. 성인도, 초로의 노인도, 특히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도 이 '준비'가 꼭 필요하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보고듣는 사건들, 공격과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사회를 '치유'하고자 한다면, 혽이러한 '준비'가 꼭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향땅 대구에서 시작해 볼 것이다. 내가 직접 일단 혼자서 시작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할 것인지는 모른다.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임을 아는 망육(望六)의 나이이기에, 그저 때를 기다려 볼 것이다.

 

2024년 11월 26일(화)
ⓒ H.M. Han

반응형

TOP

Designed by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