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15] 작호법(作號法), 또는 호의 분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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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

[15] 작호법(作號法), 또는 호의 분류학

by I'mFreeman 2023. 10. 31.

내게 몇 분의 은사님이 계신다. 석박사학위과정부터 지금까지 나를 좋게 생각하시고 나 역시 존경하고, 특수교육(학)에 눈을 뜰 수 있도록 넓은 가르침을 주신 지도교수님은 심재(心齋)를 아호로 쓰신다. 행동심리학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주신 다른 교수님은 송담(松潭)이란 호를 쓰신다. 두 분의 아호 모두 같은 분, 은사님이 지어주신 것이다.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또 다른 교수님의 아호 평촌(坪村)은 자호한 것이다. 어린 시절 사셨던 고향 마을 이름이라 하셨다. 내게 서예를 가르쳐주신 선생은 장포(藏抱)로 자호하여 쓰신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자로 살아온 학자들은 정년에 즈음하여 기념문집이나 논총 같은 것을 후학들이 만든다. 문집이나 논총의 제호는 보통 "○(아호) ○(성명) 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과 같은 방식으로 한다. 제호만큼은 붓글씨로 써서 장식한다. 그리고 아호를 성명 앞에 둔다. 그 교수님의 스승처럼 그 분을 잘 알고 식견 있는 분이 아호(雅號)를 짓는다. 책 이름을 붓글씨로 적으니, 호 문화의 복원이 필요한 것이다. 아호를 쓰면  선학의 인품을 남들도 알 수 있고 책의 품격도 올라간다. 좀 더 멋스럽다.
 
    이 글은 앞에 올린 글, "이름과 작호법"에 이은 글이다. 이 글은 호 문화의 복원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마다 호를 짓는 방법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이름과 작호법"에서 인용한 이규보의 작호법이 지극히 간략하여 별 보탬이 되지 못할 것으로 여겨져 더 보태어본다. 이규보의 작호법을 바탕으로 하여 작호법의 이름을 다시 붙이고 예시한 글이 있어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신용호 교수의 글이다. 신 교수의 글을 내 나름대로 이해한 것으로 적고 예시도 달리 해본다.
 
    신 교수는 이규보가 말한 작호법에서 표현을 바꾼 작호법 셋에다 하나를 더 추가하여 작호법 넷을 제시했다. 이를 다시 하나하나 말한다. 취기소거이호지자(就其所居而號之者), 곧 거소 또는 거처하는 그 곳을 취하여 호를 삼는 것을 '소처이호'(所處以號)라고 이름했다. 인기소축이호지자(因其所蓄而好之者), 곧 소유물 또는 쌓은 그것에 인하여 호를 삼는 것을 '소축이호'(所蓄以號)라고 명명했다. 기소득지실이호지자(以其所得之實而號之者), 곧 소득의 실상, 또는 그 얻은 것의 열매로써 호를 삼는 것에 도달하고 싶은 경지까지 포괄하여 '소지이호'(所志以號)라는 이름을 붙였다. ㉱ 자신이 처한 처지로 호를 삼는 것을 추가하여 '소우이호'(所遇以號)라고 했다. 이규보가 언급했지만, 이규보도 신 교수도 작호법에 넣지 않은 그것도 호를 짓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이호대명자( 以號代名者), 곧 자신의 이름[名]으로써 호를 삼는 것이다. 이 방법을 신 교수의 표현을 빌린다면, '소명이호'(所名以號)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소처이호'(所處以號)란 처소를 호로 쓰는 것이다. 자신이 지난 날 살았던 곳, 지금 살고 있는 곳, 남다른 인연이 있는 처소, 곧 지명(地名)으로 호를 삼는 방법이다. ① 마을 이름, ② 산(山)이나 골짜기[谷] 이름, ③ 물[水]이름이나 물과 관련이 깊은 지명을 호로 삼는 것이다. 마을 이름으로 호를 지을 때 村(촌), 里(리), 洞(동), 州(주), 郊(교) 같은 한자를 썼다. 산과 골의 이름으로 호를 지을 때에는 山(산=뫼), 峰(봉=봉우리), 巖(암=바위), 岡(망=언덕), 岳(악=큰 산), 谷(곡=골[짜기]) 같은 한자가 써였다. 물과 관련하여 호를 지을 때에는 溪(계=시내), 海(해=바다), 江(강=큰 강), 湖(호=호수), 浦(포=물가), 洲(주=섬), 川(천=내), 潭(담=못) 등의 한자가 동원되었다.
 
    호를 짓는 방법 중에서 비교적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때문일까, 옛 어른들이 지은 호 중에서 이 방법으로 지은 호가 가장 많다고 한다. 이황의 퇴계(退)나 도산노인(老人)은 안동의 지명을 호로 삼은 것이다. 정도전의 삼봉(三)은 단양의 도담삼봉(島潭三峯)에서 딴 것이다. 이이의 율곡(栗)과 석담(石)은 본가가 있던 파주와 해주의 지명이다. 박지원의 연암(燕)은 홍국영을 피해 백동수가 마련해주어 살았던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서 딴 호다. 정약용의 다산(茶)은 19년간 귀향살이했던 곳, 강진의 다산을 자호한 것이다.
 
    '소축이호'(所蓄以號)는 자신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물(物)을 호로 삼는 것이다. 특별히 귀하게 여겨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호로 삼는다. 梅(매=매화[나무]), 松(송=소나무), 竹(죽=대[나무]), 柏(백=잣나무), 蓮(연=연), 瓜(과=오이), 池(지=연못) 같은 한자를 주로 사용했다. 이들 물(物)이 은밀히 감추고 있는 '상징'(simbol)이 작호자의 뜻과 합치되어 호로 삼은 것이니, 소축의 호이면서, 작호자의 뜻[소지(所志)]를 그 안에 담은 호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가 예거(例擧)한 도잠(도연명)의 오류선생(五先生)과 정훈의 칠송처사(七處士)는 각기 집 주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와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자호한 것이다. 구양수의 육일거사(六一居士)는 일만(一萬) 권의 장서, 일천 (一千)권의 집고록(集古錄 자신의 경전 주석서), 일장(一章)의 거문고, 일국(一局)의 바둑판, 일호(一壺)의 , 일(一) 늙은이[老翁 구양수 자신], 합해 여섯을 가졌다 하여 호로 삼았다. 오상순의 공초(空超)는 빔과 넘음을 말했으니, 작호자의 뜻[소지(所志]이 담긴 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담배 꽁초의 다른 표현 같기도 하다. 김시습의 매월당(梅月堂)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 호에는 선생, 처사, 거사와 같이 사람을 지칭하는 말을 덧붙인 것도 있고, 당(堂)과 같이 집을 덧붙인 것도 있다. 뒤에 당을 붙인 것은 거처하는 집의 이름, 곧 당호를 말하니, 소처로 호를 삼은 것이기도 하다.
 
    '소지이호'(所志以號)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호로 쓰는 것이다. 자신이 목표로 삼아 도달한 어떤 경지와 또는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나 목표나 의지 등으로 호를 짓는 방법이다. 옛사람들의 호 중에 이런 뜻을 담아 지은 호가 다수라고 한다. 이런 류의 호는 '수신'(修身)의 뜻으로 삼은 것이 가장 많고, '은둔'(隱遁)이나 '풍류'(風流)를 담은 것도 흔하며, '해학'(諧謔)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도 간혹 있다고 한다. 뜻이나 가치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 추상의 것이다. 그 추상의 것은 소축이 담고 있는 가치 같은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물(物)과 그것이 상징하는 뜻이나 가치는 각자 다르니 각자 다른 뜻을 담아 호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5만원권의 주인공이자 이이의 어머니 신씨의 호는 사임당(師任堂)이다.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스승으로 삼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규보의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는 백운(흰 구름)을 말했으니 소축의 호라고 할 수 있다. 거사를 붙였으니 소처의 호라고 할 수도 있다. 집에서 살며 오직 도(道)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소지의 호라고 할 수도 있다. 앞의 둘을 물리치고 맨 뒷 것으로 자신의 호를 삼은 것이다. 
 
    '소우이호'(所遇以號)는 자신의 처지를 호로 짓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이나 상황을 호로 삼는 방법이다. 귀인(貴人)이나 부자(富者)됨 또는 건강해짐 등과 같이 긍정의 처지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드물다. 이보다 늙음, 괴로움, 가난함, 병듦, 외로움, 허무함 등을 나타내는 호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隱(은=숨음), 遁/遯(둔=달아남), 翁(옹=늙은이), 叟(수=늙은이), 老(노=늙음), 夫(부=사내) 등의 글자 또는 居士/處士(거사/처사=벼슬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 散人(산인=이곳저곳 흩어져 사는 사람), 山人(산인=산에 사는 사람), 布衣(포의=벼슬없는 사람), 野人(야인=들에 사는 사람) 등의 말들이 사용된다.
 
    고려 후기 절의를 지킨 세 선비, 이색, 정몽주, 길재를 통칭하여 삼은(三隱)이라 한다. 각각 목은(), 포은(), 야은()이란 호를 썼다. 이숭인의 도은()도 있다. 그리고 출처(出妻)할 만한 정당한 사유없이 정실 아내를 내쫓아 벼슬길이 막혀버린 김숙자(김종직의 부친)의 호가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소명이호'(所名以號)란 자신의 이름[名]으로 호를 대신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名]에 쓰인 한자를 소리[音]는 같지만 뜻이 다른 한자로 바꾸어 호를 삼는 것이다. 동음이의자(同音異意字)를 호로 쓰는 것이다. 또, 이름에 쓰인 한자를 파자(破字)하여 호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방법으로 호를 지은 사람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본다. 이름[명]이 '賢珉(현민)이라면, 玄民(현민=어두운 백성, 유진오의 호이기도 하다)으로 호를 삼는 것이다. 또, 珉(민=옥돌)자를 파자하여 玉民(옥민=옥과 같이 귀한 백성) 또는 民玉(백성은 옥과 같이 귀하다)을 호로 삼을 수 있다. 호의 경우는 아니지만, 비슷한 실례도 있다. 박지원과 같이 북학파의 일원이었던 유득공(柳得恭)의 숙부 유련(柳璉)은 제 이름 璉(현=호련)자를 파자하여 連玉(연옥)을 자(字)로 삼았다. 이런 방식으로 호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주지(소처)를 옮기거나, 즐기던 물(物)(소축)이 다른 것으로 바뀌거나, 처한 상황(처지)이 달라지거나, 뜻하는 바가 더해지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그에 맞게 호를 새로 지어 쓰는 일이 흔히 있었다. 한 사람의 호가 둘 이상의 호를 갖거나, 심지어 수십 종의 호를 지어 쓰기도 했다. 추사(秋史) 김정희는 그 외에도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 500여 개의 호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한 사람이 여러 호를 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호를 쓰지 않은 사대부가 많지 않다 보니, 같은 호를 쓰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호에 쓰는 글자의 수는 보통 둘이지만, 글자의 수에 제한이 없다. 호를 하나만 짓고 쓴 것도 아니다. 때에 맞게 다른 호를 지을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호와 함께 집의 이름[당호(堂號)]도 호로 사용할 수 있다. 당호는 집 등을 나타내는 글자 한 자를 뒤에 붙여 쓴다. 齋(재=집), 堂(당=집), 菴(암=책력), 庵(암=암자), 軒(헌=추녀), 窩(와=움집), 樓(루=다락), 閣(각=누각), 室(실=집), 廬(로=오두막), 臺(대=돈대), 庄(장=농막), 館(관=집), 宇(우=집), 巢(소=새[鳥]집), 窓(창=창문), 門(문=문), 庭(정=뜰), 亭(정=정자), 院(원=집) 등이다. 사용 빈도의 수를 순서대로 배열하면, 齋(재), 堂(당), 菴(암), 庵(암), 軒(헌), 亭(정) 窩(와)이다.


    이 글에서 말한 작호법 또한 미진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위의 작호법과 예시를 참고하여 자기만의 이름, 아호를 지어보기를 소망한다.
 

2023년 10월 31일(화), 시월의 마지막 날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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