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이란 무엇인가
책(冊 book)이라고 하는 물(物)에 대한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다. 책(冊)이란 글[書/文]을 모아 묶어 놓은 것이다. 책이 있기 전에 글이 먼저 있는 것이다. 그 글이란 글쓴이의 생각을 적은 것이다. 글을 쓸 당시의 누군가에게 또는 후대의 누군가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기 위함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고대에는 짐승의 뼈[甲骨]나 돌 같은 것에 글을 새겨 썼다. 그 뒤에는 대나무 줄기, 곧 죽간(竹幹)에 새겨 썼다. 글을 새겨 쓴 죽간을 묶었다. 한자 冊(책)자의 모양이 이를 증명한다. 죽간을 종(從)으로 나타낸 것이다. 글은 죽간을 바닥에 놓고 새겼을 것이다. 죽간이 횡으로 놓인 한자 書[글/책]자의 모양이 이것을 나타낸다. 文(문)자는 본래 무늬의 뜻이었다. 글을 뜻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이면서, 무늬를 나타내는 글자를 새로 만들었다. 紋(문)자다. 실상 글자도 무늬다.
종이[紙]라는 물(物)이 '발명'되자 글이 종이에 쓰여졌다. 인쇄기가 나오기 전까지, 글은 필사(筆寫), 곧 붓이나 펜으로 쓰여져 책이 만들어졌다. 필사본(筆寫本)이다. 글쓴이가 직접 쓰기도 하지만, 보통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원고를 베껴 쓴 것이다. 당연히 몸값이 높았고 귀했다. 그리고 나무 널판지 조각에 글자를 새기기도 했다. 이렇게 판에 새기는 것을 서각(書刻)이라 한다. 활판(活版)을 종이에 찍어 책을 만들었다. 목판본(木版本)이다. 또, 나무를 깎아 글자 하나하나 만들기도 했다. 이 활자(活字)를 조판(造版)하여 책을 만들었다. 활자본(活字本)이다. 뒤에 금속이 나무 널판지를 대신했다. 인쇄술이 급격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목판본과 활자본은 대량 생산과 유통을 위한 것이었다. 책이 대중화된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필사본은 말할것도 없고, 목판본도 활자본도 고가였다.
옛 어른들은 책을 시렁에 두어 보관할 때 지금처럼 바로 세워 '꽂지' 않았다. '눕혀' 쌓아 보관했다. 소장한 책이 많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단단히 제책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잘 모른다. 종이에 만든 책은 종이가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 때문에,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축축해지고 좀이 쓸기도 한다. 그런 탓에 옛 어른들은 장마철이 지나고 날씨가 좋은 날에 책들을 햇볕에 말렸다.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는 곳, 예전 집현전이나 규장각 같은 곳은 책을 잘 보관하기 위해 온도나 습도 같은 것을 잘 맞추어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도서관, 특히 귀한 고서를 소장한 곳도 그럴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에어컨이 책 때문에 만든 것이라 한다.
책이라는 물(物) 한 권이 나올 때까지 수많은 일[事]들이 있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농사짓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수없이 많은 것과 같다. 실로 모든 것이 그렇다. 책이란 글 모음과 묶음이니, 먼저 글, 원고가 있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글을 짓는다는 것은 수많은 공력과 시간이 드는 고된 작업이다. 옛날에는 지은이[作者/著者]가 살아 있을 때보다 사후에, 후대에 지은이의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문집(文集)이 대표적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고(遺稿)를 모은다. 문중에서 간행 여부를 결정한다. 간행으로 결정되면, '편집'(editing)에 들어간다. 책에 실을 것과 뺄 것을 결정하고, 편차도 정해 '원고'를 만든다. 원고를 글씨솜씨가 있는 이로 하여금 베껴 적게 한다. 필사본이나 활자본과 달리, 목판본으로 만드는 책은 베껴 적은 글씨를 나무 널판지에 새겨야 한다. 필사본, 목판본, 활자본 모두 원고대로 되었는지를 살피고 잘못된 것은 바르게 고쳐야 한다. 교정(校正)이다. 때로 원고 자체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이것도 고쳐 바로잡는다. 교열(校閱)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 서(序 서문)와 발(跋 간행문), 지은이의 연보와 행장을 써서 앞뒤에 붙인다. 한 장의 종이에 두 장을 찍어내고 반을 접는다. 종이가 얇아 뒤의 것이 앞에, 앞의 것이 뒤에 비치기 때문이다. 이를 모으로 구멍을 뚫어 실로 묶는다. 인쇄(印刷)와 제책(製冊 제본)이다. '발간'(publishing)하여 주위 분들에게 나누어 보급한다. 소설처럼 인기 있는 책은 전문 상인들이 판매한다.
오늘날과 차이가 있는 것은 이렇다. 지은이 생존시에 책을 낸다. 원고, 곧 초고(草稿)를 출판사에 넘기고 교정과 교열을 한두 차례 하는 일 정도가 지은이의 몫이다. 원고는 자필로 적은 원고지보다 직접 입력한 파일을 넘기는 것이 보통이다. 출판사에서 컴퓨터로 편집한다. 책의 크기, 표지, 본문의 글꼴과 글씨 크기 등을 정하고 1차 교정과 교열까지 한다. 이것을 지은이에게 넘겨 교정과 교열을 하게 한다. 이런 일이 몇 차례 이어진다. 그 사이에 책 표지 등을 디자인한다. 그림이나 사진 같은 것으로 장식도 한다. 저작권(copyright), 저자(이름과 약력 등), 출판사(이름, 주소 등)와 발행인 등, 주제어, 분류(예: ISBN) 등을 판권 면에 표기한다. 요즘 판권 면은 맨 뒤에 두던 전과 달리 속표지 뒷면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모든 작업이 끝나면, 인쇄는 인쇄사로, 제책은 제책사로 넘긴다. 책이 출간되면,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하고, 서점에도 배포하여 판매한다. 이렇게 시중에 나온 책을 우리는 구입한다.
2. 글과 책에 관하여: 구서(九書)와 사치(四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중한 것으로 여겼다. 서양에서도 7자유과를 배우기에 앞서, 셈하기(arithmetic)와 함께 읽기(reading)와 쓰기(writing)부터 배우고 익혔다. 이를 '3Rs'라 했다. 그러니, 우리네 사람이든 서양 사람이든, 옛 사람이든 오늘날 사람이든, 글과 책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특정 책에 대한 글도 있고 책 일반에 대한 글도 있다.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는 그 책에 대한 평을 글로 짓는 사람이 있다. "서평"(書評 review)이다. 신문에 실리기도 하고 다른 책에 실리기도 한다. 옛 서책들에 대해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도록 그 책에 관한 중요 사항들을 간략히 해설한 글을 지금 사람들이 짓는다. 그 글을 "해제"(解題)라고 한다. 책의 제작 경위, 서지 사항, 주요 내용, 의의 등이 주로 포함된다. 이런 글들은 특정 책에 대한 글이다. 이런 "서평"이나 "해제"를 모아 책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또다른 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책의 수를 말할 때 우리는 "권"(卷)이라 한다. "책"(冊)도 그 하나다. 이를 구분해 써야 할 때가 있다. 이러한 구분을 알면 , 특히 고서에 대한 해제를 읽는데 도움이 된다. 같은 제목의 책이 여러 권일 때, "1책 ○권"이라 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연암 박지원의 문집 ≪연암집(燕巖集)≫ 해제를 보면, "17권 6책"이라 되어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제목이 다른 책이 여섯 있다는 말이고, 이 여섯에 속하는 책을 모두 합하면 17권이라는 뜻이다. 한 책의 책이 한 권 이상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뒤의 ≪명수지문≫(名數咫聞)이란 책은 12권이다. 이를 때는 "12권 1책"이라 하면 된다. 권수를 먼저 말하고 책수를 말한다. 한 권으로 된 책은 "1책 1권"이라 할 수 있지만, 그냥 "1권"이라 하는 것이다.
책이라는 물[書物] 그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스스로 "책 보는 어리석은 사람"[看書痴]이라 불렀던(<간서치전>에서) 이덕무가 말한 "구서"(九書)가 아닐까 싶다. 책 또는 글이란 물(物)에 대한 사(事)를 아홉 가지로 말했다. (책 사기[買書]와 팔기[賣書]는 말하지 않았다.) 독서(讀書), 간서(看書), 장서(藏書), 초서(抄書), 교서(校書), 평서(評書), 저서(著書), 차서(借書), 폭서(曝書)다. 읽기, 보기, 간직하기, 옮겨[베껴] 쓰기, 바로잡기, 평론(評論)하기, 짓기, 빌리기, 햇볕에 쬐기(바람에 쏘이기)다. 짧게 말했지만 폭넓게 한 말이다. 책에 대한 모든 것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깊은 뜻이 담겼다. 책을 읽고 배움을 얻었고, 시렁에 놓여 있는 책을 보면서 기쁨을 얻었다. 가난했기에 빌려야 했고, 베껴 적어야 했다. 그렇게 소장했고, 때때로 햇볕에 말려야 했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있어 잘못을 바로잡고, 그 가치를 평했다.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그만큼 책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벗 중에 이서구(李書九)가 있어 흥미롭다. 글자 두 자가 앞뒤로 바뀐 것이다.
"借書四癡"(차서사치)란 말이 있다. 책을 빌려주고 받음을 어리석다 하고 그 어리석음을 넷으로 나눴다. “책을 아껴 빌려주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의 첫째요[惜一癡(석일치)], 빌려주는 것이 어리석음의 둘째요[借二癡(차이치)], 빌려준 책을 되찾으려는 것이 어리석음의 셋째요[索三癡(색삼치)] , 빌린 책을 돌려주는 것이 어리석음의 넷째다[還四癡(환사치)].” 작자 미상의 ≪명수지문≫(名數咫聞)이란 책 제6권에 "借書四癡(차서사치)"란 제목의 글에 앞의 글이 실려 있고, 그 아래에는 주가 달려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찾았다. 어느 블로그(fusedtree님)에서 이 말의 유래가 당나라 이광문(李匡文)의 《자가집》(資暇集)에 있는 글이라 하고,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별집(別集) 제3권"을 다시 언급한 것을 볼 때, 직접 접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제 글 읽기와 글 짓기에 대해 알아보자.
3. 글과 책, 읽기와 짓기: 독법과 작법
독서(讀書)란 글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보기만 하는 것은 독서가 아니다. 책을 잘 읽는 방법이나 요령 같은 것을 우리는 독서법(讀書法)이라 한다. 독책(讀冊)이라고 하지도 않고, 독책법(讀冊法)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에 실려 있는 글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글을 짓는 것을 작문(作文)이라고 하고, 글을 잘 짓는 방법이나 요령을 작문법(作文法)이라 한다. 작책(作冊)이나 작책법(作冊法) 같은 말은 쓰지 않는다. 독서(讀書)와 작문(作文)이라 했다. 독서는 글[書]을 읽는 것이요, 작문은 글[文], 곧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다. '書'(서)는 글이면서 '책'이다. '文'(문)은 '무늬'면서 글[문장]일 뿐, 책이란 뜻은 없다.
글 읽기, 독서에도 나름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책을 읽을 것이다. 그렇기에 독서하는 좋은 방법 또한 여럿 있을 것이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방법은 전(前)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조동일 교수의 글에 있는 것이다. "따지면서 읽는 방법과 의의"라는 제목의 글이다. 서울대출판부 대학교양총서의 하나인 ≪독서·학문·문화≫(조동일, 1994)에 실려 있다. 이 책에서 조 교수는 독서의 방법을 둘로 나누어 그 이해득실을 논하고 독서법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 하나를 '빠지면서 읽기'라 하고 다른 하나를 '따지면서 읽기'라 했다. 자음 한 자 차이밖에 없지만, 그 뜻하는 바는 정반대라고 했다. 이 둘 중에서 어느 방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책을 읽고 얻는 것이 결정적으로 달라진다고 했다. 지은이의 '의도'에 따라 책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빠지면서 읽도록 쓴 책이 있는가 하면, 따지면서 읽어야 책 읽기의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책도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목적'에 따라 책에 빠질 수도 있고, 책에 실린 글의 내용을 따질 수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말했으니, 방법 둘에 대해 알아볼 수밖에 없다.
'빠지면서 읽기'는 글을 읽는 이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글쓴이가 이끌어가는 그대로 책을 읽는 것이다. 책 속에 들어가 그 책에서 말하는 바를 그냥 받아들이는 독서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을 때에는, 지은이는 크고 읽는이는 작다고 여긴다. 지은이는 모두 잘 알고 있고, 읽는 이는 아는 것이 없는 듯이 한다. 그러니 지은이를 우러러보며 존경할 따름이다. 신비로운 경험을 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저자의 지식에 감화되는 것이 독서의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지식에 자만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책을 계속 읽으면 지적 성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독서삼매(讀書三昧)의 경지를 칭송한다.
'따지면서 읽기'는 독서하는 이가 정신을 바짝 차려 글 내용의 진위(眞僞)나 시비(是非)를 가리며 읽는 방법이다. 글쓴이와 맞서며 논쟁을 벌이는 독서 방식이다. 이 방식의 독서는 읽는 이가 지은이와 같거나 때로 더 클 수도 있음을 전제한다. 글쓴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말에 의문을 품고, 다른 책과 비교하고,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 타당성을 검증하고, 반론도 제기한다. 독서를 통해 자기 생각을 개발하게 됨을 독서의 목표점으로 삼는다. 이른바 '비판적 독서'가 이런 방식이다.
뒤에 ≪이 땅에서 학문하기≫(조동일, 2000)에서 하나를 덧붙였다.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의 책을 읽다가 생각이 모자랐다 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했다. 최한기의 독서법을 '쓰면서 읽기'라 했다. 가장 바람직한 독서법이라 했다. 나는 '글쓰면서 읽기'라 하여 표현을 조금 바꾼다. 글자 둘이 앞과 다름에도,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이렇게 할 뿐이다. 이런 독서 방식을 다시 말하는 것은 요즈음 너나할것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는데 만족하지 않고 글쓰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가히, 작가의 시대다. 나 역시 조금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블로그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에 쓸 글감 하나를 고르고 아는 범위 내에서 글을 쓴다. 쓰다 보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생각날 때도 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책을 찾아봐야 한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글을 읽을 때도 있다. 그러고나서 다시 글을 쓴다.
이 셋의 독법(讀法)을 다시 내 나름대로 이름을 달리 붙여본다. '빠지면서 읽기'를 '익독'(溺讀), '따지면서 읽기'를 '판독'(判讀), '글쓰면서 읽기'를 '작독'(作讀)이라고 해본다. 이 셋이 독법의 세 방식이기도 하고 독법의 세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글을 쓰다보면, 이 셋이 모두 동원되어야 할 때도 있다. 책 속에 들어가 지은이와 대면해야 할 때도 없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도 있다. 또, 글을 쓰기 위해 남의 글을 읽으면, 자신의 입장이나 관점과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글읽기가 자연히 글쓰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 꼭 해야 할 것이 셋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첫째가 다독(多讀), 둘째가 다작(多作), 셋째가 다상량(多商量)이다. 이 셋은 송나라 문인 구양수(歐陽脩 육일거사[六一居士])가 글짓기 방법의 핵심으로 제시한 것이다. '삼다'(三多)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글을 잘 지으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많이 지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이 헤아려보고 많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남의 글 읽기, 나의 습작(習作), 나의 생각, 이 셋을 많이 그리고 모두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천권의 경전주석서를 남긴 분이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독(多獨)이라 함은 읽은 책의 많음과 함께, 같은 책의 반복 읽음도 포함될 것이다. 여러 책을 읽는 것과 책 하나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 모두 다독인 것이다. 어떤 책들을 골라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일까. 그 책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 것일까. 다시 글읽기로 돌아왔다.
다작(多作)에서는 무턱대고 연습을 많이 해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예공부할 때 시범이나 체본, 법첩과 같은 것이 있듯이, 습작할 때에도 무엇인가 모델이 필요할 것이다. 제 마음에 드는 남의 작품을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상량(多商量)이란 말에서는 헤아릴 것, 생각해볼 것, 그 대상이 무엇일까. 남의 글을 읽고 그 진정한 뜻을 헤아려보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또, 어떤 것이든 보거나 들을 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많은 것을 경험해야 생각의 폭도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지니, 이러저러한 경험이 많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격물(格物)과 관물(觀物)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을 안다는 것, 무늬를 안다는 것은 힘이다. 글을 지을 줄 안다는 것은 더 강한 힘이다. 칼[武]보다 강한 것이 펜[文]이다. 잘못 쓰면 그 힘이 글쓴이에게 되돌아온다. 글의 독법(讀法)과 작법(作法)에 왕도는 없다. 만병통치약과 같은 것도 없다. 부단히 읽고 쓰면서 스스로 깨우칠 밖에 다른 이치는 없다. 때로 빠져보기도 하고, 또 때로 따져보기도 하고, 또 지어보기도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익히고, 많이 헤아려 생각해보고,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 자기만의 독법과 작법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체화(體化)해야 한다. 그리하여 좋은 글을 짓자. 심금(心琴)을 울리는 좋은 글을 지어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자. 복(福)을 나누어 주자.
2023년 11월 2일(목)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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