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과학기술 그리고 천주교가 중국에 들어왔다. 뒤이어 조선에도 들어왔다. 서양 학문을 이르는 말이 필요했다. 중국에서는 양학(洋學)이라고 했다. 이 땅에서는 서학(西學)이라고 했다. 이제 다시, 서양 학문에 대응하는 우리 학문을 이르는 말이 필요했다. 조선의 유자(儒者)에게 학문이란 곧 성리학이었기에, 서양 학문에 대응하는 우리 학문을 이르는 말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동국(東國)이라 했음에도, 이 땅의 학문을 동학(東學)이라 하지 않고 국학(國學)이라 했다. 동양삼국의 학문을 동양학(東洋學)이라 했다. 근자에 와서 이렇게 부르고 있다.
서양인들이 서양에서 만든 술, 서양인들이 즐겨 마시던 술을 우리는 양주(洋酒)라고 한다. wine은 와인으로, beer는 맥주로 따로 부르니, 양주란 그 밖의 술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서양 술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 땅에서 자생(自生)한 술[酒]이 있었다. 서양의 술을 왜 양주라고 한 것일까. 서양의 술을 양주라고 한 것은 중국에서 서양 학문을 양학이라 부른데 기인한 것이리라. 서양 술을 이미 '양주'(洋酒)라고 했으니, 이 땅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의 온갖 술을 이르는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술을 '전통주'(傳統酒)라고 한다. 대대로 전해 내려온 술이란 뜻이다. 서양 술은 이 땅 밖에서 들어온 것이니, '외래주'(外來酒)라 함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서양 술을 '양주'라고 하고, 우리 술을 '전통주'라 하니,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 '양주'란 말에서는 '어디'를 말하고, '전통주'란 말에서는 '언제'를 말하기 때문이다. 양주는 장소, 곧 '곳'를 말하고, 전통주는 시간, 곧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술을 동주(東酒) 또는 국주(國酒)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양주를 일컫는 말에 liquor(리커)와 liqueur(리큐어), 둘이 있다. 철자가 비슷하니 이 둘을 혼동하기 쉽다. 또, 철자를 달리하니, 다른 술이란 뜻도 있겠다.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을 것 같다. 공통점/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을 것 같다. 이 둘은 어떤 공통점/유사점이 있는 것일까.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아무튼 그 공통점/유사점과 차이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찾아봐야겠다. 그리하여 이곳저곳을 찾아본다.
이 둘은 모두 액체(liquid)다. 마실 거리, 곧 음료(drink)다. 알코올을 함유한 음료(alcoholic drink), 곧 술이다. 둘 모두 칵테일이란 술을 주조(酒造)할 때 중요한 성분이다. 이 둘 모두 증류의 과정을 거친 증류주(distilled spirits)다. distilled(증류된)이란 말이 붙지 않아도, spirits라고만 해도 증류주를 뜻한다. 이 둘은 다른 것의 첨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즐길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이 둘의 공통점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술이다. 그렇기에, 말을 서로 바꿔 쓰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리큐어와 달리 리커는 달지 않다. 차이점의 하나다. 하지만 풍미(flavor)를 더한 리커도 많기에, 혼선을 가중시킨다.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하기 어렵다. 리커는 음료[술], 곧 칵테일의 바탕이 된다. 칵테일에서 리커는 바탕이 되는 술이다. 그래서 베이스(base)라고 한다. 기주(基酒)라고 한다. 이와 달리, 리큐어는 혼합음료(mixed drink)에 풍미를 주는 술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이 차이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는 이 둘을 구분하기에 미진하다.
리커(liquor)는 곡물이나 그 밖의 식물을 발효(fermentation)하여 만든 술을 다시 증류(distillation)하여 만든 알코올 도수가 높은(potent) 알코올 음료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의 뜻에 맞는 것은 몇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위스키, 브랜디, 진, 럼, 데킬라, 보드카, 이 여섯 유형의 증류주를 리커라고 한다. 증류란 발효한 뒤에 물을 알코올과 분리시키는 과정이다. 이렇게 증류의 과정을 거치면, 부피 기준 알코올 함량(ABV: alcohol by volume)이 20퍼센트 이상 올라간다. 위스키는 40-55퍼센트, 브랜디, 럼, 데킬라, 보드카는 일반적으로 40퍼센트, 진은 37.5-50퍼센트다. 술의 도수를 미국(1848년 경 수립함)과 영국은 'proof'(표준도수)라고 한다. ABV의 수를 곱하여 나타내기 때문에, 조금 더 단순한 체제다. ABS 20퍼센트를 proof으로 바꾸면 40이 되는 것이다.
리커는 칵테일뿐만 아니라 여러 혼합음료의 베이스가 된다. 또, 얼음을 넣은 잔에 부어 마시거나[온더락(on the rocks)] 그것만으로(neat) 마신다. 마티니(Martini), 맨하튼(Manhattan), 올드패션(Old-fashioned)이나 진 토닉(Gin and Tonic), 스카치 온 더 락(Scotch on the Rocks), 럼 앤드 코크(Rum and Cock), 세븐 앤드 세븐(Seven and Seven) 같은 것들이 있다.
증류를 하는 과정에서 보통 설탕을 사용하지만, 리커는 설탕의 단 맛이 나지 않는다. 오늘날 감률류나 시나몬 같은 향신료로 풍미를 더한 리커가 여럿 있지만, 이것 역시 단 맛이 없다. 이런 리커를 "flavored liquor"(풍미를 더한 리커)라고 한다. 이런 향신료는 증류를 한 뒤에 첨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식초(vinegar)와 오일을 붓는 방식과 같다. 이 규칙의 한 가지 예외가 위스키다. 위스키는 엄격한 규정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향신료나 감미료 등 어떤 첨가물이라도 위스키에 첨가하면, 그 위스키는 리큐어로 분류한다는 것이. 체리 버번(cherry bourbon), 사과 위스키(apple whiskey) 등의 라벨에 "위스키 리큐어"라고 적는 까닭이다.
리큐어(liqueur)는 리커와 마찬가지로 증류주이기에 기술적으로 말한다면 이 역시 리커다. 위스키, 브랜디, 럼 등의 리커에 다양한 향신료, 오일, 추출물 등으로 단 맛을 가미한 증류주를 리큐어라고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차이점이다. 향주(香酒)라고 할 수 있겠다. 리큐어는 첨가물을 첨가하기 때문에, 알코올 함량이 리커보다 일반적으로 더 적다. 이것도 늘 그렇지 않다. 부피 기준 알코올 함량(ABS)이 낮게는 15퍼센트부터 높게는 55퍼센트까지 있다. 도수가 리커와 리큐어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전에 리큐어는 "cordials"(강장제)로 부렸다. 많은 리큐어는 역사가 있다. 리큐어 속의 역사는 수세기 전까지 내려가는 것도 많다. 리큐어가 약으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베네딕틴(Benedictine)이나 샤르트뢰(Chartreuse) 같이 오늘날 대중화되어 널리 알려진 허브 리큐어는 본래 각종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약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대개 연금술(alchemy), 오늘날로 말하면 화학을 전문적으로 익힌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만들었던 것이다. 약품에서 시작되어 주류가 되었으니, 약주(藥酒)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리큐어에 담긴 역사(history in liqueur) 또는 역사적 리큐어(historical liqueur)를 통해 서양사를 공부할 수도 있겠다.
오늘날 리큐어는 다종다양한 창발적이고 '신화적'인 칵테일에 사용되고 있다. 대개 음료를 아주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성분이다. 또, 리큐어 그대로 즐길 수도 있고, 차게 냉장한 것을 즐길 수도 있고, 얼음과 함께 즐길 수도 있다. 향신료 또한 커피로부터 아몬드, 오렌지까지 다양하다. 크림 리큐어도 있고, 크레메(creme) 리큐어도 있다.
양주는 리커와 리큐어가 있다. 그 사이에 "풍미를 가미한 리커"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았다. 서양에서 우리의 전통주 막걸리나 소주처럼 즐겼던 양주가 이 땅에 들어와 고급 술처럼 되었다. 경제적 여력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되었다. 오늘 하루 맥주나 소주 대신에, 입맛에 맞는 양주 하나 골라 구입해보면 어떨까. 칵테일로 마시든, 원액으로 마시든,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해서 마시든, 얼음을 넣어 마시든, 한 번쯤 마셔보면 어떻까. 한 잔이든, 반 잔이든, 조금이든 그 맛을 음미해 보면 어떨까. 우리 술맛과 비교하며 여유롭게 마셔보면 더 좋을 것이다. 그 술에 얽힌 이런저런 사연까지 익혀 알고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금상첨화라 할 수 있겠다.
2023년 10월 29일(일)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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