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12] 이름[名], 그리고 작호(作號)
본문 바로가기
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

[12] 이름[名], 그리고 작호(作號)

by I'mFreeman 2023. 10. 27.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남들과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남들과 관계함이란 곧 소통이다. 남들과의 소통에서 그를 부르거나 또 다른 남을 가리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나, 너, 그와 같은 말로 부르거나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소통을 정확히 하려면, 그 대상을 특정해야 한다. 부르는 말[號稱], 가리키는 말[指稱]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름을 짓는다. 우리는 '이름'으로써 그를 부르고 가리키는 것이다.
 

1. 이름, 동서(東西)의 차이

 
사람의 '이름', 이것을 '이름'에 있어 동(東)과 서(西) 간에 몇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지금 곰곰 생각해 보니, 서너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차이점 하나는 이렇다. 우리에게 이름이란 성(姓)을 제외한 명(名)을 말한다. 우리에게 성과 명의 구분은 명확하다. 그런가 하면, 누가 이름을 물어볼 때, 우리는 대개 성과 명을 모두 말한다. 인명록(人名錄)이라 하고 성과 명을 모두 기록하기도 한다. 이름이란 말이 넓은 뜻으로 쓰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인명록에서 명(名)이란 성명의 축약일 것이다. 예외적으로 그렇게 쓴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이름(name)이란 성(姓)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첫 번째(first), 가운데(middle), 마지막(last) 이름(name)과 같이 차례대로 나열하여 서로 구분할 뿐이다. 사람의 이름에 한해, 영어 name을 이름[名]으로 옮길 수 없는 까닭이다. 첫 번째 이름(first name)이 우리의 명에, 마지막 이름(last name/surname)이 우리의 성에 해당한다. 이름이 제아무리 길어도 맨 앞의 것이 명(名)이고, 맨 뒤의 것이 성(姓)이다. 성명의 순서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성+명"으로, 서양은 "명+성"으로 하는 것이다. 주소를 적을 때도 앞뒤 순서가 다르다. 서양은 "here and now"를 말하고, 우리는 "때와 장소"를 말한다. 그런 만큼 동서 간에는 인식의 차이가 엄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다. 우리의 성(姓)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결정된다. 우리네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의 성으로 평생을 산다. 본인의 선택에 따라 성을 바꿀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일 뿐이다.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그만큼 혈통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는, 특히 여성이 결혼을 하면 자신의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꾼다. 아니면 자기 성 뒤에 하이픈(-)을 넣고 그 뒤에 남편의 성을 덧붙인다. 우리도 근자에는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 성 뒤에 어머니 성을 덧붙이기도 한다. 서양의 관행을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또, 양성평등의 시대, 페미니즘의 영향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하더라도, 본래의 성은 바뀌지 않는다. 어머니 성이 앞에 더해진 명일 뿐이다.
 
    또 이런 점도 있다. 우리는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명(名)에 있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 예전에는 형제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항렬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 성은 아버지와 형제자매와 공유하는 것이고, 항렬자로 쓰인 한 글자는 형제와 공유하는 것이었다. 남은 한 글자의 이름이 본인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나 선생님을 부르거나 가리킬 때, 이름자를 말하거나 쓰는 것을 꺼리고 피했다. 결례라고 여겼다. 함부로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누가 어머니 이름을 물으면, "○자○자 쓰신다"라고 했다. 피휘(避諱)하던 옛 관습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다.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쓰되, 이름 하나를 덧붙이거나 Jr.(주니어) 같은 말을 성 뒤에 달았다. 그리고 아버지 이름을 말함에 주저함이 없다. 부모에게 말할 때, 선생님에게 말할 때, 부모와 선생님의 실명(예: Thomas) 그대로 불렀다. 실명의 애칭(예: Tom)으로 불렀다.
 

2. 이름, 고금(古今)의 차이

 
먼저 밝혀 둘 것이 있다. '이름'이란 말은 성 뒤에 있는 그 이름[名], 곧 실명(實名)과 그 실명을 대신하는 여러 이름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말하는 이름[名]과 그 밖의 다른 이름을 함께 쓰면 혼선이 생길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옛 사람과 오늘날 사람이 자신이나 남을 부르거나[호칭] 가리킬[지칭] 때 공히 썼던/쓰는 '이름'은 '명'(名)밖에 없다. 옛 사람들에게는 명(名), 휘(諱), 자(字), 호(號) 등 이칭(異稱)이 여럿 있었다. '이름'이 여럿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지으신 실제 '이름', 곧 명(名)도 여럿이었다. 초명, 아명, 관명 등이다. 초명(初名)은 말 그대로 '처음' 지은 이름이다. 아명(兒名)은 성인이 되기 전 '아이 때' 지어 부른 이름이다. 같은 뜻의 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과 아이 때를 말했으니, 뒤에 이름을 고쳤다[改名]다는 뜻이 된다. 관명(冠名)은 성인이 되어 관례를 치를 때 '새로' 지은 이름, 곧 자(字)를 말한다. 여자들은 약혼할 때 자를 지었다. 또다른 관명(官名)은 관직 이름이다.
 
    휘(諱)란 본시 천자의 명(名)을 이르는 말이었다. 제왕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제왕이 아닌 사람의 명(名)은 휘라고 하지 못했다. 고인(故人)이 된 뒤라야 명(名) 대신에 "휘"(諱)라고 할 수 있었다. 죽은 사람에게만 허용된 것이다. 그리하여 고인이 된 조상의 명(名)을 말할 때, "휘 ○자○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명과 휘는 실명(實名), 곧 진짜 이름(true name)이다. 아이들 이름[名]을 지을 때, 제왕의 휘에 있는 글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조상의 휘에 있는 글자까지 피해야 했다. 이미 쓰고 있던 이름까지 바꾸어야 할 때도 많았다. 글자만이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까지 쓸 수 없었다. 이것을 피휘(避諱)라고 한다. "휘"(諱)"는 "꺼리다"가 본뜻이다. 꺼려지니[諱] 피하는[避] 것이다. 예전에는 이름[名]을 소중하게 여겼다. 함부로 입밖에 내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피휘하던 관습이 명에도 적용되어 명을 부르기 어렵게 되자 대안이 필요했다. 다른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관례 때 지은 '자'(字)가 명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제 자로 서로 부르고 가리켰다. 또 다시, 자(字)를 피하는 관습이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자(字)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또 다시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또 다른 그 이름이 호(號)라는 이름이다. 이것이 호(號)라는 이름을 짓고 쓰게 된 까닭이다. 이런 관행은 물론 제왕이나 사대부 양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날 제왕도 없고 성인군자도 없다. 신분이나 계급이 없어졌다. 평등한 사회가 된 것이다. 누구나 '자'(字)를 짓고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호'(號)를 지어 서로 부르거나 가리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자'도 사라지고, '호'도 없어졌다. 관례를 전통방식으로 치르지 않고, 성인식이란 이름으로 저희들끼리 행사하는 정도로 대체되었다. 이러하니 지금은  '자'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결국 '자'(字)가 사라지고 없어졌다.
 
    '호'는 학자나 문학가 또는 예술인이나 정치인 등 지식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었다. 일부 사람들이 쓰는 호(號), 그리고 별명(別名), 필명(筆名), 예명(藝名) 같은 이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또, 가명(假名), 익명(匿名), 차명(借名) 같은 말들이 쓰여지고 있다. 실명이 아닌 '이름'을 쓰고, 실명을 숨기고, 실명을 빌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이름들[名]은 실명을 대신하기 위함이요, 가리기 위함이요, 숨기기 위함이다. 하여 이런 '이름들'을 '호'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남은 '이름'은 성(姓) 뒤에 한두 자 붙어 있는 명(名), 곧 실명(實名) 밖에 없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호'는 버려진 '이름'이 되었다. '자'와 '호'의 소멸은 좀 곤란한 상황을 초래했다. 남에게, 특히 연장자나 노인에게 말을 걸 때, 호칭하는 말부터 먼저 하는 것이 우리의 예법에 맞는 것이라 배우지 않았는가. 이 '호칭의 말'로 남은 것이 '이름'[名]밖에 없기에, 말걸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연장자나 노인을 '명'으로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사람의 성(姓)으로 "씨(氏)"(높임말)라고 하거나(성과 씨는 본래 다른 것임), "가(哥)"(낮춤말)라고 부르거나 가리킬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행스럽게 관직이 있으면 관명(官名)을 쓰면 될 것이다. 학위가 있으면 그렇게 부르면 될 것이다. 기업 등에서 고위직에 있다 은퇴한 사람이면 전직(前職)으로 호칭하고 지칭하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직위도, 학위도, 사회적 지위도 없는 분들, 평범하지만 다수인 그 분들을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가리킬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또, 친구처럼 나이가 같거나 엇비슷하여 실명으로 불렀던 사람이라도, 나이가 중년 이상이 된 때까지 마냥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단 둘만 있을 때라면 모를까, 마땅하지 않을 수 있다. 때에 따라 무례한 행동이 될 수 있다.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아이들이나 젊은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이름'으로 호칭하거나 지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꺼려지고 피하고 싶을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그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 이 또한 문제가 된다. 
 
     조금 배운 사람들끼리는 모두 "선생님"이라 부른다. 병원에 가면 모두 "환자분"이라 부른다. 이것도 아니면, 덮어놓고 "사장님"이라 부른다.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민망하다. 때로 불편하다. 거북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쓰라고 짓는 것이 '호'(號)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전에 호를 짓고 부르는 것이 특권층만의 것이었기에, 그저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리고 오늘날 호칭/지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복원과 계승이 필요한 좋은 전통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처음으로 호 짓는 방법을 글로 적었다는 이의 작호법(作號法)을 소개한다.
 

3. 작호법(作號法)

 
이 글에서 작호하는 방법에 대한 짧은 글만 발췌하여 살펴본다. 한글역문을 먼저 제시하여 중심으로 삼는다. 원문을 뒤에 둔 것은 참고하기 위함이다. 모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가져왔다. 조금 고쳤다.
 

이씨 늙은이[李叟]이름[名]을 숨기고자이름을 대신할 만한 것을 생각해 보았다.
옛 사람은 이름을 호로 대신 이가 많았다.
거소로 호를 한 이도 있고,
소유물로 호를 한 이도 있고,
소득의 실상으로 호를 한 이도 있었다.
李叟欲晦名(이수욕회명) 。思有以代其名者曰(사유이대기명자왈) 。古之人以號代名者多矣(고지인이호대명자다의) 。有就其所居而號之者(유취기소거이호지자) 。有因其所蓄(유인기소축)。或以其所得之實而號之者(혹이기소득지실이호지자) 。

 
    이수(李叟)에서 李(이)는 오얏나무, 성(姓)이다. 叟(수)는 늙은이다. 이 글을 지은이를 말한다. 성이 "이씨"인 사람이 "늙그막에" 호를 짓기로 한 것이다. 호를 짓는 목적은 자기 '이름'을 숨기기 위함이라 했다. 숨기려면 '명'을 대신할 만한 것이 필요하다 했다. 그것을 '호'라 했다. 호의 '쓰임새'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호' 지은 옛 사람들이 어떤 것으로 호를 삼았는지 알아본 모양이다. 그렇게 검토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호로 삼았다고 했다. 이것이 방법의 하나다. 그런 다음에, 세 가지 방법이 있음을 다른 문장 하나에서 모두 말했다.
 
    앞에서 든 방법 하나를 합하면, 일단 '작호법 넷'으로 요약된다. ㉮ 이름으로써[以號代名], ㉯ 거처하는 그 곳을 취하는 것[就其所居], ㉰ 쌓은 그것에 인하여[因其所蓄], ㉱ 그 얻은 것의 열매로써[以其所得之實] 짓는 것. 그 다음 글에서 각각의 방법별로 호를 지은 사람을 각각 4명, 3명, 2명씩 예시하였다(좀 더 조사해야겠다). 그런데 "이름으로 호를 삼은" 옛 사람이 '많았다' 하고서는, 그 사람은 예로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람이 너무 많았던 걸까. 그래서 예시하기 어려웠을까.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방법이었을까. 그렇다. 이름으로써 호를 삼는다면(이름의 한자를 바꾸는 방법), 당초 목적했던 '숨김'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소, 곧 거처하는 그 곳을 취하는 것[就其所居]: 4명[왕적(王績), 두자미(杜子美), 하지장(賀知章), 백낙천(白樂天)]

... 왕적(王績)동고자(東皐子), 두자미(杜子美)초당선생(草堂先生), 하지장(賀知章)사명광객(四明狂客), 백낙천(白樂天)향산거사(香山居士)거소로 호를 한 것이다. [若王績之東皐子(약왕적지동고자) 。杜子美之草堂先生(두자미지초당선생) 。賀知章之四明狂客(하지장지사명광객) 。白樂天之香山居士(백악천지향산거사) 。是則就其所居而號之也(시즉취기소거이호지야) 。]

 
왕적(王績, 589?-644)은 수말당초 사람이다. 자는 무공(無功), 호가 동고자(東皐子)다.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 땅으로 돌아와 동고산(東皋山)에 은거하여 농사짓고 살았다. 술을 좋아했고, 금(琴)을 잘 탔다. 두자미(杜子美)는 그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1-770)다. 자미(子美)는 그의 자, 호에 소릉야로(少陵野老)라는 호도 있다. 시성(詩聖)이라 불린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759년 성도(成都)에 정착하고 이곳에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하지장(賀知章 659-744)은 오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 소흥(紹興)으로 돌아가 살았다. 백낙천(白樂天)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다. 낙천(樂天)은 그의 자, 호에 취음선생(醉吟先生)도 있다. 나이 71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소유물, 곧 쌓은 그것에 인하여[因其所蓄]: 3명[도잠(陶潛), 정훈(鄭熏), 구양자(歐陽子)]

도잠(陶潛)오류선생(五柳先生), 정훈(鄭熏)칠송처사(七松處士), 구양자(歐陽子)육일거사(六一居士)소유물로 호를 한 것이다. [其或陶潛之五柳先生(기혹도잠지오류선생) 。鄭熏之七松處士(정훈지칠송처사) 。歐陽子之六一居士(구양자지육일거사) 。皆因其所蓄也(개인기소축야) 。]

 
도잠(陶潛)은 전원시인(田園詩人) 도연명(陶淵明, 365-427)이다. 도잠(陶潛)은 명, 호는 연명(淵明)이다. 동진 후기에서 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다. <귀거래사>로 유명하다. 정훈(鄭熏)은 자가 자포(子溥)요. 말년에 거처하던 곳의 이름을 은암(隱巖)이라 하고 그 뜰에 작은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심고 '칠송처사'(七松處士)라 자호하였다. 후세에 그 집을 '칠송가'(七松家), 곧 소나무 일곱 그루가 있는 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구양자(歐陽子)는 송나라 문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높여 칭한 것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등이 있다.
 

소득의 실상, 곧 그 얻은 것의 열매로써[以其所得之實]: 2명[장지화(張志和), 원결(元結)

장지화(張志和)현진자(玄眞子), 원결(元結)만랑수(漫浪叟)소득의 실상으로 호를 한 것이다. [張志和之玄眞子(장지화지현진자) 。元結之漫浪叟(원결지만랑수) 。則所得之實也(즉소득지실야) 。

 
    장지화(張志和)는 당나라 때 시인이자 화가요 은사(隱士)였던 장구령(張龜齡)이다. 자는 자동(子同), 지화(志和)는 당 숙종(肅宗)이 내린 사명(賜名)이다. 도교에 대한 저서 ≪현진자≫(玄眞子)를 남겼다. 원결(元結 719-772)은 하남성 노산(魯山) 사람으로 중당(中唐) 시인이다. 자는 차산(次山), 호는 만수(漫叟)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모두 9명의 문인을 예시했다. 9라는 숫자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의 지은이는 고려의 문신 이규보(李奎報)다. 뒤에서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로 자호했다. 지은이까지 포함하면 10명이 된다. 4, 3, 2, 1=10!
 
   오늘날과 같이 한글전용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호를 꼭 한자로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글로도 멋진 이름을 지을 수 있지 않은가. 나를 잘 아는 지기(知己)가 있어 나의 호(號)를 지어 주면[賜號] 주면 참으로 좋으련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위의 방법을 참고하여 이참에 호 하나 지어보면 어떨까.
 

2023년 10월 26일(목)
ⓒ H.M. Han

반응형

TOP

Designed by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