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과목을 가르치신 여러 선생님 중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그 선생님, 홍조띤 얼굴에 달짝한(?) 향을 풍기며 교실에 들어오셨다. 학교 아래 가까운 주점에서 막걸리 한두 잔을 드신 것이다. 요즘과 달리, 이것을 어느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수업 때마다 늘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나는 한문학의 대가인 거라." 칠판에 두 손을 벌려 칠판에 두고 비스듬히 서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셨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인의 이름[名]을 말할 때면 꼭 그 분들의 아호(雅號)도 일러주셨다. 그 뜻도 풀이해주셨다. 이름마다 아호를 적은 유인물을 나눠주시기도 했다. 최남선의 호가 육당(六堂), 이광수의 호가 춘원(春園), 오상순의 호가 공초(空超), 유진오의 호가 현민(玄民), 김시습의 호가 매월당(梅月堂), 한용운의 호가 만해(卍海)...라는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뜻이 멋들어져서 나도 호를 짓고 싶었다. 멋진 호를 말이다. 옥편을 뒤적이며 지어 보기도 했다.
2005년 무렵, 이런저런 인연으로 도언과 함께 동사무소 자치센터에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분은 박재교(朴載敎) 선생이었다. 이 분의 호는 장포(藏抱)다. 시골집 인근에 있는 보장산에서 감출 '장'(藏)자를 취하고, 그 시골집이 있는 포천에서 '포'(抱)자를 취하여 자호(自號)했다고 하셨다. 부르기에도 좋고, 뜻도 좋다. 그 해가 끝나갈 무렵에 수강생 작품전시회가 있다고 했다. 배운지 얼마되지도 않은 도언과 나도 출품해야 했다. 어슬픈 작품이지만 낙관을 해야 한다. 서예작품은 낙관인도 필요하다. 성명인 뒤에 아호인을 찍어야 한다. 도언은 서각(書刻) 선생이 지어준 호가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선생께 호를 받을 만큼 배움의 기간도 길지 않았다. 막역한 사이가 아니라 생각하여 부탁드리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자호해야 했다. 호의 작법도 몰랐고, 장고(長考)할 만큼의 시간도 없었다. 곡산(谷山), 곧 나의 본관을 아호로 삼았다. 골[谷]과 뫼[山], 괜찮아 보였다. 골은 산과 산 사이에 깊이 패인 곳이다.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계곡(溪谷)이라고 하는 것처럼, 산에 있는 '물'[水]은 골로 흘러 내려온다. 산은 인물을, 물은 재물을 뜻한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도 있다. 곡산이란 지명도 그렇게 붙여진 것이리라. 옛말에 곡산 땅에 갔다 오는 사람은 두 번 운다고 했다. 높고 험한 산을 넘어야 했기에 울며 들어가고, 나올 때는 후덕한 인심 때문에 울며 나온다고 했다.
뒤에 선생이 출강하는 포천문화원 문화교실 서예반에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전각(篆刻)도 배웠다. 뒤에 자치센터 서예반이 폐설되어 포천문화원에서만 배웠다. 전각을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고 서울에나 가야 배울 수 있었다. 수강료가 상당했다. 그런데 이 곳 포천에서 저렴한 수강료로 선생께 배울 수 있으니, 소중하고 값진 배움의 기회였다. 낙관인의 크기는 작품의 크기에 알맞게 해야 하는 바, 이제 나도 그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배우면서, 수강생 작품전시회 때도 출품하고, 반월문화제, 포천문화원 전국휘호대회에 출품했다. 그때마다 아호인을 곡산으로 새겼다. 그러던 어느 날 기발한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무무"(無無)! 여기에 당호(堂號)에 흔히 쓰는 집 "재"(齋)자를 붙여 우리 집의 당호 겸 나의 아호로 삼기로 했던 것이다.
아호(我號) 무무재(無無齎) 호설(號說)
마음 속에 품었던 호의 풀이를 글로 적는다. "무"(無)자는 본래 춤을 추다의 뜻이었기에, 춤출 "무"(舞)자와 뜻이 같다. 뒤에, 춤을 출 때에는 남녀 또는 노소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없다"의 뜻이 파생되었다. 가차(假借)자다. 춤을 춘다는 것은 기쁜 일이나 즐거운 일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한자 "무"자 둘을 잇대어 붙인 "무무"(無無)란 말에 내가 담은 뜻은 셋이다. "없고도 없다"는 것이 그 하나요,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이 그 하나요, "(있다) 없다 하는 것조차 없다"는 것이 그 하나다. (마지막의 것은 내가 소화해낼 수 없는 심오한 철학 같은 것이다. 내가 취할 수 없는 것이다.)
[1] "없고도 없다"는 것은 있음이나 가짐의 없음이다. 있을 것, 있어야 할 것, 가져야 할 것, 이 모든 것이 온전히,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소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존재'함이다. "없고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 살던 그때, 그 어린 시절에 내가 처한 실존적 상태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용기도, 평온함도 없었다. 온갖 시련과 고난, 그리고 가난만 '있음'이었다.
[2]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은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의 온전한 있음이다. 가질 것, 가져야 할 것, 갖고싶은 것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집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돈도 조금 있다. 지위나 명예는 버리고 자유로움이 있다. 무엇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다. 마음의 상처도 있고, 심지어 병듦도 있고, 통증까지도 있다. 지금 나와 우리 가족의 상황이다.
[1]과 [2]는 각각 지난날의 없음과 오늘날의 있음을 나타낸다. 이 둘을 연결하면,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뀐 나의 삶이 있다. 어린 시절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생을 다하는 그 날까지, 나의 삶을 집약한 것이다. "'없고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서 겪은 수없는 시련과 고난 끝에 '없는 것이 없는' 집"을 만든 것이다.
대학 은사님 한 분에게 말씀드렸더니, 뜻이 아주 좋다 하셨다. 뒤의 것이. 또 장포 선생께 말씀드리며, 앞의 무를 없을 '무'(无)로 하는 것은 어떨지 물어보았다. 말/없을 '무'(毋)자도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결심이 서면 아호인도 새길 것이다. 아무튼 뜻은 변함이 없다. "더없이 없는 집"에서 "없는 것이 없는 집", 곧 "무무재"로 변신했다 것!
2023년 10월 23일(월)
ⓒ H.M. Han
'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만추 풍경 (1) | 2023.10.27 |
---|---|
[10] 설익은 개혁의 위험성 (2) | 2023.10.25 |
[8] 칵테일과의 만남 (10) | 2023.10.23 |
[7] 삼락(三樂): 조선 유학자 (1) | 2023.10.23 |
[6] 삼락(三樂): 공맹(孔孟) (1) | 2023.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