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어른 할것없이 종이책을 읽지 않는 시대, 전자책(e-book)으로 책을 읽는 시대다. 세상 소식도 종이신문 대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전자신문을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하는 시대다. 이리 된지도 오래다. 지금은 나도 이런 시대적 흐름에 굴복하여 대세를 따라가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정보와 지식을 종이신문과 종이책을 통해 얻었다. 신문과 잡지를 구독했고 책을 구입해서 읽고 모았다. 신문은 조선일보를 가장 오랫동안 구독했다. 일종의 역행(逆行)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순전히 한 분의 칼럼을 읽기 위해서였다. '한 주'에 '한 편'의 글을 읽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한 분은 한양대 정민 교수다. 널리 읽힌 ≪미쳐야 미친다≫의 저자다. 그 칼럼은 정민 교수의 고정 칼럼 "세설신어"(世說新語)다. 외직으로 나간 다산 정약용 선생, 어렵게 퇴계 이황의 반쪽 짜리 책을 하나 얻어 하루 하나씩 아껴 읽었다고 한다. 아침에 글을 읽고 정무가 끝난 저녁에 자기 의견을 덧붙여 <도산사숙록>을 저술했다고 한다. 나도 그 짧은 글을 귀히 여기고 아껴 읽고 다독(多讀)했다. 한문으로 쓰인 옛 글을 참으로 유려하게 번역하고 자기 말로 해설한 그 뜻깊은 글이 심히 좋아 그를 사숙(私淑)했다. 그 글들을 스크랩하고 제책해 두었다.
1. 날다람쥐의 재주 다섯
그가 쓴 글 중에 <오서오능>(鼯鼠五能)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오서(鼯鼠)는 날다람쥐다. 달다람쥐의 능력/재주 다섯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 "날다람쥐는 다섯 가지 재주가 있어도 기술을 이루지는 못한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공영달(孔穎達)의 풀이를 덧붙였다. 날다람쥐의 다섯 가지 재주란 '날' 줄 아는 것, 나무를 '올라갈' 줄 아는 것, '헤엄칠' 줄 아는 것, 굴을 '팔' 줄 아는 것, '달릴' 줄 아는 것이다. 날다람쥐의 기술을 이루지 못함이란 각각 지붕을 넘지 못함, 나무를 타넘지 못함, 골짜기를 건너지 못함, 제 몸을 감추지 못함, 사람을 앞지르지 못함이다. 누고(螻蛄), 곧 땅강아지도 날다람쥐의 다섯 재주를 갖추었고, 제법 할 줄 알지만, 날다람쥐처럼 이 다섯 재주 모두 변변치 않다고 했다.
이런저런 것을 할 줄은 알아도 똑부러지게, 제대로 할 줄 아는 재주가 없는 미숙성의 상태를 가리킬 때, 오서오능(鼯鼠五能), 누고재(螻蛄才), 팔방미인(八方美人) 같은 말을 쓴다고 했다. 이 글에서 나는 날다람쥐와 땅강아지의 능력/재주 다섯, 곧 날기(flying), 오르기(climbing), 헤엄치기(swimming), 땅파기(digging), 달리기(running)의 어슬픔에 주목했다. 실상 놀라움이었다. 이것에 관한 나의 또 다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기 전의 경험이다.
2. 동물학교의 교육과정
내가 30여 년을 살았던 곳, 어머니를 뵙기 위해 자주 내려갔던 곳, 대구에 내려갔던 날이다. 모교인 대구대 BK21 특수교육 교육·연구단에서 개최한 "제1회 창파학술제"에 토론자가 되어 하루 일찍 대구에 내려갔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때도 나의 은사님, 심재(心齋) 김정권(金正權)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자주 가곤 했던 프린스호텔 커피숍에서 보자고 하셨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해질 무렵이 되었을 때, 교수님께 불쑥 말씀드렸다. "교수님, 오늘 하루 저를 재워주세요." 교수님께서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그리하세."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교수님을 아버지와 같이 생각했고, 교수님 또한 여느 학생들과 달리 내게 각별한 마음을 베풀어주신 것을 잘 알고 있어서다. 실상 교수님은 네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요, 여느 교수님들과 확연히 다른 분이시다.
교수님께서 내가 잘 방을 정해주셨다. 그리고 서재에 가자고 하셨다. 컴퓨터를 켜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스탠포드대학(Stanford University) 졸업식에서 한 연설문(영문과 한글번역문)을 출력해주셨다. 그리고 ≪Animal School≫(동물학교)이란 제목의 그림책을 손수 파워포인트로 만든 파일(영문판과 한글번역판)을 CD-ROM에 구워 주셨다. 이 둘의 요지도 말씀해주셨다. 또, 댁에 있던 책들 중에서 갖고 싶은 것 하나를 고르라고 하셨다. 갖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내일 아침까지 말미를 달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Yes, I Can≫이란 프로그램서를 고르니, 네게 필요할 것 같다, 잘 골랐다고 말씀하셨다. 이부자리에 누워 연설문을 읽었다. 그의 생애, 성공과 좌절 그리고 극복을 읽었다. "Stay hungry. Stay foolish."란 말이 심히 내 마음에 파고 들었다.
위에서 나의 경험을 길게 적은 것은 지금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 설치한 무대와 같은 것이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은사님을 통해 알게 된 ≪Animal School≫(동물학교)의 내용이다. 우화 형식의 그림책이지만 내용은 어른들이 숙고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기에, 어른들, 특히 이 땅에서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꼭 읽어보아야 하는 성인용 그림책이다. 원문("초서 3번" 글에 있음)과 그림은 제외한다. 지금은 언제든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전체를 볼 수 있고, Joyce Orchard Garamella가 그린 그림(illustrations)은 저작권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텍스트 원문을 한글로 옮겼다. 쉽게 읽히도록 문자대로 옮기기보다 의미로 옮긴다.
옛날 옛적에, 동물들은 결정했다. "새로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어떤 대단한 일을 하기로. 그리하여 학교를 설립했다. 활동 교육과정을 채택했다. 달리기, 오르기, 헤엄치기, 그리고 날기 과목으로 구성했다. 모든 동물이 모든 과목을 배우게 했다. 이 교육과정을 좀 더 쉽게 운영하기 위하여.
오리는 헤엄치기에서 탁월했다. 실상은 선생님보다 더 잘했다. 하지만 날기 과목은 겨우 학점을 땄고 달리기는 형편없었다. 달리기 과목이 부진했기에, 방과 후에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다. 또, 달리기를 연습하기 위해 헤엄치기 과목 수업을 빼먹어야 했다. 물갈퀴가 있는 오리의 발이 심하게 닳을 때까지 이 일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헤엄치기는 평균에 불과한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평균점수는 학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기에 아무도 이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리 자신 외에는.
토끼는 달리기 과목을 시작할 때 그 반에서 최고였다. 하지만 신경이 쇠약해졌다. 그 이유는 점수를 만회하기 위한 헤엄치기를 너무도 많이 해서다.
다람쥐는 오르기에서 탁월했다. 날기 수업 선생님이 나무 위에서 아래로 나는 것을 대신하여 땅에서 위로 날도록 하여 좌절할 때까지는. 또, 지나친 노력으로 근육이 경직되었다. 그리하여 오르기에서 C, 달리기에서 D를 받았다.
독수리는 문제아였다. 그래서 엄한 징계를 받았다. 오르기 수업에서 다른 동물들을 제치고 나무 위로 올라갔지만 그곳에 이르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학년 말이 되었을 때, 이상한 뱀장어가 헤엄치기를 아주 잘 할 수 있었고, 또 달리기, 오르기, 날기를 조금씩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평균점수가 가장 높았고, 졸업생 대표가 되었다.
프레리 개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세금 부과에 맞서 싸웠다. 학교 운영진이 땅 파기와 굴 파기를 교육과정에 넣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들은 아이들을 오소리에게 보내 도제식 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고 나중에 성공적인 사립학교 운영을 시작하기 위해 땅개와 땅쥐와 합류했다.
이 우화에 도덕적 가르침이 있는가?
뒷말을 쓰기 위해, 이 책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조금 더 소개한다. 이 책의 저자는 George H. Reavis다. 1940년대 초기 미국 신시내티 공립학교'들'(Cincinnati Public Schools)의 부교육감(assistant superintendent)이었던 그가 그 때에 "Public School Bullentin"(공립학교소식지)에 싣기 위해 'a call to action'을 쓰고 "동물학교"라고 한 것이다. 맹목적인 (교육)개혁정책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성을 우화/그림책이라는 형식을 빌어 쓴 것이다.
[참고] 'a call to action'이란 연설, 한 토막의 글 또는 행동과 같이 어떤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기를 요청하거나 고무하는 어떤 것(something such as a speech, piece of writing, or act that asks or encourages people to take action about a problem)이기에, 격문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책으로 나온 것은 1999년이다. 이때 다른 세 분 공동명의의 헌사(dedication)와 서문(foreword)과 후기(epilogue)가 덧붙여졌다. 이들은 헌사(獻辭)에서 "표준화된 검사와 부적절한 교육과정과 표준이라는 운명으로 부당한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과 어른에게 바친다."라고 썼다. 서문(序文)에서는 "아이들이 우리, 곧 그 아이들의 선생들이 그 아이들의 강점을 개발하고 도전하며, 그들의 약점을 찾아내서 육성할 때, 가장 잘 배운다. 행동에 나서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로 "개인차를 고려한 학교 교육과정의 운영"(The Administration of the School Curriculum with References to Individual Differences)을 붙인 것도 이런 교육현실과 교육의 이상적인 방향에 대한 철학을 담기 위함일 것이다. 또, 교육개혁을 위한 섣부른 정책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3. 학교는 그 사회의 거울이다
이제부터 본 이야기를 한다. 앞의 글 "오서오능"에 나오는 날다람쥐와 땅강아지는 "동물학교"에도 모두 등장한다. "동물학교"의 필수과목 넷과 땅파기/굴파기는 "오서오능"의 다섯 재주에 모두 포함된다. 중국의 고대 문헌과 미국의 현대 문헌에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안씨가훈"이 먼저 있었고, "동물학교"가 뒤에 나왔다. "동물학교"의 저자가 "안씨가훈"을 접했을까. "오서오능"에 대한 글을 읽었을까. 아니면 그것과 무관하게 독창적으로 쓴 글일까. 내가 "동물학교"를 먼저 접하고 뒤에 정민 교수의 글을 읽었을 때 느낀 놀라움은 1400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는 두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거의 같다는데 기인한다.
이 둘의 이야기가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개체 간에 차이, 곧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interindividual)에도 차이가 있고 개인 내(intraindividual)에 있는 능력/재주, 적성, 필요, 관심, 흥미 등에도 차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각자 강점과 약점, 장점과 단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것을 남은 잘하지 못할 수 있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을 남이 잘할 수 있다.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중가요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영어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수학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런 '다름', '독특성', '개별성'을 체험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고 무시해 왔다.
"동물학교"의 교육과 교육과정은 이런 다름, 개인차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의 생존과 번영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가정'되는 것'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치를 지닌 것'만' 교육과정에 포함되어야 하고 '누구나 반드시'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개인의 '강점'의 개발보다 '약점'의 보완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 교육의 목적은 '평균적인 사람'이고 결과는 '하향 평준화'다. 개개인이 성취한 것을 '평균'하여 순위를 매긴다. 평균 이상 성취하면 상을 주고, 그 이하면 벌을 준다. 그 점수로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도 간다. 앞서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학원에 다니고 과외교습도 받는다. 이른바, '한 줄 세우기' 교육이다. 앞선 자는 자만하고, 쳐진 자는 좌절한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도 있고, 학교를 떠나는 자도 생긴다. '대안'학교까지 생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현실과 너무도 많이 겹쳐진다. 아니다. 동물학교가 이 땅의 학교 바로 그것이다.
"학교는 그 사회의 거울"(school is the mirror of that society.)이란 말이 있다. 학교를 보면 그 사회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것이 학교라는 거울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비리, 위법과 탈법이 고스란히 학교라는 거울에 비쳐진다. 사회가 변하면 학교도 달라질 것이다. 또, 학교가 달라지면 사회도 변할 것이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 하면서도 설익은 계획으로 학교를 개혁하려 한다. 사건사고가 생기고서야 온갖 대책을 내놓는다. 학교폭력에 대해서도, 악성민원에 대해서도, 교권침해에 대해서도, 사'후'약방문으로, 미봉책으로 넘어가려 한다. 모든 것을 '법'(法 law)으로 해결하려 한다. 법만능주의만 팽배하다. 교육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지식정보사회는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사회의 요구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교육부터 달라져야 한다. 산업시대에나 필요했던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한 줄 세우기' 교육을 포기하고 '여러 줄 세우기'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 목표하는 곳이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정해진 트랙에서 모두 한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 서서 360도 어느 방향이라도 그곳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말의 인용과 함께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 정민 교수의 이야기를 더 들어본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낭패가 많다. 일을 많이 벌이지 말라. 일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 ... "잘 달리는 놈은 날개를 뺏고, 잘 나는 것은 발가락을 줄이며, 뿔이 있는 녀석은 윗니가 없고, 뒷다리가 강한 것은 앞발이 없다. 하늘의 도리는 사물로 하여금 겸하게 하는 법이 없다." 발이 네 개인 짐승에게는 날개가 없다. 새는 날개가 달린 대신 발이 두 개요, 발가락이 세 개다. 소는 윗니가 없다. 토끼는 앞발이 시원찮다. 발 네 개에 날개까지 달리고, 뿔에다 윗니까지 갖춘 동물은 세상에 없다.
개개인의 '다름'(difference)과 '개성'(individuality)과 '독특성'(uniqueness)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교육개혁의 광풍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이들을 실패로 몰아넣을 뿐이다. 지금 이 시대가 요청하는 인재는 박사(博士)다. 한 곳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자연히 넓어질 수밖에 없다. 발 넷, 날개, 뿔, 윗니,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 넓게 알지만 깊이가 얕은 사람(generalist)이 아니라, 한 곳이라도 깊이 아는 그런 사람(speicialist)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라는 사실을 이 둘의 글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2023년 10월 25일(수)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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