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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h!Story: 사생애(私生涯)

[3] 1998년, 대학교수가 되다

by I'mFreeman 2023. 11. 20.

모교 대구대학교(Daegu University) 본관과 전 직장 대진대학교(Daejin University) 본관. 글자 한 자 다르다. 구(邱 언덕 gu)와 진(眞 참 jin)

 
 
1996년 8월 대구대에서 특수교육학으로 "문학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1995학년도 후기 졸업이었다. 박사학위 청구논문으로 "성공경험, 목표설정 및 귀인훈련이 정신지체아의 비인지적 동기특성에 미치는 효과"란 제목의 논문을 제출했다. 1991년 8월에 입학하여 5년만에 마침내 졸업한 것이다. 그 사이에 한 학기를 휴학했으니 실로는 4년 반만에 졸업한 것이다. 재학 중에 부전공 9학점을 포함하여 36학점을 이수했다. 영어와 제2외국어로 선택한 일본어, 둘로 외국어시험을 통과했다. 이와 함께, 5과목의 전공종합시험도 모두 통과했다. 1995년 8월에 학위과정을 수료했다. 수료 후 1년만에 졸업한 것이다. 만 나이 30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이렇게 빨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지도교수님 덕분이다.
 
    졸업식이 열리던 그날, 한여름이었고, 날씨까지 쾌청했다. 아내와 그 해 1월에 태어난 아이와 함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산캠퍼스에 갔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도 왔다. 외가와 처가의 많은 식구들도 와서 축하해 주었다. 경산 캠퍼스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많이 남겼다. 기념이자 기록이었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 대구파크호텔에서 식사대접을 했다. 미리 예약해두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시던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늦은 시간까지 축하연이 이어졌다. 노래방에도 갔다. 기쁘고, 즐겁고, 유쾌한 시간들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다. 직장을 구하기만 하면 그간의 고생스런 삶이 모두 끝나는 것이다. 행복한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해 그 학기에, 대학 두 곳의 채용공고가 있었다. 모두 지원했다. 한 곳은 내가 전공한 분야(정신지체아교육)였다. 다른 곳은 인접 분야였다. 뒤의 대학은 내가 잘 아는 분의 권유로 지원한 것이었다. 채용되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만일 두 곳 모두 채용된다면, 앞의 대학을 선택했을 것이다. 내심이 그랬다. 앞의 대학에 채용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전공한 분야의 교수가 되어 내가 공부한 것을 가르치는 것을 진정코 바랐던 것이다.
 
    앞의 대학은 영어시험도 있었고 전공시험도 있었다. 모두 잘보았다. 최종 후보자로 선발되었다. 지도교수님께서도 도와주셨다. 잘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사장님과의 면접만 남았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중시한 분이었다. 거기에 기재된 것으로 하나를 물어보셨다. 그곳 교수로 있다가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다른 대학으로 옮겨가신 대구대 선배분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어보셨다. 실상 대구대도 어려웠던 시절에 마찬가지 사정이 있었다. 경북대로, 계명대로 가신 분들이 많아 사범대 건물을 그곳에 높이 지은 것이 그 때문이라고 들었다. 나는 대구대의 예로 대답하고 기회가 되더라도 다른 대학으로 이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로 진심이었다.
 
    교수채용절차가 모두 끝났다. 결정을 기다리는 것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떤 소식도 오지 않았다. 결국 그 대학 교무처장에게 전화했다. 아쉽게 되었다는 말씀이 돌아왔다.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컸다. 아니 절망 같은 것을 느꼈다. 대학교수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80년대에 유학갔던 분들이 하나둘 돌아오던 때였다. 그리고 국가재정 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던 어수선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신규교수를 채용하는 대학이 크게 줄거나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심이 실로 컸다. 감당하기에 벅찬 것이었다. 그 해 설연휴에 셋이서 여행을 갔다. 경주로 갔다. 수학여행 때 가보지 못한 곳도 가보았다. 감포에도 갔다. 바다도 보았다. 노래방에도 갔다. 하루밤 모텔에서 잤다. 그렇게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아내와, 아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심에 빠진 내 마음을 조금 추스릴 수 있었다.
 
    다시 학교에 나갔다. 지도교수님 책임 하에 진행되던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도왔다. 그리고 공주교육대에 출강하게 되었다. 그곳의 K교수님이 평촌선생께 시간강사를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고, 평촌선생께서 나를 추천해 주신 것이다. 그 전에 출강하던 과목을 내려놓고 공주교육대에 출강했다. 내가 공부한 "특수교육"을 가르칠 수 있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렇게 결심했다. 왕복 400km의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K교수님, 참 좋은 분이었다. 첫 날 나와  같이 다니며 학교 안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일러주셨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2학기 6시간, 1학기 4시간의 강의를 내게 맡겨주셨다. 아는 것도 별로 없이 교육대 학생들을 가르쳤다. 보람을 많이 느꼈다. 학기말에 어느 학생의 진심어린 편지도 받았다. 학생들에게 과제로 낸 장애인 관련 영화 감상문이 모두 내용이 충실했다. 그때 내가 맡고 있던 단체의 소식지에 이 감상문을 실었다. 교사가 될 학생들이니, 정성을 다했을 것이다. 대진대에 부임할 때까지 1년 반, 3학기를 그렇게 공주교육대 학생들에게 특수교육개론을 가르쳤다.
 
    연말이 되자 여기저기 채용공고가 났다. 내가 지원이라도 해볼 만한 대학은 세 곳이었다. 공주, 인천, 대구에 있는 대학이었다. 맨앞의 대학은 전공과 조금 거리가 있는 분야였기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인천에 있는 대학에 지원서를 내러 갈 때, 아내와 아이와 함께 갔다. 가는 중에 공주에 있던 대학에도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것으로 끝났다. 뒤의 두 대학은 어디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고향 땅 대구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채용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채용절차가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몹시 실망했다. 
 
    인천에 있는 그 대학은 달랐다. 영어시험도 있었다. 정말 어려웠다. 지문의 영단어도 생소한 것이 많았고, 독해도 어려웠다. 작문까지 있어 시간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면접 대상자가 되었다. 학과 면접은 진실로 진지한 물음이었다. 존경하는 인물을 물어보셨다. 나는 내 지도교수님이라 했다. 이유를 물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경험한 결과라고 답했다. 교육과 연구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지 물었다. 나는 연구가 적성에 더 맞는다고 말했다. 교육이라고 답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거짓으로 답할 수는 없었다. 전교조에 대한 의견도 물었다. 대학 교생실습에서 느낀 것으로 답했다. 출퇴근할 때는 화이트 칼러, 근무 중에는 블루 칼러였다. 그렇지만 교사가 노동자는 아니라고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최종 결과는 세 곳 모두 불합격이었다.
 
    또, 한 학기가 지났다. 이번에는 대구대 재활과학대 K교수님께서 나와 선배 한 분이 진주교육대에 출강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셨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까지 시간강사로 추천해주신 것이다. 하루 6시간씩 이틀이었다. 모두 12시간 강의를 맡았다. 대구대와 공주교육대 외의 강의는 할 수 없었다. 공주교육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창녕 처가에 갔다. 하루밤 자고 진주에 갔다 왔다. 또 하루밤 자고 진주에 다녀왔다. 그리고 짐 챙겨 대구로 돌아왔다. 이때 사흘만에 18시간을 강의했다. 무려 1000km를 운전하고 다녔다.
 
    이번에도 세 대학에 채용공고가 있어 모두 지원했다. 아산에 있는 대학, 직전 학기에 지원했던 대학, 그리고 대진대였다. 맨앞의 그 대학은 서류전형 뒤 탈락했다. 바로 앞 학기에 채용하지 못해 다시 채용하게 된 그 대학은 지난번과 같았다. 학과 면접을 보고 대학 본부 면접이 이어졌다. 하루에 모두 끝내려 하니,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날이 어둑해져서야 면접이 있었다. 형식적인 질문 하나로 끝났다. 교통비로 5만원을 받았다. 일용직 노동을 한 셈이었다. 그것으로 모두 끝났다.
 
    나를 구해준 것은 대진대였다. 대진대 교수로 채용된 것이다. 7전 8기, 바로 그것이었다. 마침내 아동학과 소속 "전임강사"(이 직위는 없어졌다. 요즈음은 조교수로 발령된다)가 된 것이다. 1년 6개월의 "보따리 장사"가 끝났다. 채용 분야는 "특수아치료"였다.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합격통보와 함께 채용서류를 제출하라 했다. 학력과 경력 증명서를 모두 발급받았다. 신체검사도 했다. 이모부님께서 신원보증을 해주셨다. 민간인신원진술서가 문제였다. 모두 자필로 적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 여유도 없었다. 밤새 적었다. 이때 몸이 좋지 않았다. 겨우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대진대에 제출했다.
 
    이제 익숙한 대구를 떠나 포천이란 낯선 곳에 가야 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살 집부터 구해야 했다. 집을 구하러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포천으로 올라왔다. 아내가 도시락을 쌌다. 밤새 올라왔다. 이천휴게소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아파트에 있는 집을 얻기로 하고 계약금 30만원으로 가계약했다. 나 홀로 와서 정식 계약을 하려 하니, 임대할 수 없는 집이었다. 본래 임대주택이어서 은행대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집을 구하러 다녔다. 학교 인근에 있는 빌라였다. "대원빌라 A동 101호." 너무 넓고 좋아보였다. 전세보증금이 2000만원이었다. 청약저축을 해약하고 대출을 받아도 600만원이 모자랐다. 나머지는 장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998년 3월 새 학년도가 시작되었다. 이사를 했다. 발령도 났다. 마음이 몹시 설렜다. 시간강사 때와는 달랐다. 교양과목에 특수교육이 있어 2분반, 4시간을 맡았다. 다행이었다. 이 과목은 강의하는데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다. 전공 과목은 사정이 달랐다. 강의해본 적이 없는 전공 과목 둘을 맡아야 했다. 전공 교육과정이 개편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해가며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여간 대학의 전임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나나 아내나, 난생 처음 겪는 타향살이에도 조금씩 적응해갔다. 이제 어둡고 힘겨웠던 지난날의 삶을 몽땅 청산하고, 이 곳에서 아내와 아이, 그리고 머지 않아 태어날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형용할 수 없는' 몸의 이상을 느꼈다.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왜 이런 걸까...
 

2023년 11월 19일(일)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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