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울
2002년 3월 무렵부터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몸이 안정되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했다. 병원에 가서 1주일 치 약을 처방받아 왔지만, 며칠만에 다시 병원에 가야 했다. 다시 처방받은 약도 소용이 없었다. 다시 병원에 갔다. 이런 일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는 공식적으로 휴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이 없어 그럴 수 없었다.
그때 있었던 일은 내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2002년은 한일월드컵 대회가 열렸던 해다. 우리도 남들처럼 거리응원에 나갔다. 시청 옆 광장에 한 번, 체육관 옆의 축구장에서 한 번, 그렇게 두 번 거리응원을 가서 축구경기를 보았다. 골 넣는 장면 외에는 그냥 바라보았을 뿐이다. 안절부절하는 몸과 마음 때문에 보아도 본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신문에서 우울증 치료법에 "경두개자기자극술"(TMS: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5월 8일 여의도성모병원에 간 그 첫날, 버스로, 지하철로 아내와 함께, '아이 셋'을 데리고 찾아갔다. 가는 그 시간 동안 너무 힘들었다. 그때는 1998년 그때만큼 힘들었다. 방학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학기가 끝나고 마침내 여름 방학이 되었다. 2002년 7월 8일 여의도성모병원에 입원했다. 2인실밖에 없었다. 일단 입원하고 다인실에 자리가 생기면 옮기기로 했다. 먼저 있던 분은 얼마 뒤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퇴원했다. 퇴원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참 고마웠다. 나도 6인실로 옮겼다. 아내가 아이들 데리고 왔다갔다 했다.
그때에도 1998년 때처럼 했다. 내가 먹는 약에 대해 간호사들에게 물어 그 이름을 적어두었다. 병동 내 담당 의사는 전공의다. 모두 알다시피, 전공의는 할 일이 너무 많아 늘 바쁘다. TMS 치료를 제때 해주지 못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담당 의사를 볼 때마다 TMS 치료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임상시험이어서 진료실은 따로 없었다. 병동 바깥에서 복도에서 TMS 치료를 받았다. 의자 등판 위에 전자기 코일이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고 의사는 그 코일을 머리 위에 두고 난 뒤 얼마 동안 그렇게 있는 것이었다. 대략 20분 정도였던 것 같다. 자기장을 이용한 그 치료는 10회였다. 어느듯 새 학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채 퇴원해야 했다. 그 날이 8월 19일이니 대략 40일 입원하여 약물치료와 TMS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다시 학교에 나갔지만 두 주도 버티지 못했다. 9월 17일에 '휴직원'을 내고 그 다음 날(9.18) 다시 입원해야 했다. 두 번째 여의도성모병원 입원이었고, 모두 합하면 세 번째 입원이었다. 이때 내 병은 최초 발병 때보다 더 나빠진 것이었다. 온전한 재발이었다. TMS 치료도, 약물치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때 나는 그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결연한 치료 의지도 상실했다. 혼자서 입원생활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내가 나의 입원생활을 함께 했다. 남자들만 있는 병실에서, 내 옆 작은 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그렇게 나를 지켜주었다.
그렇게 나약해져버린 나로 인해, 우리 아이들 셋, 너무도 어린 아이들 셋은 모두 대구로 가야 했다. 큰아이는 내 막내 동생이, 딸아이와 작은아이는 처형이 맡아주었다. 아내와의 혼인 후 두 번째 '다이애스포라'가 재현되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때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어떤 약물로도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수단, 최후의 치료라는 "전기경련치료"(ECT: electroconvulsive therapy)를 권유받았다. 무조건 받기로 했다. 총 10회 받았다. 그 사이 사이마다 조금씩 호전되었다. 모두 끝난 뒤에는, 아내와 탁구도 치고, 외출도 하고, 외식도 하고, 인근의 여의도순복음교회도 다녔다. 아내에게 아지매 되시는 분이 우리를 차에 태워 강화도에 갔다. 새우 등 맛있는 음식도 사주셨다.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어느듯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그리하여 11월 1일 퇴원했다. 이때가 마지막 입원-퇴원이었다. 아이들 셋도 돌아왔다. 우리 다섯 명의 가족이 다시 재회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포천동(당시, 포천읍)에 있던 아파트 하나를 사서 그곳 23층에서 살았다. 그 전 살던 곳 이웃에 고향이 문경인 부부와 인연이 되어 이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평화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았지만 모자랐다. 3차례에 걸쳐 나누어 대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계약했다. 그 분과 친밀히 지냈다. 서울경마장에도 양쪽 가족이 함께 갔다. 그런 인연으로 어렵게 마련한 그 아파트를 팔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를 휴직했기에 월급이 없었고, 입원비까지 내야 해서였다.
퇴원한 뒤 얼마 있다가 인근의 빌라를 전세로 빌려 옮겼다. 그때 매매계약한 것도, 전세계약한 것도 내 기억속에는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아내가 말해주니 조금 생각날 뿐이다. 하여간, 한일월드컵이 열렸고, 은사님 두 분의 정년퇴직(나중에 생각이 난 것임)이 있었던 2002년, 그 해는 내게 너무도 잔인한 해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고, 준비 과정에서 제출한 글 하나가 기념문집에 실렸을 뿐이다.
퇴원 후에 살던 빌라, 그 인근에 있던 헬스클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매일 열심히 운동했다. 이미 학기가 끝나 강의도 하지 않고 월급을 받는 것이 무안해서 3월에 복직하려고 하던 중에, 법인에서 복직하라고 했다. 그래서 근무없이 2개월 동안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2003년 3월부터 수업도 열성을 다했고, 아동행동치료실 일에도 공을 들였고, 책과 논문도 발표했다. 정부(교육부) 일에도 참여하고, 국립특수교육원의 이런저런 일들에 몇 해 참여했다.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의미 있는 연구와 논문이 몇 있다. 2004년 9월 재임용, 10월에 '부'교수 승진을 했다. 한 휴직했기에 6개월 밀린 것이다. 2009년 9월 재임용과 함께, 10월에 교수로 승진했다.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가 된 것이다. 이 해에 주치의가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기게 되어 2009년 5월 3일부터 지금까지 서울성모병원에서 외래로 계속 치료받고 있다.
그 사이에 두 가지 일이 있었다. 2016년 어느 날 신문을 보니, 30년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어느 여성분이 세브란스병원에서 "감마 나이프"(Gamma Knife)라는 치료술로 완치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찾아보았다. 서울삼성병원에서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여간 2017년 1월 11월에 아내와 같이 세브란드병원 외래로 진료를 보았다. 나의 진단명과 내가 받은 치료를 모두 들은 그 의사는 대상자가 될 수 있다 했다. 1박 2일 입원하여 머리카락을 자르고 치료하면 끝난다고 말했다. 임상시험이어서 CT 촬영 외에 따로 비용이 없고, 대기자가 많아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전 진료기록 사본을 제출해 달라고 했다. 그날 여의도성모병원과 강남성모병원 두 곳을 돌아 의무기록사본을 모두 제출했다.
첫 진료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그리하여 12월 초에 먼저 연락했더니 곧바로 오라 했다. 12월 19일에 예약하고, 가서 보니 임상시험이 끝나가고 있었다. 1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내가 누락된 채 있었던 것이다. CT를 촬영했다. 판독 결과 두개골이 두꺼워 치료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심히 실망되고 낙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 고문을 당한 듯해 화도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미 제출한 의무기록사본을 되돌려받았다. 언제 여기 다시 올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CT로 촬영한 영상을 DVD로 복사해 갖고 왔다. 그 밖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여 세브란드와의 인연은 모두 끝나고 말았다.
그 무렵에 신문을 통해 집에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기기를 와이브레인(Ybrain)이란 스타트업에서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알아보니 이 기기를 대여하는 가까운 곳으로 서울 중랑구에 한 곳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임상시험 단계에 있었고, 가벼운 상태만 가능하다고 했다. 이 역시 큰 기대를 품어 거의 매일 검색했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최근 기사를 보니, 경도나 중등도의 우울증 치료에 "마인드스팀"이란 이름의 '전자약'으로 처방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지금까지 약을 먹으며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신의 통증이다. 몸이 아파서 괴로울 뿐이다. 계절이 바뀌거나 비가 오거나 장마철이나 겨울일 때, 아프고, 힘들고, 어떤 일 같은 것을 하기가 어렵다. 병도, 약, 통증도 나의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목숨을 이어가며 사는 동안에는, 결코 헤어질 수 없는 내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 약을 먹는 것도, 이런저런 치료를 받았던 것도, 병자라는 사실도 그렇게 담담히 받아들인다. 나이가 드니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예전의 일들이 재발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5. 나,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
내가 아내와 혼인을 하기 전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다. 그런 삶을 살아내야 했다. 그 삶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이 그 가족에게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체험했다. 나만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폭력과 가난의 대물림만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명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살아냈다.
그런데 병을 얻었다. 그 병의 치료를 거듭하는 중에, 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여럿 저질렀다. 20년 가량의 긴 세월 동안,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다. 물건을 부수기도 했고, 험한 말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다. 거의 해마다 꼭 그런 일이 있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모두 기억나서 한 말은 아니다. 그 일들이 모두 생각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에게 듣고서 알게 되었던 것도 있고, 아내의 말이 단서가 되어 흐릿하게 생각난 것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그런 것이다. 실상 내가 기억하고 있거나, 생각에 남아 있거나, 알고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것은 결코 변명이 아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잘 몰랐다. 그러니 이 중대한 문제의 본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막내 여동생은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말 싫어했다. 우리가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는데 왜 그렇게 하냐고 했다. 또, 몇 해 전에는 바로 아래 동생도 이렇게 말했다. 예전의 따뜻한 오빠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그런 말들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를 잘 몰랐다. 아내가 나와 헤어질 결심까지 했던 그 무렵의 일이었다. 올 여름에는 지극히 사소한 일로 딸아이와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내 나름대로 마음을 추스려 좋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로는 소통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격분하고야 말았다. 폭언과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별 일이 아니었음에도 내 마음과 달리 그렇게 되어 버렸다. 딸아이의 말을 그저 잘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 일로 아내와의 관계도, 아이 셋과의 관계도 산산조각 났다. 그때 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깨어져 버린 것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그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몹시 서운했다. 화도 많이 났다. 그간 힘들게 견뎌내며 나름 열심히 살아온 것이 모두 부정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과 감정에 휩싸여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만 것이다. 그 일로 우리 가족들 모두 극심한 상처를 받았다. 내게도 큰 상처였다. 몇되지 않는 소중한 가족들, 특히 세 아이들과의 불화는 내게도 큰 상처였다. 나의 언행으로 인하여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의 관계가 깨어짐에서 오는 상처였다.
그때 그 일이 있은 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도무지 추스릴 수 없었다. 집 안에 있기도 힘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바깥에 나갔다.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집안에 흩어져 있던 나무들을 정리하고 껍질을 벗겨내고, 다듬었다. 몇 달을 그렇게 보냈다. 그때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무들을 정리하는 그 일에 열중하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의 어느 날부터 그때 그 일을 반추(反芻)하게 되었다.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점점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때 든 생각이란 이런 것이었다. '지금'의 나에서 시작되어 '과거'의 나,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이다. 부단(不斷)한 자기 대화(self-talk)가 연이어졌던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 셋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했던 것일까. 왜 그랬던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어쩌다가 나 스스로 또 다른 흑역사를 초래한 것일까. 과거의 그 흑역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때문일까. 내 속에 '그'가 있었던 것일까. 내가 '그'가 되어버린 것일까. 병 때문일까. 여리고 따뜻했던 '예전의 나'를 병 때문에 잃은 때문일까. 내가 병으로 완전히 변해버린 것일까. 본래의 나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런 내가 본래의 나이기는 한 것일까.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나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그다지도 허약해져 버린 때문일까. 인간의 본성이 본래 그런 것일까. 인간이란 본래 야누스와 같이 양면성을 지닌 존재인 것일까. 선함과 악함, 지킬과 하이드가 한 마음속에 공존하는 것이 인간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비로소 동생들과 아내의 말과 생각,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 그 뜻을 조금씩 헤아릴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님을 깨달았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그때서야 조금 알 수 있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우리 가족들에게 미치는 결과를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깊은 상처를 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난폭함에 길들여져서 폭력적인 언행에 둔감했던 것이다. 나의 언행이 몰고 올 결과를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병이 이유의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이 문제는 지금 나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미 지나간 날과 일들은 되돌릴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지난날 '그'로 인한 일들, 과거의 '나'로 인한 일들과 나의 병과 영원히 이별하기 위함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관계의 회복과 복원에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해내야 하는 것이다. 내게 아내와 아이 셋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일이란 이런 것이다. 어떤 외물(外物)에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그런 나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중단없이, 포기없이 내면의 힘을 길러 온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만한 힘도 조금 더 생겼고, 조금의 자신감도 있다. 지난날의 일들에 대해 이해해 달라 말할 수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지켜봐 달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지난날과 같은 그런 일들이 더는 없을 것이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도 없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저 용서를 구할 뿐이다.
2023년 10월 13일(수)
ⓒ H.M. Han
블로그에 글을 처음 쓴 그날부터 이 이야기를 먼저 글로 쓰려고 했다. 막상 글쓰기를 시작해보니, 계속 쓸 수 없었다.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만 두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이 글을 통해서라도 내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글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발병(發病)부터 그 이후의 일들을 생각나는대로 조금씩 적었다. 오늘 대강 마무리한다. 글로나마 나 자신의 못난 삶을 뉘우치는 참회(懺悔 confession) 같은 것이다. 과거의 나, 나의 다른 면, 나의 잘못된 언행에 대한 소명/해명(疏明/解明 explaination)일 수도 있고, 변명(辨明 excuse)일 수도 있다. 내가 저지른 행동에 그 나름의 까닭이 있음을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다. 내 잘못에 대해 구실이나 핑계에 불과한 것이 될지라도 글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잘못 읽혀지지 않기만을 진실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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