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2022년 9월에 퇴직하여 자유인(自由人)으로 하루종일 집안에서 살고 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대문 밖을 나간다. 직장이 없으니 실업자(失業者)다. 직장이 없으니 돈도 벌지 않는다. 본래 돈벌이에는 관심이나 흥미가 별로 없었다. 열심히 논문을 썼을 뿐이다. 정성껏 학생들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면 돈벌이는 그냥 되는 것이었다. 신문의 경제면 기사는 읽어도 읽은 것이 아니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여간 지금은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며 살고 있다. 이 블로그에서 나는 'I'mFreeman'이다. 자유자유한 남자, 공짜 남자다. 가족들에게 미안함이 없지는 않다. 가족들이 이해해주니 고마울 뿐이다.
진작부터, 대략 15년 전부터 퇴직하고 싶었다. 그때는 고향 대구에서 너무도 먼 곳에서 일가붙이 하나 없이 사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 처음에는 자주 내려갔다. 차츰 이 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적응하면서부터, 대구에 자주 내려가지 못했고, 창녕에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내려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설이나 추석이 되어도, 우리가 내려가지 않고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나의 고향 대구에서 살면, 아내의 고향 창녕도 가까워서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교수 노릇을 그만두고 퇴직을 해야 했다. 처가에 가서 장인장모님께 먼저 말씀드렸다. 대학 교수로 정년이 아닌 중간에 퇴직한 것을 그 저간의 사정을 모르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을 우려해서였다. 무엇인가 신변에 문제가 생겨 자의가 아닌 타의로 직을 잃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음을 미리 걱정했던 것이다.
장인어른은 대진대 교수를 더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장모님께서는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딸자식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몹시 아쉬워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막내처남에게 우리가 살 집이나 집을 지을 땅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처남이 이곳저곳 알아봐 주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음만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집이나 땅을 구입하는 것도 문제지만, 당장 먹고사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내 몸으로는 농사일을 해낼 수 없었다. 대진대에 근무한 것이 불과 15년 정도이었기에, 연금수급자도 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포기했다. 연금수급자가 되려면 20년이 넘어야 한다. 그때까지 5년만 더 근무하기로 했다.
2012년에 처음으로 연구년을 얻었다. 전임교수로 임명되고부터 14년만이었다. 6년마다 1번 할 수 있는데 난 딱 1번 한 것이다. 내가 번역한 "초등학생을 위한 스킬스트리밍"이 1월에 출간되었다. 곧바로 "청소년을 위한 스킬스트리밍" 프로그램의 개정판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그 해 1년의 세월을 이 책의 번역에 모두 썼다(모두 번역하고도 학교일로 계약기간을 놓쳤고 결국 출간하지 못했다). 그 이듬해 2013년 3월에 학교에 복귀했다. 그 1년 사이에 학과 내의 여러 가지가 바뀌어 있었다. 내가 담당하던 “아동행동관찰/치료실”을 회수한다고 했다.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연구년이던 중에 학과의 다른 교수들끼리 그렇게 했던 것이다.
지역의 많은 장애아동들이 이용했기에, 우리 학과의 많은 학생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동참했고, 그 중의 많은 학생들에게 다른 진로를 열어주었던 곳이다.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학생도 여럿 된다. 학교법인에서 따로 건물을 지어 옮겨주기로 했던 곳이다(교수협의회 천막농성 때문에 지연되고 있었다). 그런 곳을 회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조교 정원은 그 전에 없어져서, 모든 짐들을 홀로 치워야 했다.
그해에 내 수업을 듣던 학생 하나가 3주차 수업이 끝나고 연구실로 찾아왔다. “행동치료원리”란 과목이었다. 그 학생은 이 분야를 더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노트를 꺼내 내 말을 받아 적었다. 정말 기특했다. 그 학생을 내 연구실에 들여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지도교수도 바꾸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학생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다. 그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학생의 권리를 지켜주려 했던 나는 학교와 충돌이 있었다. 이곳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인가 싶었다. 또, 대학구조조정 과정에서 교육부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학교가 내놓은 여러 정책도 대학 본연의 이념과 현격하게 다른 것이었다. 정말 떠나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두 해 뒤 2015년 겨울에, 어느 학교법인에 외부이사의 결원이 생겨 그 잔여임기 동안 등기이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총장의 겸직허가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허가해 주었다. 임기가 끝나고, 다시 이사를 맡아야 했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불허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결국 두 학교법인이 협의하여 겸직허가를 받았다. 교육부에 알려야 하는 바로 그날에 겸직허가가 난 것이었다. 급히 일처리를 해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학교 외부의 일을 하면, 교수 개인에게는 교육과 연구에 쓸 시간이 줄어든다. 그 대신에 학교 홍보에는 큰 보탬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가를 해주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뒤에 알았다. 정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옳을까 심각히 고민했다.
그 무렵부터 교무처에 명예퇴직을 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매년 그랬다. 교무처로 찾아가기도 했고, 명예퇴직 신청 공문이 오면 문서로 신청했다. 그러던 중인 2018년 3월이 되어 사립학교 연금수급대상자 자격을 취득했다. 그 뒤로도 계속 신청했다. 그때마다 대학재정을 이유로 불가하다 했다. 학교 규정에 “20년 이상 근무, 60세 이상”의 교수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규정 때문에 불가하다고도 했다.
2021년 11월 무렵에 학교에서 공문이 왔다. 내가 알기도 전에, 교학팀에서 먼저 알려주었다. 이번에는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소식이 없었다. 다시 알아보니 조금 더 기다리라 했다. 2022년 초에 이런저런 조건을 달고 신청을 다시 받았다. 모두 받아들였다. 또 기다렸다. 이번 학기가 대학 강단에 서는 마지막 학기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논문 쓰기에 힘써 2월과 5월에 각각 한 편씩 발표했다. '명예로운' 퇴직을 위한 것이었다. 1월에는 “대인관계심리” 과목 강의를 10회 촬영하여 교육부 주관의 KOCW(Korean Open CourseWare)에 공개했다(제1차시 수업의 URL은 http://www.kocw.net/home/cview.do?lid=1d6f9859d19cdc80이다). 명예퇴직이 결정되었다. 2022학년도 1학기 수업과 이 공개강의가 마지막 대학 수업이 된 것이다.
내가 속한 단과대학 학장이 ‘명예교수’로 추대하겠다고 했다. 참으로 고마운 말이었지만, 사양했다. 정년을 채운 것도 아니고, 50대 중반의 나이에 '명예'교수란 직함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럼에도, 학장은 다시, 그리고 재차 거듭 설득했다. “교수님이 명예교수가 되지 못한다면, 명예교수로 추대할 분은 없다.”는 말까지 했다. 나를 알아주니 그지없이 고마웠다.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그렇게 하기로 했다. 교학팀에서 관련 공문을 전달해주었다. 제출시한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었다.
교학팀에서 8월 19일 연락이 왔다. 추천 마감 날이라 했다. “명예교수 추대 개별조서”, “교육 및 학술에 관한 공적서”, “본교 발전에 기여한 공적서”, 이 셋을 적어 제출해야 했다. 이력서를 찾아 하나하나 옮겨 적었다.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결국 “교육 및 학술에 관한 공적서”는 “이력서”로 대신한다고 했다. 내가 제출한 “이력서”와 학교의 “교원인사기록카드”로 학장이 ‘그날’ 저녁 늦게까지 “교육 및 학술에 관한 공적서”를 대신 써주었다. 진실로 고마운 분이다. 마침내 마감 일인 8월 19일 교무처에 제출되었다.
퇴직을 며칠 앞둔 8월 28일에 대진대 교수라는 신분으로 학교에 마지막으로 갔다. 한여름이었다. 2월에 졸업한 대학을 제외하고, 대학원 석사와 박사 학위과정 모두 여름에 입학하고 여름에 졸업했다. 직장까지 한여름에 졸업하는 것이었다. 아내와 아이 셋,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함께 했다. 먼저 연구실이 있던 인문학관 뒤 언덕에 있는 박물관과 그 맞은 편에 있는 정보정산원 사이의 푸른 잔디밭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아이들 셋이 만든 "현수막"과 "감사패"가 함께 했다. 연구실에서도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아이들이 예약해둔 곳으로 갔다. "고모리애(愛)"라는 고급 음식점이었다. 채식주의자를 고려해서 아이들이 한식으로 준비한 것이다. 값진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값비싼 명품 가방을 "선물"로 받았다. 작은 아들은 내가 받기를 좋아하는 "편지"를 건넸고, 딸아이는 "건강보험"을 책임지겠다고 예쁘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을 아이들 셋이 마음을 합하여 준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온가족의 축하 속에, 대진대 98교번인 나는 24년 6개월의 시간을 함께 한 대진대를 졸업했다.
2022년 8월 31일 명예퇴직을 하고 9월 1일자로 면직되었다. 이는 곧 ‘명함’을 주고, ‘자유’를 받은 것이다. 그 뒤 10월 18일에 교무처에서 정부 ‘포상’ 관련으로 연락이 왔다. “공적조서”를 적고 “재직기간확인서”를 확인하고 동의한 뒤에 회신해 달라 했다. 공적조서는 내가 적었다. 대진대 재직기간은 24년 6개월(1998년 3월-2022년 8월)이다. 6개월이 모자라 25년을 채우지 못했다. 시간강사 경력이 5년 6개월이니(1992년 8월-1998년 2월), 대학 강단에 딱 30년 있었던 것이다. 정년(65세)까지 9년이나 남겼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교육부장관 표창이라 했다. 교육부에 오랫동안 계셨던 김** 교수님께 말씀드렸다. 훈격을 다시 알아보라 하셨다.
담당자에게 물어보았다. ‘시간강사’ 경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했다. '급여'를 받은 ‘조교’ 경력은 포함된다 했다. 제7차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작업을 할 때, 대구대 “실습(사무)조교”를 한 적이 있다. 1996년 7월부터 1997년 7월까지 1년 1개월이다. 그 당시에 대구대에서 말하기를, 증빙은 근무기간에만 가능하다 했다. "근무확인서"를 발급받은 적이 있다. 근무기간이 끝난 뒤에는 어떤 증빙도 하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대진대에 제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애당초 호봉이 잘못 산정되었던 것이다.
예전에 교수채용 지원서를 낼 때 발급받은 “근무확인서” 사본을 담당자에게 보냈다. 대구대에서 확인해주면 경력을 재산정할 수 있다 했다. 대구대에 연락해 보니 근거자료가 없다 했다. 내가 '급여지급'을 증빙해야 했다. 통장을 뒤졌다. 조흥은행 통장에서 급여를 받은 기록을 찾아냈다.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통장 사본을 학교에 제출했다. 교무처에서 대구대로 보냈고, 대구대에서 ‘교육공무원 전력’을 조회한 결과를 공문으로 교무처에 보내 통보했다. 이렇게 하여 교육경력이 25년 5개월로 인정되었다. 몇 시간 만에 국무총리 표창으로 훈격이 올라간 것이다. 10월 18일 하루 중 오후 몇 시간만에 있었던 일이다. 교무처에 갔을 때 내가 이미 10월 1일자로 ‘명예교수’로 '추대'된 사실을 알았다. 학장에게 사의를 표했다.
올 3월 8일 대진대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날 11시 30분 총장실에서 퇴직교원 포상 수여식이 있으니, 수여식 5분 전에 교무처장실로 오라 했다. 이미 퇴직한 사람이 학교에서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또, 그날 다른 일이 있었고 참석할 수 없었다. 아내가 대신 교무처에 가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아 왔다. 그렇게 하여 "명예교수" 외에 대진대와의 인연은 모두 끝났다. 나의 은퇴는 학'교'(學敎)일 뿐이다. 학'문'(學問)에서 은퇴한 것은 아니다. 돈 버는 일로부터 자유로움일 뿐이다. 이것을 온 가족들이 좋은 마음으로 축하해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온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23년 12월 15일(금)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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