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 마침내 대학 전임교수가 되었다. 대진대 아동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것이다. 정든 고향 대구에서 멀고도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전임교수가 되었으니,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었다. 낯선 곳 포천에서 살아야 한다. 설레임으로 학생들을 만났다. 처음 몇 달은 아무런 문제없이 수업하며 잘 지냈다.
1. 포천
그런데 5월 무렵부터 조금씩 몸에 이상이 생기고 있음을 느꼈다. 뭐라 말로 '형용'(形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조차 겨우 겨우 해내고 있었다. 학기말이 가까워지자 더욱 심해져 성적을 내는데 애를 먹었다. 성적처리도 겨우 해낼 수 있었다. 성적을 공개하고 이의가 없으면 여름 방학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뭔가 몸에 탈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A형 당뇨병인 것 같았다. 담배 피우는 것을 먼저 그만두었다. 그리고 매일 집 주위를 뛰었다. 하루 두 번 2km 정도 뛰는 것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 방학이 되었다. 그 무렵에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다. 밥을 먹고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았다. 막상 밥을 먹으려고 하면, 식욕도 생기지 않았다. 밥을 먹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아내는 채소로 죽을 끓여주었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살던 곳에는 종합병원이 없었다. 다행히 의정부에 성모병원이 있었다. 내 몸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고, 어떤 병이 든 것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그래서 종합건강진단부터 받아보기로 하고 예약했다. 1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 그 1주일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6월 24일 건강검진을 했다. 결과를 기다렸다. 가정의학과에서 그 결과를 들었다. 몸에 특이한 문제가 없다 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 몸의 상태가 온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증상은 여럿 있는데 어떤 문제도 없다는 것은 정말 문제였다. 그 의사에게 내 몸의 달라진 증상을 적어놓은 것을 읽어 말했다. 지금도 갖고 있다. 그 쪽지에 적어놓은 증상은 이런 것이었다.
현기증을 자주 느꼈다. 갈증이 심했다. 정말 자주 배가 고픈데 식욕도 없고 먹기도 어려웠다. 눈을 뜨고 있기도 어려웠다. 집중하는 것도 어려웠다. 머리가 무겁고 멍했다. 생각 같은 것이 나지 않았다. 기억력이 현저히 감퇴되었다. 피로감이 심했다. 식은 땀이 자주 났다. 헛구역질도 잦았다. 잠을 많이 자지 못했다. 소변이 잦았다. 숨이 찼다. 목에 가래가 많았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의사는 우울증이 의심된다고 했다. '가볍게' 말하며, 한 달치 약을 처방해주었다.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보름 정도 걸린다고 말했다. 결과표는 받아 왔다. 짐을 챙겨 어머니가 계신 대구로 내려 가기로 했다.
2. 대구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고향땅 대구로 내려갔다. 방학기간 안에 치료해야 한다. 방법부터 찾아나서야 했다. 약은 일단 먹지 않기로 했다. 삼시세끼 모두 소고기국을 먹었다. 난생 처음 육식을 했다. 먼저 찾아간 곳은 "단학선원"(현, 단월드)이라는 곳이었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을 배우는 도장 같은 곳이었다. 의정부에도 선원이 있다 하여, 1년치 수강료를 내고 다니기 시작했다. 매일 갔다. 하루에 2번 갔다. 단전호흡이란 것이 그야말로 고도의 집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알았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집중을 잘하지 못했다. 집중을 못하니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기(氣)을 느끼지 못했다.
대학 은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경북대로 찾아갔다. 캐나다에서 20여 년간 심리학자로, 심리상담과 행동치료를 실제로 하신 분이다. 은사님께 상담을 받고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상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미 말했다. 다시 길게 적지 않는다. 은사님은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behavior therapy)이 방법이라 하셨다. 지시하시는 대로 했다. 단전호흡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다. 그때 아내가 늘 동행했다. 만삭의 몸이었다. 내려간지 한 달쯤 된 날, 7월 29일 양수가 터졌다. 곧바로 어머니와 함께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어머니는 큰 아이가 혼자 있어 이내 되돌아가셨다. 얼마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났다. 둘째 아이다. 딸아이다. 아내는 2박 3일 입원하고 퇴원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단학선원에 간 어느 날 다른 곳에서 특별훈련이 있다고 했다. 그때 그곳에서 지도하시던 분이 손가락으로 네 손바닥을 살짝 눌렀다. 무언가가 손바닥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날로부터 조금씩 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호흡에 집중하니, 양손바닥 사이에 뻑뻑한 무엇이 느껴졌다. 그렇게 좋아져서 치료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래도 매일 다녔다. 그리고 일기를 적었다. 이렇게 단전호흡과 심리상담을 병행하여 계속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느 날 너무 답답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곳을 찾아갔다. 온산을 뒤져 어렵게 찾았다.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간절히 빌었다. 이런 것이 무슨 소용일까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이종사촌 여동생이 어느 상담소를 소개해주었다. 처음에는 가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은사님 이상의 상담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런 사정도 이유의 하나였다. 그러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남기지 말자 하는 생각에 아내와 둘이서 찾아갔다. 기다리는 중에 이곳저곳을 보니 미국에서 공부하신 분이었다. "가치 명료화"(value clarafication)가 주된 방법임을 알았다. 1시간 내내 내 말만 했다. 몇 마디 얘기만 들었다. 상담만 받고 바로 나왔다. 심리검사를 말했고, '장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내를 붙잡았다. 검사받기를 거부하니, 문제가 심각한 것이라 했다. 그날 그 무렵 예전의 나로 잠깐 돌아왔다. 단호히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구에 있었던 그 기간 동안, 나는 줄곳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잠드는 것도 힘들었고, 잠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려웠다. 잠들었더라도, 오래 자지 못했다. 1-2시간이 지나면 깼다. 깨고나면, 더는 자지 못했다. 또,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계명대 인근에 가서 유머집을 사서 읽어보기도 했다. TV로 게그 프로그램도 재미 있게 보려고 '노력'했다. 그 어느 것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무엇을 보고들어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니 흥미나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가면서, 몸과 마음이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대학 교수 생활을 더는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대학 교수가 된 첫 해였으니, 휴직할 수 없었다. 퇴직밖에 없었다. 아이 둘의 장래가 너무도 몹시 걱정되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아내와 아이들을 돌봐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내는 제쳐두고라도, 우리 아이들, 이제 둘이 된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했다. 걱정과 불쌍함이 앞섰다.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고생하며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맨바닥에서 삶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은사님은 내가 지나치게 아내에게 의존한다고 말씀하셨다. 홀로 뭔가를 할 것을 계획해 보라고 하셨다.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서문시장에 갔다. 장난감을 사주었다. 앞산공원에 가서 놀고 오기도 했다. 그런 나를 스스로 칭찬도 했다.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심하게 세월은 자꾸만 빨리 흘러갔다. 9월 2학기 개학이 임박했다. 은사님은 나 홀로 올라갈 것을 권유하셨다. 실존(existence)에 직면했다. 실존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내와 아이 둘을 처가에 내려놓고, 나 혼자 대구에 올라왔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지어야 했다. 시한은 한 달이다. 이리저리 궁리해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중에 생각해보자고 했다.
내일이면 포천으로 올라가야 한다. 어머니가 같이 올라가자고 하셨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꼈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였다. 그 뒤로 아무리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상황이 거의 2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준비해서 포천으로 올라왔다.
3. 의정부
두달만에 집에 오니, 우편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런저런 일도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을 대비하고자 학교에도 갔다. 잠시 머물러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맥주 2병을 사 가지고 왔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을 먹었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온 맥주를 마셨다. 2병 모두 마시고 자리에 누웠다. 술기운에 취해 전과 달리 쉬이 잠들었다. 그러나 이내 잠에서 깼다. 시계를 봤다. 또 새벽 1시다.
그 전날에도 2시간 가량 밖에 자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운전해서 온 길이 300km를 넘었다. 피로했다. 눈도 아팠다. 그런데도 잠을 한두 시간 밖에 자지 못한 것이다. 할 일은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침이 되기까지 홀로 그 긴 시간을 이리저리 다니며 보내야 했다. 집에 있던 교육학 책을 집어들었다. 그 내용을 수업한다고 가정하고 조금 읽었다. 책을 덮고 그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조금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잠자지 못했고, 집중하지 못했기에, 기억난 것도 잠시 머물다 떠났다. 이대로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절망의 상황이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큰 방에 들어갔다. 오체투지(五體投地)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해 보았다. 이 상태로는 결코 학교에 되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병원에 가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입원을 결심하고, 의정부성모병원에 갔다. 그 날이 1998년 8월 21일이었다. 신경정신과 외래로 진료접수를 했다. 조금 기다리다 어머니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다. 담당 의사가 마음씨 좋은 분 같았다. 50분 가량 상담하면서 신뢰도 쌓였다. 내가 느끼는 증상을 말했다. 담당 의사는 주요우울장애(MDD: major depressive disorder)로 진단했고, 즉각 입원할 것을 권유했다.
입원을 결심하고 간 적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학교였다. 선배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의정부성모병원 신경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다. 어머니가 입원수속을 했고, 나는 병실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보호자 상담을 받고 필요한 물품을 챙기러 집에 가셨다. 그 사이에 나는 병동에서 설문 형태의 몇 가지 심리검사를 받았다. 집에 가신 어머니는 짐을 챙겨 오셨다. 어머니가 오고가시는 그 모습을 멀리서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우리 집은 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에 있었다. 몇 km를 걸어가야 한다. 그 길을 걸어 우리 집에 들어가셔서 짐을 챙겨 오셨을 것이다. 다시 걸어서 우리 집으로 되돌아 가셨을 것이다. 다시 걸어나와 대구로 가셨을 것이다.
그때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을 삼키며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다짐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건강한 몸으로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아이 둘과 재회(再會)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나 자신과의 처절한 약속 같은 것이었다. 나의 입원으로 어머니는 대구에서, 아내와 두 아이는 창녕에서, 나는 이곳 의정부에서 살아야 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아내와 혼인한 후 첫 '다이애스포라'(diaspora, 離散[이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로부터 퇴원한 날까지, 나는 병원에서 시키는대로 다했다. 병원에서 주는 음식을 하나 남김없이 모두 다 먹었다. 이른 아침에 하는 체조 역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대충 하지도 않았다. 간호사들이 주는대로 "항우울제 약물"(antidepressant)을 먹었다. 컴퓨터로 내가 좋아했던 가요도 들었다. 그 밖에 병원에서 실시하는 여러 프로그램도 되도록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노력하고 노력했다. 병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내가 호소했던 증상들 몇 가지가 사라졌다. 조금씩 몸이 나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조금씩 자신감도 되찾아갔다.
학교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어 퇴원해야 했다. 9월 9일이었다. 20일 가량 입원치료를 받은 것이다. 내 몸이 온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당히 나아졌다. 퇴원을 앞두고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어머니가 되돌아왔다. '재회'(再會)의 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이 만남을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했는지 모른다. 학교법인의 모 과장이 아내에게 각별한 마음을 써주었음을 아내가 말해주어 알았다. 학교에 오기 전부터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분이다.
다시 학교에 나갔다. 휴직한 것이 아니니 복직이 아니었다. 잠시 쉬었던 것이다. 학과의 다른 교수들이 양해해 준 것이 고마웠다. 내가 맡은 강의를 선배 교수가 대신해 주었음도 알았다. 학과 교수님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아내가 정성을 다해 식사대접을 했다. 총장께서 묵인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움의 뜻을 전했다. 약물 부작용으로 입마름증이 심했지만, 그런대로 수업을 해낼 수 있었다. 논문을 쓸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교수직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듬 해에 내 책임의 실습실(아동치료실습실)을 실제로 운영하기로 도모했다. 나의 득병과 치료, 그것이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 교육청으로, 시청으로 찾아다녔다. 학교에 사업계획서도 제출했다. 각종 기자재도 제공받았다. 이 사업을 위해 동참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모집했다. 대학원이 없었기에, 학부 학생들을 훈련시켜야 했다. 여러 학생들이 참여해 주었다. 심리검사부터 교육계획 수립까지 '과외로' 가르쳤다.
이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알려졌다. 아이들 한 명, 두 명 왔다. 장애가 있는 이 곳의 아이들도 갈 곳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멀리 서울 강남이나 노원, 또는 의정부까지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해가 갈수록 나름대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약물로 재활에 성공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연구하고 논문쓰는 일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임용에 필요한 연구실적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1999년 겨울방학 동안에 모든 것을 이 작업에 쏟았다. 그 기간 내내 연구실에서 밤새웠다.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왔다. 아내가 끓여준 따뜻한 음식을 먹었다. 우리들만의 '그 음식'을 먹고 나면 속이 풀어지고 잠시나마 쉬고 잠잘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쓴 책이 ≪특수아동과 특수교육≫(1999)이다. 이 책이 있어 연구업적 기준을 충족할 수 있었다. 2000년 3월에 재임용, 4월에 조교수 승진을 했다. 2000년과 특히 2001년에 몇 편의 중요한 논문을 썼다. 2001년에 셋째 아이가 태어났다.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실로 기뻤다. 2002년 3월이 되기까지 그렇게 교수라는 신분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2023년 10월 13일(수)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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