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1] 회상: 혼인전 내 가족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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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h!Story: 사생애(私生涯)

[1] 회상: 혼인전 내 가족의 흑역사

by I'mFreeman 2023. 11. 15.

 

'black'이라 하지 않는 이유: 인종차별의 문제

 

어느 사람/집이라 할것도 없이, 행복만으로 충만한 삶을 산/살고 있는 사람/집은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집들도, 가까이 다가가서 그 삶을 세밀히 살펴 볼 수 있다면, 서로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했던 지난날의 삶이 실재함을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불행한 과거 이야기를 '흑역사'(黑歷史 dark history)라고 한다. 말뜻 그대로 검고 어두웠던 지난날의 삶,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삶을 말한다. 과거에 실재(實在)했고 지금도 기억의 창고 속에 저장되어 있지만 이제는 결코 소환하고 싶지 않은 삶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믿고 싶은 과거의 삶이다. 남에게 알려질까 두려운 삶, 남들이 알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낄만한 삶, 그리하여 남들에게도 알려지기를 원치 않고, 아무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그런 과거사다.
 
    내가 아내와 혼인을 하기 전,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여동생 둘이었다. 이런 우리 가족에게도 숨기고 싶은 흑역사가 있다. 아니, 우리 가족사의 태반이 흑역사다. 태반이 아니다. 좋았던 삶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수면 아래의 빙산만큼이나 큰 흑역사가 우리 가족사를 이루고 있다. 이런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은 아버지라 불리는 '그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의 존재와 행위로 인해, 그가 가고 없는 '지금까지도', 결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불행한 삶을 우리 가족은 살아내야 했고 견뎌내야 했다. 행복은 '순간'이었고 불행은 '기간'이었다. 기쁨의 일보다 슬픔의 일들, 괴로움의 일들, 아픔의 일들로 점철된 삶이다. 그런 우리 가족의 삶을 지우개로 지울 수만 있다면, 몽땅 지우고 싶은 그런 정도의 '흑역사'다. "참 '별(別)난' 흑역사"다.
 
    우리 가족의 삶과 나 자신에 대한 '사실'을, 아내 한 사람을 제외하면,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나와 우리 가족들에게 있었던 일들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허심탄회하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그런 남편,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노력했다. 가난과 폭력의 대물림만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늘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1학년 때 어떤 작업을 같이 한 것으로 인연을 맺은 선배 한 분이 있었다. 내가 그를 따랐고 그 역시 나를 아꼈다. 그로부터 대략 30여 년간 내게 큰 도움을 주었고, 나도 그를 형처럼 크게 의지했다. 그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한 선생, 당신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이름 석자와 대구대 학생이라는 것뿐!"이라고 자주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의 소심하고 과묵했던 본래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어두운 내 삶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픔과 부끄러움과 두려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엉켜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이야기를 '유일하게 들었던' 아내는 나와 결혼함으로써,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그 흑역사의 일원이 되었다. 나와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음에도, 아내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지금까지 나와 함께 했다.
 
    이 별난 흑역사는 모두 그 원인 제공자가 '그'였다. 그는 우리 가족에서 빠졌어야 했다. 가족사진에서 칼로 잘라내는 것처럼, 아예 우리 가족에서 도래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는 우리 삶의 '조연'일 뿐이다. '등장인물 1, 2...'와 같은 존재다. 우리 가족사의 무대에서 조연, 이름없는 등장인물에 불과한 존재지만, 그가 엄마와 우리 4남매의 삶에 끼친 악영향은 지대했다. 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

 
의 휘는 武(자)榮(자)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었다. 그를 낳고 기른 분, 곧 우리 4남매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는 분은 우리가 뵌 적이 없다. 그러니 그 두 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아는 것이라고는, 할아버지의 휘가 永(자)秀(자)라는 것, 화투 그림을 그리며 사셨다는 것 뿐이다. 엄마와 이모들에게 들었을 뿐이다. 어떤 분이었는지, 어떻게 사셨는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할머니는 밀양 박씨고, 德(자)香(자)자를 쓰셨다. 휘의 뜻이 참 좋다. 그 마음씨도 참 곱고 따뜻한 분이었다고 들었다. 장사를 하러 다니셨다고 했다. 우리 곡산한씨 집성촌이 있는 경주에 장사(?)하러 가셨다가 터미널 화장실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에게는 누님, 형님, 동생 각각 한 분의 형제가 있었다. 우리 4남매에게는 고모님, 백부님, 숙부님이다. 고모님은 부자집에 출가하셨고 외모도 말씀도 멋쟁이셨다. 백부님은 경북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또 병무청에 근무하셨다. 숙부님은 청구대(현, 영남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세청에 근무하셨다. 그만 대학을 가지 않았다. 경제적 형편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들이 아주 어릴 적 사진에 보이는 그의 집은 양옥집이었다. 그는 왜 형님이나 동생처럼 대학에서 공부하지 않았을까.
 
    그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한량끼도 있었다. 그림을 잘 그렸고, 시도 잘 썼다. 그의 젊은 시절 노트에서 보았다. 세상 물정에도 밝았다. 외가 식구들과 가족 여행이라도 하게 되면, 사전답사로 조사해 결정했다. 신문에 좋은 글이 있으면 스크랩도 해두었다. 미군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살던 곳 인근에 있던 극장("영진극장")에서 그림도 그렸다. 그는 "모던 보이"였다. "'겉멋'만 잔뜩 든 모던 보이"였다. 남들처럼 성실하게 살지 않았다. 왜 그렇게 살았던 것일까.
 
    10여 년 전에, 이 네 분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슬하에 6남 7녀를 두셨다. 이 사실을 할아버지 재적등본에서 보고 알았다. 그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알고 있던 분 외에 9분이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 9분 중에 6분은 너무도 어릴 때 목숨을 잃었다. 백부[相(자)榮(자)]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알고 있던 백부는 실상 중부(仲父)였던 것이다. 족보에 입보되어 있음을 뒤에 알았다. 결혼도 했지만 머리가 '너무 좋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말들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결국에는 절로 들어갔다고 들었다.
 
    그 위의 고모 한 분은 시집까지 가셨지만 생사를 모른다고 했다. 일본에 가서 사신 고모분도 한 분 계셨다.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전 재산을 고국에 있는 동생들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자연사(自然死)의 가능성보다 자기 살해로 보인다. 그가 이런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면, 그도 어린 시절 남모르는 애환이 있었을 것이다.
 
    그와 그의 두 형제는 고모의 유언대로 각자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백부는 집을 샀고, 숙부는 학비로 썼다. 그는 이 돈을 밑천으로 대구 염매시장에서 장사하기로 했다. 우리 엄마와 결혼한 뒤였다. 누나가 있었고, 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장사에는 애초에 마음이 없었다. 장사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엄마를 주먹과 발, 심지어 연장 같은 것으로 때렸다고 했다. 엄마가 처음 해보는 일, 그것도 '장사'라는 일을 어찌 잘 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이 가게도 그의 노름과 '바람'으로 모두 날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은 부유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때 그는 '빠찡고'(슬롯머신) 하러 다니며 그 귀한 돈을 낭비했다. 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릇된 일을 스스로 벌였다. 그가 엄마, 두 아이와 함께 살던 같은 집, 그 집의 다른 방에서 혼자 살며  '요정'에서 일했던 어느 여인과 야합(野合)한 것이다. 우리 막내 이모에게 발각되었다. '그녀의 '눈'에, 그는 돈 잘 버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생각'에, 그는 돈 많은 부자였을 것이다. 그와 그녀와의 야합은 한때의 '바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때 그 일은 우리 가족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그의 첩(妾)으로 살았다.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낳았다. 나와 두 여동생보다 각각 1살밖에 적지 않다. 그 딸은 누나보다 4살밖에 적지 않다. 그와 그녀 사이의 3남매는 그의 서자(庶子)요, 우리 4남매에게는 이복(異腹)형제였다. 그리고 그 3남매는 호적에 없는 혼외자였다. 법적으로는 '비존재'(非存在), '비인간'(非人間)이었다. 그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되어서야 호적에 입적되었다. 그때 그 일로 우리 집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엄마가 버텨낼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어 그 3남매는 우리 엄마가 낳은 자식인 것처럼 되었다. 
 
    그는 본처인 우리 엄마와 우리 4남매가 살던 우리 집과 그녀와 그녀가 낳은 3남매가 살던 그 집을 오고갔다. 우리 집에 있는 날보다 집을 나가 그 집에 있는 날들이 더 많았다. 생활비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생계를 엄마 홀로 책임져야 했다. 가끔 우리 집에 와서는 돈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렸다. 이모가 엄마에게 준 돈을 뜯어갔다. 서울에 사시던 숙부의 도움으로 친구분과 동업했던 메리야스 공장도 화투 노름 밑천과 술값으로 모두 날렸다. 그때마다 돈 달라고 엄마를 겁박하고 행패를 부렸다.
 
    그는 우리 할아버지의 남은 자식 중 둘째 아들이자 5촌 당숙어른의 양자이기도 했다. 족보에 기록된대로 손절(孫絶), 곧 아들이 없어 대가 끊어져 그를 계자(係子)로 삼은 것이다. 그의 당숙어른이 돌아가시고 홀로 된 당숙모도 연세가 많아지셨다. 그때 우리 가족은 남산동을 떠나 칠성동에 있던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제 살 집에 대한 걱정은 없어졌다. 이 집에서 산다는 것은 '묵시적 계약'과 같은 것이다. 그가 당숙모 사후 장례를 치루고 기제사를 모시는 대신에, 그 분의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조건이 붙은 계약이라고 할 것이다.
 
    그 할머니 집은 경명여고 담벼락 아래에 있던 몇 집 중 제일 안쪽에 있었다. 난민촌과 같은 곳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1층에서 사다리로 올라가면 2층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살았다. 그 할머니는 칠성시장에서 노전장사를 하셨다. 점심 드시러 집에 오셨다가 되돌아가실 때, 가끔 과자 같은 것을 내게 주시곤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 할머니께서 몸져 누우셨고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 집에 장례사가 오셔서 염하는 등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일은 순전히 우리 엄마의 몫이었다.
 

우리 엄마, 엄마와의 이별

 
우리 엄마는 인천 이씨다. 富(자)美(자) 쓰신다. 우리 엄마의 아버지, 곧 우리 외할아버지의 휘는 東(자)煥(자)다.  외할머니는 창녕 조씨다. 휘는 봉(자)금(자)다. 본래 김천에서 사셨다. 그곳에 선산도 있었다. 비교적 부유하게 사셨다. 우리 4남매는 외할아버지를 뵙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뵙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억에 없을 뿐이다. 외할머니와 내가 함께 있는 옛 사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위로 언니 세 분,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 각 한 분이 계신다. 우리에게 이모 네 분과 외숙 한 분이 계신 것이다. 지금은 둘째 이모님과 막내 이모님 두 분만 살아 계신다.
 
    둘째 이모님은 부유하게 사셨다. 이모부님이 일본에서 사시면서 배운 철공일 기술이 좋아 돈을 많이 버셨다. 이모님은 우리 엄마를 많이 도와 주셨다. 이모님댁에 얹혀 살기도 했다. 그때 내게 장난감이 참 많았다. 이모를 "엄미야"라고 불렀다. 엄마는 매일 일하러 가야 했다. 그래서 이모를 엄마로 알았던 것이다. 요즘도 가끔 아내에게 전화로 내 안부를 먼저 물어보신다. 정말 죄송하다.

우리 친할머니께서 경주에서 돌아가셨을 때도 이모님께서 도와주셨다. 그때 택시 운전을 하던 시동생에게 부탁해서 택시로 이모부님과 그가 경주에 가서 할머니 시신을 대구까지 모셔 왔다. 장례도 이모네 소유의 집 앞 공터에서 치렀다고 했다. 우리 외가에서 할머니 장례의 거의 모든 것을 도운 것이다.

 
    우리 엄마는 처녀 시절 일찍이 재봉일 배워 재봉사로 일했다. 새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면, 일해 번 돈으로 동생, 조카들과 영화 보러 다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름 뒷 글자대로 미인이셨다. 농담 같은 것도 잘했다.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많은 남자들이 눈독을 들였다고 했다. 그런 우리 엄마가 논둑길 건너에 살던 그를 만나고 그와 결혼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망쳐버린 것이다. 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둘째 이모님께서 학원비를 대주셔서 정식으로 양장을 배웠다. 그 배움도 한 달만에 끝났다. 칠성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살길이 막막했던 엄마는 그 동네에서 큰 이모와 함께 고구마 장사를 했다. 장사가 신통치 않아 며칠 가지 못했다. 일본에 수출하는 일감을 받아와 집에서 일하기도 했다. 인형 거죽 속을 짜투리 천들을 집어넣어 가득채우는 단순한 일이었다. 우리도 같이 했다. 이러저러한 노력에도 살 갈이 막막했던 엄마는 동사무소에 가서 도움을 청했다. 때때로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오면, 국수, 라면, 쌀 같은 것을 받으러 가야 했다. 이런 곤궁한 사정에도 그의 악행은 멈추지 않았다. 집에 TV가 한 대 있었다. 다리 있고 문 열어 보던 그런 TV다. 어느 날 집에 와서 엄마와 다투고 그것마저 빼앗아 갔다. 그 첩이 술과 매운탕 팔며 살던 그 곳으로 가져간 것이다.
    
    칠성동의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칠성동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우리 엄마가 그 날 저녁에, 여러 음식을 마련하고 우리 4남매와 밥을 먹으면서 말씀하셨다. 그와 협의이혼하기로 합의했으니 앞으로 그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최후의 만찬! 그 날이 마침내 그렇게 오고야 만 것이었다. 우리도 모르게 그와의 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엄마는 우리 4남매를 그 집에서 자기가 키울테니, 그 집에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에게 말하셨다. 그는 그 집이 자신에게 상속된 것이니 그 집을 넘겨줄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그가 그 집을 갖겠다면, 우리 4남매도 책임지라고 하셨다. 엄마가 이렇게 말한 것은 속셈이 있어서였다. 우리 4남매에 대한 부양의무 때문에라도 모두 포기하고 자기 갈 길을 가리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그 허름한 집을 이미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앞뒤 재보지도 않고 엄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 집과 우리 4남매 부양이 모두 그의 차지가 되고 이혼절차가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들을 그날 엄마가 우리에게 알린 것이었다.
 
    우리 엄마와 결혼한 그 사람, 남편이라 불리는 그는 남편'다운' 남편이 아니었다. 우리 4남매를 낳게 한 그 사람,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결코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아니었다. 노름으로, 외도로, 게으름과 경제적 무능으로, 폭언과 폭행으로 엄마에게 온갖 모질고 나쁜 짓을 다했다. 그런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엄마, 누나, 여동생 둘과 나는 가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삶, 온갖 시련과 고난으로 충만한 삶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겪으며 살아야 했다. 이런 일들을 견디고, 견디며, 살아'내'던 엄마는 결국 그를 버린 것이다. 
 

사남매, 낯설고 새로운 삶의 시작

 
삭제되어야 마땅한 그가 삭제되지 않고 그 대신으로 우리 엄마가 그를 떠난 것이다. 우리 엄마는 한시도 우리를 잊은 적이 없다. 반찬이며, 옷이며, 용돈, 학비까지 거의 대부분을 엄마가 책임져야 했다. 엄마가 그를 버림으로써 우리 4남매와 쓰디쓴 이별을 해야 했지만, 우리들마저 버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를 버린 엄마의 결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몸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늘 우리와 함께 했다고 믿는다.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길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 고생이 참으로 극심했을 것이다. 엄마가 떠나고 그와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가족이란 엄마, 누나, 두 여동생과 나까지 다섯이었다.   
 
    엄마없이 그와 '같이' 살게 된 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1978년의 일이다. 선천성 심장병이 있던 누나와 나, 그리고 어린 여동생 둘, 4남매가 그에게 남겨졌다. 우리는 그가 구해 놓은 '셋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칸방에 부엌, 그리고 조그만 가게로 삼을 수 있는 공간이 딸린 곳이었다. 그 이튿날 저녁 무렵에, 우리는 그가 배운 간판 제작업을 그의 친구 소유의 건물 옥상에서 하게 되었다는 희망적인 말을 들었다. 또, 그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털이'라는 절망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칠성동의 그 귀한 집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 집을 팔고 받은 돈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아마도 그 돈으로 빚갚고 남은 돈으로 그 '셋집'을 얻었을 것이다.
 
    그날로부터 우리 4남매는 각기 다른 기간 동안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가난과 가출의 삶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가족들이 함께 기억하고 공유하는 흑역사가 있을 것이다. 또, 각자의 흑역사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산 58개 성상의 장구한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기에 앞서,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경험한 우리 가족의 흑역사, 그 대강을 지금 여기에 적어본다. 지금까지 가족 밖의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적는다는 것, 이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몇날 며칠을 이 생각에 매달렸다. 그동안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리가 무겁고 복잡해졌다. 가슴도 두근거렸다. 불유쾌한 감정까지 일어나 끼어드니 혼란스러움이 가중되었다. 기억력이 하루가 다르게 쇠퇴해가는 초로(初老)의 나이인 지금에 와서, 메모나 일기 같은 기록도 없이 오래 전의 일을 그 기억창고에서 끄집어내기도 쉽지 않았다. 몸상태까지 좋지 않아 머리 속 생각도 잘 정리되지 않았다. 하여간 발분(發憤)하여 엄마와 우리 4남매가 겪은 불행한 삶의 역사를 에피소드로, 편린으로나마 여기에 적어 기록한다.
 
    누나나보다 3살 위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어릴 때부터 외모도, 마음씨도 그리고 특히 문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누나 선생님이 남자 아이들에게 압수한 딱지/카드를 누구에게 주며 동생에게 주라고 하신 일도 있다. '그'와 살던 그 동네에 누나 또래의 여러 형들이 누나를 참으로 좋아했다. 그들이 놓고간 선물을 내가 되돌려주려 간 날이 많았다.
 
    선천성 심장병(판막증)으로 아픈 누나를 '그'가 너무도 심하게 때린 날들이 참 많았다. 우리, 아니 나는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했다. 엄마가 우리 4남매를 만나러 온 어느 날에도, '그'는 누나를 몹시 심하게 때렸다. 엄마는 주인집에 숨어서 그 모든 것을 소리로 들어야 했다. 젖먹이 때에도 누나를 데려가서 엄마를 애타게 만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엄마와 이모들이 말씀하셨다. 병으로 얼굴이 점점 검은 빛을 띠면서 고운 누나 얼굴도 많이 달라졌다. 흰 눈 내리던 어느 날 쓰레기를 버리려고 쓰레기를 차에 올리다가 쓰러진 날도 잊지 못한다.
 
   그런 누나도 '그'의 악행을 더는 참아낼 수 없었다. 집을 나가 '그'의 친구네로 갔다. 그 집 딸이 누나 친구이기도 했다. 얼마 있다가 엄마에게 갔다. 어느 날 나에게 의료보험증을 가져와 달라고 했다. 그가 두려워 나는 화답하지 못했다. 비겁한 나는 돌아가는 누나의 처진 어깨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겨울날, 누나가 엄마와 같이 왔다. 살든 죽든 수술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보호자로서 '그'가 필요해서 온 것이었다.
 
    이런저런 도움을 받아 동산병원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열였다. 하지만 결과는 죽음이었다. 이미 때를 놓친 것이었다. 이른바 골든타임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흘러가버린 뒤였던 것이다. 그 수많은 세월 동안 그는 누나의 병에 무심했다. 세 동생의 엄마 같은 누나, 내게는 지지자와 같은 누나는 그렇게 일찍, 너무도 일찍 우리들 곁을 떠났다. 누나가 가진 재능을 꽃피워보기도 전에...
 
    누나는 화장되었다. 누나의 마지막으로 나들이 간 곳이라고 그가 '생각'한 그곳에 뿌려졌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함께 한 그 나들이를 나는 함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딘지를 몰랐다. 내가 득병하고 회복한 어느 해 어느 날, 엄마와 두 여동생,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한번 찾아간 적이 있다. 대구에서 하양으로 가는 길, 그 오른 편 개천의 어느 곳이었다. 지금도 그 정확한 장소를 모르기에 찾아가지 못한다. 어찌해서 찾아간들, 그곳에 누나는 없다. 이제 누나는 내 가슴 속에만 있다. 누나는 죽음으로써 '그'를 버렸다.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정도에서 탈선한 것이다. 학교에 낼 돈이 없어서 중학교를 1년도 다니지 못했다. 처음은 이웃에 사는 친구와 함께 호기심으로 나이트클럽에 갔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이 사실을 내가 제일 먼저 알고 타일렀다. 소용이 없었다. 학교 다닐 시기에 학교도 가지 못하는 사춘기 여자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집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집에서 나가 한참만에 돌아오는 일이 조금씩 많아졌다. 그동안 어디에서 누구와 있다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4남매 중에서 구김살없이 제일 밝았다. 보통 가정의 딸과 같았다. 귀엽고 예쁜 것을 좋아했고, 엄마가 준 용돈으로 그런 것을 사모으는 걸 좋아했다. 토마토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토마토를 즐기지 않는다. 엄마에게 용돈이라도 받는 날이면, 뽑기 같은 것을 해서 이내 다 써버렸다. 그를 가장 많이 닮아 그가 제일 좋아한 자식이었다. 어느 날 그가 이 동생에게 돈을 주며 쌀 2되를 사오라고 했다. 이 동생에게 조금의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2되 살 돈을 받고 1되 반만 사온 것이다. 그가 모르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그는 동생을 심하게 때렸다. 나는 말리지 못했다. 그냥 보고만 있었다. 동생이 원망스러웠다. 몇 푼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이런 상황을 초래한 동생이 미웠다. 하지만 동생에 대한 미움도 잠깐이었고 그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커졌다. 이 일을 전후로 동생이 탈선했다. 영영 집에서 '나온' 것이다. 엄마와 어쩌다 연락이 닿아 만났을 때, 엄마는 이런저런 대책으로 동생이 제자리를 찾게 하려고 노력했다. 때론 심한 질책도 하고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수고와 노력은 무위가 되었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 약목, 왜관 등에서 '다방일'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동생은 '탈선과 비행'으로 그를 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한참 밀린 월세와 막내 동생뿐이었다. 이 동생은 재작년 10월 심부전으로 사망하여 고인(故人)이 되었다. 2019년 어느 날 제 스스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내게 언약했다. 나도 그런 동생을 응원하고 지지했다. 조금씩 어린 시절 그 모습을 되찾아가던 중이었다.
 
    엄마, 막내 동생, 나를 참으로 힘들게 했던 그 동생도 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났다.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으니, 누나와 마찬가지로 화장했다.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부부로 함께 산 매제의 뜻에 따라, 엄마가 다니던 팔공산 도림사 옆에 있는 납골당에 봉안했다. 이 동생이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연락을 완전히 끊고 지낸 기간도 많았고, 어쩌다 만나도 손님처럼 왔다가 갔다.
 
    막내 여동생은 중학교 다니던 어느 때, 그를 버렸다. 엄마가 살던 곳 인근에 셋방 하나 몰래 얻어 두 동생이 함께 살도록 했다. 그러나 막내 동생만 그곳에서 살 때가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막내 동생이 몹시 아팠던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 언니가 집에 갔다 발견하고 곽병원에 입원시켰다. 뇌수막염이란 병에 걸린 것이다. 그때 연휴 중임에도, 나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죄책감에  입원기간 동안 내내 병상을 지켰다. 문제는 치료비였다. 치료비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엄마가 이번에도 이곳저곳 도움받을 곳을 알아보고 병원에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담당의사가 막내 동생을 치료할 때 쓰는 수액을 약국에서 사서 가져오라고 했다. 치료비가 크게 절감되었다. 아무튼 퇴원할 수 있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이 아는 분의 도움을 받아 상인동에 방을 구하고 막내 동생을 데려갔다. 그곳에서도 막내 동생 혼자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막내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뒤에 나는 막내 동생이 살던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친구일을 도우며 돈도 벌었다. 앞에서 말한 그 선배분과 한 친구가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 얼마 뒤 엄마가 영구임대주택 청약하여 우리 둘은 월성동 주공아파트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막내 동생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다.
 
    내가 대학원 2학기 때 사귄 아내와 1993년에 결혼하고 막내 동생이랑 셋이서 몇 개월 살았다. 그러다 막내 여동생이 언니가 같이 살자 한다고 하면서 봉덕동에 집을 구해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았다. 나이 차가 너무 많고 하는 일 때문에 말리고 싶었지만, 엄마의 강력한 권고도 있어 그러지 못했다. 결국 막내 동생은 그와 결혼하기로 했다. 마음씨와 돈 잘 버는 것을 보고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동생이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시작한 사업이 코로나19 때문에 실패했다. 남편이 유산으로 받은 땅을 팔고 받은 돈까지 주식에 투자해서 몹시 궁하다. 그것보다 연령 차로 인한 가치관의 차이 등으로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이제는 봉합하기 어려운 두 사람 간의 관계가 더 큰 걱정이다. 내 동생은 아들 둘과 딸 하나 낳고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잘 살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떻게든 잘 살기만 바랄 뿐이다.
 
    이렇게 우리 가족 5명은 시간차를 두고 차례대로 그를 버렸다. 그를 버린 것은 오로지 그의 언행 때문이었다. 양심의 가책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모두 대구에 살면서도 사는 곳이 각각 달랐다. 여러 차례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있었다. 우리 가족의 삶은 '다이애스포라'(diaspora, 離散[이산]), 이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와 '나'의 재회 그리고 영원한 이별

 
그렇게 우리 가족 모두 그를 버리고 떠났다. 그만 남은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를 찾거나 만나지 않았다. 병역문제로 내가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때도 간판 제작업을 하며 혼자 살았다. 그 뒤 그의 삶은 모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에 갔을 때 둘째 이모님 댁에 갔다. 이모부님이 두류공원에서 몇 번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노숙자가 되었다고 하셨다.
 
    또 시간이 흘렀다. 나의 병 때문에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매주 다닌 적이 있다. 완전한 치료를 기도했다. 어느 날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듣고 '그'를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남긴 일기에서 보았던 한 문장도 기여했다. "'연민의 정'을 느낀다." 어떻게해서 연락처를 알아냈다. 양주 한 병 들고 고령에서 그를 만났다. 도로를 건설하는 현장이었다. 누나 말대로였다. '그'는 "불쌍한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내가 맹세했던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복수했다. 그리고 용서하기로 했다.
 
    그때 그는 그의 첩인 '그녀'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시내에서 다시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갈치조림을 잘하는 식당에서다. 이복동생들도 함께 했다. 그 집에 우리도 가고, 엄마 집에 그 동생들도 왔다. 몇 차례 그렇게 만났다. 그 동생 결혼식에도 갔다. 그리고 백부댁 사촌 동생 결혼식에는 그와 나만 갔다. 모두 헤어지고 둘이서 한참 걸었다. 그리고 성서의 어느 식당에서 엄마와도 만나게 해주었다. 우리 가족들도 함께 했다. 한번으로 끝났다. 그 뒤에 우리 집으로 한 번 초대했다. 아이들 돌반지 셋을 가지고 왔다. 학교에 가서 연구실도 구경시켜 드렸다. 아내가 잘 대접해 드렸다.
 
    그 뒤 세월이 무심하게 한참 흘렀다. 어느 날 부음이 전해졌다. 곧장 내려갔다. 이복동생이 자기가 상주를 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행위야 괘심했지만 그렇게 따라주었다. 조의금으로 100만원을 냈다. 상'주'가 아니라 문상'객'이 된 것이다. 주인이어야 마땅함에도 손님이 된 것이다. 내가 나오는데 '그녀'가 따라나와 내게 "민아,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이승을 떠났다. 장례 후에 대구시립납골당에 모셨다는 연락이 왔다. 한두번 찾아갔다.
 
    그것으로 악연이 거의 다 끝났다. 가족관계부의 정리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우리 엄마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연락처를 찾아냈다. 전화로 내 뜻을 말했다. 욕설과 나쁜 말들이 돌아왔다. 그 동생의 누나가 그 다음날 내게 연락했다. 내 뜻을 따르겠다 했다. 그 쪽이 소송했기에, 그 동생들이 원고, 우리 엄마가 피고가 되었다. 유전자검사를 했다. 친생자관계부존재로 판결났다. 얼마 뒤에 가족관계부에서 그들 셋이 사라졌다. 우리 가족관계부에서 이제 생존자는 3명으로 줄었다. 그 동생이 고맙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다 했다. 정리하고 보니 정말 잘한 것이라 했다. 실제 제 엄마와 법적 엄마가 다른 이중 존재로 50년 쯤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도 이 일은 좋은 일이다. 내게는 말이 필요없는 일이다. 이것을 끝으로, '그'로 인한 모든 것이 청산되었다. 이제  나의 삶에 대한 나의 이야기만 남았다.


2023년 10월 12일(목)
ⓒ H.M. Han


[노트] 소방관처럼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있는 사람에게 그 마음의 외상(trauma)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그 상황/일들을 담담히 글로 적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한 권의 책에 있는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겪은 어두운 삶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볼 생각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까닭 중의 하나다. 옛 일들을 매듭짓고 온전히 잊기 위함이었다. 지금의 삶을 좀 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됨과 더 충실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글을 쓰는 동안은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이런 소박한 기대는 빗나가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려고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더듬어가는 것도, 그 기억을 글로 적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너무 아팠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만둘 생각도 했다.
 
우리 가족의 참으로 유별한 흑역사를 모두 적지는 못할 것이다. 그럿 탓에 이 글은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생략되었기에, 초고(草稿)로 남겨둔다. 하여간에 오늘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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