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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h!Story: 사생애(私生涯)

[2] 1985년, 대학생이 되다

by I'mFreeman 2023. 11. 16.

1984년 초 독서실에 들어갔다. 내가 졸업한 명덕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곳이었다. 우리 엄마는 우리 집이 내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셨다. 실로 그러했다. 독서실 입실을 차선책으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분홍 빛깔의 포근한 이불 한 채와 함께 한 달치 독서실비와 용돈을 주셨다. 그로부터 11월 학력고사 시험일 바로 전날까지, 그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숙식과 세면까지 모두 해결했다. 밥과 반찬은 엄마가 학교나 독서실로 가져다 주셨다.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잠자고, 일어나, 씻고, 걸어서 학교에 갔다. 학교의 야간자습 시간이 끝나면, 다시 걸어서 독서실에 되돌아왔다.
 
    독서실 생활 초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생활에 익숙해지고, 새로 친구를 사귀고, 친한 학교 친구가 새로 들어오면서, 공부에 소홀히 했다. 그 시절 엄마의 기대만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밤에는 독서실 친구들, 형들과 함께 그 인근에 있던 생맥주집에 가는 날도 더러 있었다. 시험일이 가까워질수록 잦아졌다. 다방에도 들락거렸다. 여자아이들과도 어울렸다. 엄마가 바느질로 어렵게 벌어 내게 준 그 귀한 용돈을 헛되이 썼다. 지금 돌이켜보니, 내 나름의 방황이요 탈선이었다. 이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다만, 엄마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학력고사 시험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시험장은 내가 다니던 능인고등학교였다. 독서실에서 걸어가도 되는 곳이다. 시험일 전날이 되자 독서실 식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밤늦도록 마무리 공부를 하고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그'가 나를 깨우러 왔다. 이불에서 나와 씻고 시험보러 학교에 갔다. 시험이 모두 끝났다. 시험을 잘 본 것 같았다. 교문을 나서니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짜장면을 사주셨다. 그리고 수고했다는 말씀과 함께 용돈을 주시고 곧 되돌아가셨다. 다음 날 가채점을 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못미침을 알게 되었다. 당혹스럽고 걱정이 앞섰다.
 
    12월 중순 학력고사 점수가 발표되었다. 대부분 20점 만점을 받는 체력장에서 2점을 까먹었다. 체력장 점수를 더하여 242점! 3학년 첫 모의고사 성적 거의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내가 가고자 했던 경북대학교 회계학과 입학은 가능한 점수였다. 그 날 뒤 어느 날 그가 술에 취해 귀가했다. 우리가 엄마를 만난 것을 빌미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어린 시절부터 내 기억 속의 그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한 동안 집을 비운 기간을 제외하면. 그날 나는 집에서 완전히 나왔다. 가출(家出), 아니 '출가'(出家)로서 나는 그를 버렸다. 훗날 복수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집을 나왔다.
 
    집을 나왔지만 갈 곳은 없었다. 친가, 외가 모두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데려갈 사람도, 내가 찾아갈 곳도 없었다. 정처없이, 하릴없이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이런 일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수없이 되풀이된 것이어서 내게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어찌할 수 없어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그때 며칠 고향에 가서 비어 있는 어느 분의 방에 나를 거하게 했다. 그곳에서 이틀을 지내면서 입학원서를 써야 했다. 지금과 달리, 한 곳의 대학에만 지원할 수 있었고 그 대학에 속한 세 학과에 지망할 수 있었다. 나는 가정형편상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에 입학해야만 했다. 다행스럽게, 경북대학교 회계학과는 내 점수로 합격권 내에 있었고, 또 회계학은 내가 3학년 때 결정한 진로였다. 그리하여 경북대학교 회계학과를 1지망으로, 농경제학과를 2지망으로, 사학과(?)를 3지망으로 하여 입학원서를 냈다.
 
    엄마는 이종 사촌누이가 시집가 살고 있던 시지동의 어느 집 방 한 칸을 빌렸다. 시내에서 1번 버스를 타고 가다 노변에 있는 마을 정류장에 내려 7, 800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그 길은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폭 좁은 긴 방이었다. 엄마와 이종 누나 그리고 자형과 함께 도배했다. 갈 곳 없던 나는 그 낯선 곳에서 첫 날을 보내며 안도했다. 여기서 한달 보름 정도 보냈다. 이 시절 에피소드 둘을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1번 버스 노선을 따라 걸어서 그곳까지 갔다. 울적한 마음도 달래고 버스비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또 하루는 버스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는데 어느 여자분이 혼자 가기 무섭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경북대학교에 원서 냈다고 말하니, 그 누나는 자기도 경북대학교에 다닌다고 하며 내 점수면 합격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경북대학교 입학전형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 기다리는 동안 몇몇 학생이 자기 점수를 알려주며 내 점수를 물어보았다. 학력고사 점수는 내가 높았고, 내신점수는 내가 낮았다. 그들이 나보다 1점이나 2점 더 높았다. 불합격을 직감했다. 면접시험보러 연구실에 들어갔다. 면접하신 교수님께서 내게 뭘 물어보셨는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합격하면 열심히 공부하고, 합격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여태까지 내 기억창고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앞선 나의 직감을 확정하는 말씀처럼 들렸다.
 
    드디어 최종 합격자 발표일이 되었다. 그 날도 엄마와 단 둘이 경북대학교에 갔다. 회계학과, 농경제학과, 사학과, 어느 합격자 명단 어디에도 내 수험번호가 없었다. 두번 세번을 봐도 보이지 않았다. 경북대학교 입학이 불허된 것이다.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엄마에게 죄송했다. 앞날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재수하여 재도전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교문에 이르니 학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뭔가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한 번 실수 병가지상사"라는 말만 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착잡했다.
 
   엄마가 부근에 아는 분이 있다며 기분 전환도 할 겸 가보자고 하셨다. 어느 학교 교장 선생님 따님이라고 하셨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는 그저 듣기만 할 뿐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엄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에 그 분이 대구대학교에 특수교육과가 있고, 취업도 잘 되고 전망이 좋다고 했다. 입학원서를 내볼 것을 권유했다.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만 약 18년 살았다. 대구대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얼마 전에 동아리 친구들과의 모임이 그곳에서 있어 한 번 가보았을 뿐이었다. 특수교육과가 무엇인지, 무엇을 배우는 곳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시지동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 권유에 따라 신입생을 후기에 선발하는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입학원서를 써서 학교에 가니, 같은 반 한 친구가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특수교육과에 원서를 낸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말했다.
 
    엄마와 같이 반월당 사거리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건물에 갔다. 나를 공부시키려고 든 교육보험이 만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령한 돈이 100만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대구대학교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입학성적우수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등록금의 절반 정도 되는 수업료를 면제받았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엄마에게 전화로 알렸다. 기뻐하셨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마음의 다른 편에는, 이번 등록금 내고 남은 돈으로 7개 학기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란했다.
 
    1985년 그 해 1월 설날을 엄마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 엄마가 내게 말씀하셨다. 서울에 사시는 숙부께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하라 하셨다. 그가 늘상 한 말이 있다. "민이 대학공부는 내[숙부]가 책임진다."고 숙부가 말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의 요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했던 그 말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용기를 냈다. 서울 올라가던 날 동대구역에서 잡지 한 권(다이제스트)을 구입해 읽으며 갔다. 지금도 갖고 있다.
 
    홀로 서울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거대한 고층건물이 내 눈에 들어와 나를 압도했다. 문화적 충격이었다. 공중전화로 숙부댁에 서울에 왔음을 알렸다. 얼마 뒤에 숙모님이 데리러 오셨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성내역에 내려 장미아파트에 있던 숙부댁에 들어갔다. 너무도 넓고 좋았다. 국세청에 근무하시는 숙부께서 퇴근하고 귀가하셨다. 서울에 온 이유를 말씀드렸다. 장학금 받은 사실은 말씀드리지 않았다. 특별한 말씀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숙부의 서재에서 잠을 청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숙부께서는 벌써 출근하신 모양이다.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누워 있었다. 어떤 소리가 들려 왔다. 숙모님이 대구 고모님과 전화로 하시던 말씀이 간간이 들렸다. 고모님의 말씀은 들을 수 없었지만, 희미하게 들렸던 숙모님의 말씀으로 상황을 대략 알 수 있었다. "없는 집에 무슨 대학이냐."는 것이 요점이다. 내게는 따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서울역에 데려다 주셨다. 뭔가를 주셨다. 돈이다. 2만원이다. 서울을 오가는데 든 비용 정도의 돈이다. 참으로 서러웠다.
 
    기차에 올라서야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바, 이 일도 그가 그동안 숙부님을 돈 문제로 괴롭힌 결과일 것이다. 기차에서 내 앞자리에 앉은 젊은 분이 내게 물었다. 자기는 부산에 가는데 어디 가느냐고 했다. 대구에 간다고 짧게 대답했다. 이런저런 말을 하시고 나는 듣기만 했다. 고등학생인 내게 맥주 한 잔을 주셨다. 안주 겸 요기하라고 계란도 하나 주셨다. 참 고마웠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남에게, 각자 갈 길 가고나면 다시 볼 가능성이 희박한 남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 그 분이 피를 함께 나눈 분보다 더 고마웠다. "멀리 있는 친척이 이웃보다 못하다."는 말처럼, 이때의 경험은 혈육이 남보다 더 못할 수 있음을 처음 알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이 끝난 뒤 서문시장에 갔다. 엄마가 점퍼를 사주셨다. 이 옷을 참 오래 입고 다녔다. 그 뒤 엄마가 있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또 얼마의 날들이 지나 내 짐을 가지러 시지동에 갔다. 도둑이 들어 내 짐이 없어졌다고 했다. 이웃에 이종 누이도 살고 있었기에,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20여일 방을 비워두었으니, 달리 어찌할 수도 없었다. 책이며, 옷이며, 사진들, 고등학교 졸업장과 앨범, 심지어 볼펜 하나까지 모두 잃었다.
 

T=단과대학, 71=학과, 85=입학년도, ***(*)=고유번호(입학할 때 3자리, 졸업할 때 4자리!


    1985년 3월 드디어 대구대학교에 입학하여 특수교육과 학생이 되었다. 이때까지 내가 '길들였던' 모든 것을 잃어 아무것도 없이, 맨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에 대한 분노와 남은 두 여동생에 대한 걱정 등의 생각이나 감정과 그 표현은 당분간 유예하고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오직 학교공부에만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던 것이다.
 

2023년 10월 11일(수)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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