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진 '시간'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시간이란 것이 없다면,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다하면, 육신의 탈을 벗은 몸만 남는다. 시간은 공물(共物)이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서로 공유하는 그 시간은 사람들 각자 자기만의 시간이기도 하다. 나만의 시간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시간의 소유일 뿐이다. 태어난 때와 죽은 때 그 '사이'를 살아가는 것을 생물(生物)이라 하는 것이다. '시간'(時間 time)이란 단어는 "때 사이"다. 때와 때 '사이'인 것이다.
또,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그 시간을 삼차원의 '공간'에 거하여 살아간다.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이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공간이 있는 것이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고, 별과 구름이 있다. 땅에는 흙이 있고 물이 있다. 산과 들도 있고, 강도 있고 바다도 있다. 강과 바다에 섬도 있다. 그 공간에서 풀과 나무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들짐승도 살고, 날짐승도 살고, 물고기도 산다. 그 공간에서 땅을 딛고 사람들도 살아간다. 자연의 공간에 사람들은 집을 지어 그 속에서 산다. 물과 물 사이에 다리를 놓아 오가며 산다. 사람을 비롯하여 온갖 생물들이 공간이란 터전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공간'(空間 space)이란 말 그대로 "빔의 사이"다. 빔과 빔의 '사이'인 것이다.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공기와 음식을 마시고 먹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그 공간에 지은 집에서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감이 인생(人生), 곧 사람의 삶이다. 사람의 살아감이 삶이다. 삶이란 곧 사람의 살아감이다. 사람이란 말과 어원이 같은 것이다. 사람은 고립된 섬(island)이 아니다. 사람은 대륙(continent)의 일부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라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남들과 함께 살아간다. 남들과 시간을 함께 하여 살기도 하고, 공간을 공유하여 살기도 한다. 남들과 관계를 맺고 산다. 그 관계를 유지해가며 산다. '인간'(人間 person)이란 말은 곧 "사람 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사차원이 아니라, 오차원, 육차원, 칠차원에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시간과 또는 공간을 함께 하는 남들과 함께,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남들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관계,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곧 "소통"인 것이다. 소통의 "과정"인 것이다. 소통이란 내가 내가 아닌 남들과 어떤 뜻을 주고받는 것이다. 남들에게 내 생각을 말로 하고, 남들의 생각을 귀로 듣는 것이다. 남들에게 내 생각을 쪽지나 메모나 편지로 글을 써서 전하기도 한다. 또, 남들이 자기 생각을 적어 내게 준 글을 읽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몸짓도 하고, 어떤 자세도 취하고, 얼굴로 정을 표하기도 한다.
이런 상호교섭의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라고 할것도 없이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살고 싶어 한다. 남들을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지속하며 발전시키고 싶어 한다. '사이 좋음'이란 곧 남들과의 좋은 '관계'의 형성이다. 그 관계의 유지다. 나아가 그 관계의 발전이다. 하여 우리는 예절을 배우고, 매너를 배우고, 에티켓을 배운다. 이런 것들을 배워 알고 있어야 한다. 앎에서 그치지 않고 행하여야 한다. 그 행함은 때에 맞아야 하고, 장소에 적절해야 하고, 상대와 맞는 것이어야 한다. 시기(timing)와 상황(situation)과 사람(person), 이 '사이 셋'에 알맞게 행해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남들과의 '사이좋은' 관계의 형성과 유지와 발전에는 앎이 있어야 하고 시중(時中), 곧 때에 맞는 행함의 앎이 있어야 한다. 앎과 배움에 대한 공자 말씀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할 줄 앎, 배워서 할 줄 앎, 겪고나서 배워 할 줄 앎, 이 셋을 말했다. 남들과의 사이좋은 관계에 필요한 앎은 배워서 할 줄 앎이다. 생텍쥐뻬리는 ≪어린 왕자≫에서 말했다. 관계함을 '길들임'이라고 했다. 그 길들임에는 기다림, 인내심,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나와 남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남들과의 관계와 소통은 남들[의 행동]을 보고 남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또, 내가 남들에게 말을 하는 것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봄, 들음, 말함이 관계의 시작인 셈이다. 우리가 남들과 남들의 행동을 본다는 것은 눈이란 시각기관의 작용으로 단순히 보는 것[see]일 수도 있고, 마음으로 세밀히 따져 보는 것[look]일 수도 있다. 듣는다는 것도 귀로 그냥 듣는 것[hear]일 수도 있고, 귀를 기울여 마음으로 생각하며 듣는 것[listen]일 수도 있다. 말한다는 것은 외부 자극에 의해서든 스스로에 의해서든 보고들은 것에 의해 마음에 생긴 생각이나 감정을 입으로 남에게 전하는 것이다. 모두 감각기관과 뇌의 기능/작용이 없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행동들이다.
남들과 사회 친화적 행동(prosocial behavior)을 하는데는 단순 보기(see)나 단순 듣기(hear), 곧 출생함과 동시에 또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 할 줄 아는 것,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관찰(look/observe)과 경청(listen)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행동들은 배워야 할 줄 아는 것이다. 어떤 시련이나 어려움을 겪고서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것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게 되는 것처럼, 몸으로 경험해 보아야 할 줄 아는 것들이다. 이와 같이 사회 친화적 행동은 배움과 체험을 통해 학습한 행동(learned behavior)이다. 유전의 힘도 아니고, 선천적인 것도 아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누구나 배우면 알 수 있는 것,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예전과 달리, 오늘날에는 이런 행동을 배우지도 가르치기도 않는다. 가정생활, 일상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등에서 꼭 필요한 것임에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 밥상머리교육도, 예절교육도 사라져 없어진지 오래된 것이다. 가정에서의 비공식적 교육, 학교에서의 공식적 교육, 어디에서도 가르침과 배움이 없는 것이다. 남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지극히 중요한 행동들인데도 말이다. 경청도, 기다림도, 인내심도, 책임감도, 개인 차도 배우면 알게 되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임에도 그렇다.
이런 기술들을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으니, 이런 기술이 전혀 없거나 크게 부족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대립과 갈등, 비난과 공격, 다툼과 싸움, 은둔과 따돌림 등이 오늘날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 만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때리고, 남이 내 앞에 끼어들었다고 난폭하게 운전하고, 심지어 야구 방망이를 휘둘기도 한다. 사회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어디를 가나 조심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유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 다름아닌 '사이좋게' 사는 기술들을 배우지 못한데 있다. 이렇게 방치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보일러 수리기사라고 해서 보일러를 고치는 기술만 있으면 되는가. 에어컨 설치기사가 에어컨을 잘 설치할 줄만 알면 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그 마음만 있으면 되는가. 공손히 인사하고, 소소한 이야기도 하고, 질문이 받으면 그 말을 경청하고 친절히 대답할 줄도 알아야 한다. 딱딱한 기술(hard skill)만으로 살 수는 없다. 부드러운 기술(soft skill)도 갖추어야 한다. 이런 기술을 '친사회기술'(prosocial skill)이라 한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도, 직장생활을 할 때도 꼭 필요한 기술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런 기술들을 가르쳐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한다. 가장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기술, 경청의 기술부터 먼저 가르쳐야 한다. '기초'가 되는 기술부터 가르쳐야 한다. 더 복잡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터전이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한번에 가르치기 어려운 기술은 잘게 쪼개어 하나씩 단계에 따라 가르쳐야 한다. 빵을 칼로 잘게 잘라 먹는 것처럼, 친사회기술도 작게 잘라 단계적으로 가르치면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배운 기술을 때(시간)와 장소(공간)에 알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원만하고 '사이좋은' 인간관계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2023년 11월 24일(금)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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