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36] 후생가외(後生可畏), 사제 관계의 미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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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

[36] 후생가외(後生可畏), 사제 관계의 미묘함

by I'mFreeman 2023. 11. 28.

사제(師弟)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스승[師]과 제자[弟]를 이름하는 말, 호칭하거나 지칭할 때 쓰는 그 말부터 생각해 본다. 오늘날 "학생"(學生)들은 자신을 가르치는 분을 호칭하거나 지칭할 때 학교급별로 그 이름을 달리 한다.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들은 자기 반을 맡은 담임하거나 어떤 과목을 가르치는 분을 "선생님"이라 이름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학과에 소속된 분이나 수강하고 있는 과목을 가르치는 분을 "교수님"이라 이름한다. 이처럼 대학 전후로 나누고, 가르침을 주시는 분을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칭/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교사"와 "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모두 "학생"이라고 이름한다.
 
    교육법의 규정에 따르면, 교사와 교수 모두 "교원"이다. 유아교육법과 초·중등교육법에서는 그 "교원"을 "교사"(敎師)라 하고, 원감/원장과 교감/교장까지 포함한다. 고등교육법에서는 그 "교원"을 "교수"(敎授)라고 이름한다. 학장과 총장까지 "교원"이다. 말뜻 그대로 말하면, 교'사'는 '가르치는 스승'을 말함이요, 교'수'는 "가르침을 줌"이란 뜻이다. "교수님"이란 이름은 법적인 이름일 뿐이다. 말은 다르지만 뜻은 똑같다. "교원"의 이름을 달리하는 것일 뿐이다.
 
    대학에서와 다르게, 고등학교까지 "선생님"이라 이름하는 것은 "교사님"이란 말이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습관이나 관습 그 이상의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실상은 "선생님"이란 이름이 "교수님"보다 더 높은 존칭이다. 다른 분야와 달리, 오늘날에도 학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선생님"이라 이름하는 것을 많이 듣고보았다.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교수들에게 그렇게 호칭하도록 배운 학생들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배움의 길에서 우리는 보통 우리가 배우려고 하는 것을 먼저 배운 이에게 나아가 배운다. 그 먼저 배운 이를 "선생"(先生)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선학"(先學)이란 말도 썼다. 그의 가르침을 통해 뒤에 배우는/배운 이를 앞의 이름과 짝을 지어 "후생"(後生) 또는 "후학"(後學)이라 했다. 그 선생/선학을 스승으로 섬기고 직접 배우는 사사(事師)에서든, 책을 통해 배우고 흠모하는 마음을 품고 스승으로 여기는 사숙(私淑)에서든, 그렇게 이름했다. 같은 스승을 모시고 그 문하에서 같이 배우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사문(斯文), 도반(道伴), 동학(同學)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오늘날에는 같은 학교, 같은 학과를 다니기만 해도, 선배(先輩), 후배(後輩)라고 한다. 배움의 길, 학문의 길이란 그 길고 긴 여정을 함께 하는 스승이요, 동지요, 벗인 것이다. 이런 사제의 관계를 통해 학문이 후대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상대어는 "학생"이 아니다. "후생"이다. "선생"이란 이름은 아무에게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었다. 학문이 높은 분들에게만 허락되는 존칭이었다. 또, "선생"이든 "후생"이든, 배움의 길에서는 모두 "학생"일 뿐이다. 학문의 경지에 따라 또는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일 때, "선생/선학"과 "후생/후학"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학생"이란 이름도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죽고 난 뒤라야, 그마저도 1년에 몇 차례 "학생"으로 불릴 뿐이다. 기제사나 시제사를 모실 때 지방에 쓰는 글, "顯○學生府君神位"에서다. 여성은 이마저 받지 못했다. 그저 "○孺人○氏神位"라고 쓸 뿐이다. "유인"이라고만 했다.
 
    이 말들의 뜻을 말뜻 그대로 살펴본다. 선생(先生)은 '먼저 태어남'이요, 후생(後生)은 '뒤에 태어남'이다. 선학(先學)은 '먼저 배움'이요, 후학(後學)은 '나중 배움'이다. 학생(學生)은 '배우는 삶'이다. 동학(同學)은 '함께/같이 배움'이다. 선배(先輩)는 '앞선 무리'요, 후배(後輩)는 '뒤의 무리'다. 하여간 선생/선학과 후생/후학의 관계는 가르침과 배움의 수직적 관계다. 군사부(君師父) 일체라는 말이 이를 증거한다. 동학과 선배와 후배는 배움을 함께 하니, 조금의 차이가 있지만 수평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좌]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우] 표준 영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논어≫나 ≪맹자≫ 같은 책을 보면, 선생과 후생의 관계가 반드시 수직적인 것만은 아님을 미묘하게 느낀다. 일방적으로 가르치기만 하고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하는, 그런 관계만이 아님을 본다. 선생의 가르침을 그 가르침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견해를 달리 하여 논쟁하는 생생한 모습을 보기도 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행동과 말에서 '미묘한 긴장'이 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후학가외"(後生可畏)란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을 평촌선생의 "교육사" 강의에서 처음 들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을 만난 뒤에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 그 정도로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원문을 찾아보았다.
 

후생이 두렵기만 하니, 선성(先聖)의 말씀이 나를 속이지 않은 것을 알겠다.
[後生可畏(후생가외), 先聖不我欺也(선성불아사야).]

 
    퇴계선생 58세 때, 율곡선생 23세 때, 두 거인이 만났다. 사단칠정에 대한 문답을 나누었다. 이 문답에서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의 학문과 상반되는 견해를 밝혔다. 논쟁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존경의 마음, 애정의 마음, 격려의 마음을 서로 주고받았다. 율곡선생이 떠난 뒤에, 이미 은퇴한 노학자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의 학문이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두려움을 느낄 만큼, 청년 율곡선생의 학문이 이미 지극히 높음을 평하신 것이다. 퇴계선생을 속이지 않았다는 선성(先聖)은 성인(聖人) 공자다. 공자 말씀을 빌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논어≫(論語)에서 공자 그 말씀을 찾아보았다. 제8편 <자한>(子罕) 제22장에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뒤에 오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만하다. 장래가 지금만 못할 줄을 어찌 알겠는가. 사십, 오십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이 또한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子曰(자왈), 後生可畏(후생가외). 焉知來者之不如今也(언지래자지부여금야). 四十五十而無聞焉(사십오십이무문언), 斯亦不足畏也已(사역부족외야이). 

 
    후생은 선생이 평생 닦은 학문을 배운다. 그 배움에 토대하여 더 깊이,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그 선생의 가르침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퇴계선생의 두려움은 23세의 청년 율곡선생의 학문이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40세, 50세가 되기까지 학문에 매진한다면, 그 학문은 진실로 두려운 것이다. 대학자 퇴계선생이 청년 율곡선생의 학문을 보고 장차 '두려움'을 느낄 만큼 높은 수준에 이를 것을 미리 알고 예언하신 것이다. 그런데 후생의 학문이 높음을 왜 '두려움'으로 표하셨을까.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두 선생은 성리학에 대한 학설을 완전히 달리했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이(理)와 기(氣)에 대한 학설이 너무도 달랐다. 이것이 두려움의 이유였을 것이다. 또, 현격한 연령의 차이가 그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것이 진실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 까닭이다. 학설의 차이와 연령의 차이, 이 두 사유가 퇴계선생께 두려움을 유발한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서로 간에 논(論)과 쟁(爭)이 오고갈 수 있다.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남의 견해를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먼저 사자(死者)가 되어버리면, 산 자의 일방적인 논(論)과 쟁(爭)이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직접적인 가르침과 배움이 없더라도, 사제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다. 연령과 사사(事師) 여부를 초월한다. 사숙(私淑)까지 포함하여 사제가 되는 것이다. 만일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학설에 차이가 없었거나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두 선생이 연령의 차이가 엇비슷했다면, 어떻게 받아들이셨을까.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른 후생의 학문을 보고들으며, 선생은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또 보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말도 생각난다. "세상에 올 때에는 차례가 있지만, 갈 때에는 없다."는 그 말 말이다. 선생/선학이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후생/후학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법은 없다. 공자와 그의 수제자 안회(顔回)처럼 말이다. 만일 이런 경우일 수 있었다면, 남은 선생이 후생의 학문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논쟁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58세의 노학자로 여생이 많지 않은 퇴계선생에게 23세의 청년 율곡의 학문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뒤에 무르익을 학문의 깊이까지 염두에 둔다면, 진실로 두려웠을 것이다. 학설이 다르고 연령의 차이가 크니, 본인 사후에 그 후생이 자신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한 것인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 것인지, 그것은 진실로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그렇다. "그 두려움"이란 본인 사후(死後), 본인에 대한 후생들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이런 선생과 후생 간에 팽팽한 긴장이 있는 가르침과 배움이 있는가. 지금의 교육현실은 '스승'이라는 말과 '제자'라는 말부터 사어(死語)가 되어버린지 오래되었다. 선생/후생, 선학/후학이란 말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선생님"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가르침을 주는 자로 존경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 처지와 형편이 말이 아니다. 존경심과 경외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선생"은 놀림과 조롱과 공격의 대상일 뿐이다. 학부모들까지 나서 교육현장을 황폐화하고 있다. 교사들이 스스로 교권(敎權)을 주장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이르렀다. 그러니 무슨 가르침과 배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대학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교수가 교사와 다른 점은 교육을 통한 학문후속세대의 육성과 학문 연구를 병행한다는것 뿐이다. 학문을 하기에, 교수가 교수인 것이다. 오늘날 교수들이 예전 교수들에게 '두려움'을 줄 만큼 학문을 잘하고 있을까. 범위를 좁혀 말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옛 은사님을 통한 배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 이상의 학문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수준에 미치지도 못하고 있다.

 

    학문 연구에 필요한 문헌의 입수도 쉽고 빠르며, 심지어 인터넷에도 귀한 자료가 즐비하여 너무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수교육학 1세대와 대비한 2세대의 학문 성과는 참으로 초라한 것이다. 학문에 임하는 그 자세에 이르러서는 현저한 차이만 뚜렷이 보일 뿐이다. 서로 비교해보는 것조차 민망한 일이다. 어제는 틀렸고, 오늘이 맞다[昨非今是(작비금시)]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제가 맞고 오늘이 틀렸다[昨是今非(작시금비)].
 
    지금 교육 일선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학생, 부모, 교사/교수, 학교, 교육행정기관 등 교육공동체가 모두 제 할 일을 충실히 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학생'다움', 선생'다움', 부모'다움', 학교'다움'을 잊고, 잃고, 버린 결과다. 학생과 교사/교수는 성실히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부모와 학교는 서로 신뢰하고 존중해야 한다. 교육행정기관은 가르침과 배움이 참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충실히 관리감독해야 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것이라도, 정치나 법률이 아닌, 교육의 논리로 해결해야 한다. 교육이란 무릇 백년지대계가 아닌가. 교육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교육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남 탓을 하기에 앞서, 제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라가 살고, 부강해질 수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그 때가 가장 빠른 때라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 지금부터 교육의 복원을 위해 힘써 분발해야 할 이유다.
 

2023년 11월 25일(토)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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