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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

[37] 친'사회'기술, 사회(社會)란 무엇인가

by I'mFreeman 2023. 12. 7.

 

인지-행동적 접근에 따른 친사회기술의 완전학습 모형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들과 잘 지내고 싶어 한다. 남들과 '어울려' 무엇을 '함께하며' 살기를 원한다. 남들과 '더불어' 오손도손 '정답게' 살며,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한다. 그런 '사이'의 삶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평화를 누리고 싶어 한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남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홀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지극히 적을 것이다. 남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 관계의 삶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성내고 괴로움을 당하기도 한다.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다. 사람[人(인)]과 사람 '사이'[間(간)]에서 살아가기에, 인간(人間)이다. 이 땅에서는 이 '사이'를 특히 중시했다. 서양인의 삶이 '개인'(個人)주의의 삶이라면, 우리네 삶은 '간인'(間人)주의의 삶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남들과 비슷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다. 어떤 모임이나 단체에 속하여 그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그 구성원이 됨으로써 소속감을 느낀다. 남들과의 소통을 원하고, 그 관계에서 관심이나 애정 같은 것을 주고받고 싶어한다. 사회화(socialization)라는 과정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려고 한다. 남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 더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남들과의 차이점, 자신만의 특성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세우려 하는 것이다. 개인화(individualization)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동서고금에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1. 한국사회의 양면, 비사회와 반사회

 
그런데 지금 이 땅에는 남들과의 이런저런 관계맺음없이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67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며칠 전에 어느 공익광고에서 본 것이다. 타인과의 의례적이고 통상적인 만남도 갖지 않는다. 집밖을 나가지도 않고, 직장에도 다니지 않고,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다. 지인이나 정부의 지원을 받고 생계를 겨우 이어간다. 때로 '쪽방'에서 홀로 살다 '고독사'(孤獨死) 하는 사람도 있다. 몇 날, 몇 달이 지나고서야 이웃 사람들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진다. 죽음까지 홀로 맞이하는 것이다. 남들과 동떨어져 마치 외딴 '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이런 행동을 '비'(非)사회행동(asocial behavior)이라 하고, '마우스'(mouse) 형이라고도 한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들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살고 있는 것일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나 사정은 각기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남들과 어울려 살지 '않으려는'(will not) 것도 이유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들로부터 자신을 '자발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남들과 함께, 남들처럼 살아갈 의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함께 살 필요를 전혀 또는 거의 느끼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본래부터 홀로 지내는 것이 편해서일 수도 있다.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 그렇게 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지고 그 속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남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감당하기에 벅찰 만큼 너무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을 만큼 세상살이에 지쳐서일 수도 있다. 남들과의 관계 그 자체에 무상(無常)함을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남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는 삶의 의미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일 수도 있다. 남들과의 관계의 문제나 경제적 사정 또는 사회적 이유 등이 개입되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들과 다른 쪽 극단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다. 남들과 관계를 맺고 살면서도, 그리고 남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음에도, 그렇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부모와 형제,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잘 지내지 못한다. 사소한 일로 욕하거나, 다투거나, 싸우거나, 때리거나, 심지어 둔기나 흉기 같은 것으로 그 소중한 가족을 살해하는 일도 벌어진다.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그 어린아이들을 때리고, 가두고, 먹을 것조차 주지 않는다. 이른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다. 친구들을 놀리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싸우거나, 심하게 때려서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학교[내]폭력'이다.
 
    집이나 학교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리고 남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들을 괴롭히거나, 겁박하거나, 협박하거나, 괴롭히거나, 공격하거나, 때로 죽이기까지 한다. '스토킹'과 함께, 이른바 '묻지마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다. 자기 차 앞에 끼어들었다고 야구방망이나 쇠파이프를 꺼내 휘두른다. 잘 알지도 못하고, 일면식도 없는 남들에게까지 그렇게 행동한다. 군대도 예외가 아니다. 사이버공간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이런 행동을 '반'(反)사회행동(antisocial behavior)이라 하고, '몬스터'(monster) 형이라 하기도 한다. 앞과 정반대의 행동이다. 
 
    남들과 대립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공격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소시오패스(sociopath)가 아니라면, 그런 삶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저마다 다른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can not) 것일 수 있다. 그릇된 말이나 행동 때문일 것이다. 남의 말이나 행동을 잘못 '지각'해서 '오해'한 때문일 수 있다. '생각'을 잘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릇된 '신념'이나 '기대' 같은 것을 가진 탓일 수도 있다. 일순간 치밀어오른 어떤 '감정'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서일 수도 있다. 남들과의 관계 문제, 먹고사는 문제 등의 사회적 요인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이 땅에는 은둔하여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집에서부터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군대, 직장에 이르기까지,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땅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는 것이다. 마음놓고 나다닐 수 없을 정도다. 늘 주위를 살피고, 경계하고, 주의하고, 조심해야 한다.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이란 애초에 없었던 것일까. 지금의 한국'사회'가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한국'사회'만 이런 것일까.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남들과 관계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은 그들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문제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의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행동문제, 그리고 "사회"

 
사람들의 행동은 거의 대부분 '사회'(society)와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이 속한 사회에서, 남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통상적으로 어떤 사람의 어떤 행동을 평가할 때, '사회'와 연관짓는다. '사회'가 행동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어떤 행동을 '적절'한 행동 또는 '부적절'한 행동으로 구분짓는다. '적응'적 행동 또는 '부적응'적 행동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또, 부적절한 행동, 부적응적 행동을 행동'문제'(또는 앞뒤를 바꾸어 '문제'행동)라고 한다. '비사회'행동과 '반사회'행동 모두 행동'문제'인 것이다. 어떻게든 '변화'될 필요가 있는 행동인 것이다.
 
    '비사회'행동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행동은 이것이 거듭될수록, 우울, 위축, 불안, 외로움 같은 부정의 '감정'이 생기게 된다. 부정의 '생각'도 차츰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자기 내부에만 둘 뿐, 외부로 적절히 표출하지 않으면, 더욱 심해지고 악화될 것이다. 결국에는 행동문제로 발전한다. '내면화'(internalizing) 행동장애라고 한다. 이와 달리,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바깥으로 표출은 하지만, 그 표출하는 방식이 그릇될 수도 있다. 이것이 악화되어 '반사회'행동으로 나타나면, 이것도 문제가 된다. 소란을 피우고, 남들을 적대시하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그런 '행동'으로 표출하면, 남들과의 관계가 깨어진다. 이런 공격적 행동이 반복될수록, 감정과 생각도 부정의 방향으로 발전한다. 행동과 생각(인지)과 감정, 이 셋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의 문제를 '외현화'(externalizing) 장애라고 한다.
 
    이렇게 사회의 '규범'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을 이해하고 구분하는 접근방식(normative approach)은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찾는데 유효하다. 행동 그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 그 행동의 호칭(예: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은 관심밖의 일이다. 행동문제를 크게 둘로 구분한다. 행동과 그 행동이 일어난 '상황' 간의 관계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그 하나다. 전문용어로는 '부적절한 자극통제'(inappropriate stimulus control)라 한다. 행동을 통제하는 환경자극(예: 빨간색 신호등)에 따라 알맞게 반응하지 않는 행동(예: 건너간다)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상황 곧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남들과 함께 모여 밥먹고 술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쳐다보는 행동은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행동 그 자체에 내재된 차원을 사회와 비교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행동의  빈도(frequency), 강도(intensity), 지속기간(duration), 반응잠시(latency), 네 차원을 중심으로 한다. 지속기간과 반응잠시는 둘 다 시간이다. 구분하여 말하면 이렇다. 지속기간은 행동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반응잠시는 남의 질문이나 지시나 명령이 있고, 그 질문 등에 따라 실제로 행동할 때까지 걸린 시간을 말한다. 어떤 행동을 '보통의 평균적인 수준'과 비교하여 문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보통의 평균적 수준보다 더 많이 하는 것도, 더 적게 하는 것도 문제다. 더 강하게 행동하는 것도, 더 약하게 행동하는 것도 문제다. 행동을 더 오랫동안 하는 것도, 더 짧게 하는 것도 문제다. 지시나 명령을 받고 곧바로(또는 지시나 명령이 끝나기도 전에) 행동에 나서는 것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행동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넷이 평균적인 수준보다 '초과'(excess)되는 것과 함께, '부족'(deficit)한 것도 행동문제가 되는 것이다. 모두 합하면 8가지다. 남들과의 관계에서, 말수가 너무 많은 것도, 말이 없는 것도 문제다. 목소리가 들릴듯 말듯 너무 약한 것도, 너무 크게 말하는 것도 문제다. 너무 오랫동안 말해도, 너무 짧게 말해도 문제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는 것도, 한참 뒤에야 대답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행동과 함께, 행동의 빈도, 강도, 지속시간, 반응잠시가 보통 수준을 크게 초과하는 것, 크게 미달하는 것 모두 변화가 필요한 행동문제다. 여기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행동의 '적절'과 '부적절', '적응'과 '부적응', '과잉'과 '결핍,' '비'사회와 '반'사회, 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니,  언제나, 어디서나, 통용되는 '보편적'(universal) 기준이란 본래 없다. 그렇기에, 그 사회의 역사와 전통, 관행이나 관례, 규범이나 표준, 법과 제도 등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문화'적 요인이 깊숙히 개입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행동에 대한 사회의 규범이 때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 한다. 똑같은 행동이 한국사회와 미국사회에서 각기 다르게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땅의 지금과 옛날을 비교하더라도, 똑같은 행동이 똑같이 평가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달리 보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이렇다. 나찌독일에서 홀로코스트에 관여된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특이한 사람, 괴물이 결코 아니다. 그때 독일의 '상황'이나 '보통'이란 기준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독일과는 온전히 다른 사회였다. 또, 사람을 살해하는 행동마저도 보통의 상황에서는 엄벌받아야 마땅한 중대 범죄행위다. 전쟁터에서 그 행동은 오히려 칭송받을 만한 영웅적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의 기준으로 행동을 평가하는 한,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회'라는 말에 이런 한계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다.


3. 친사회기술, 그리고 "교육"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 문제적 인물의 일탈로 간주하고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행동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풍토나 국가정책과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이기를 바란다.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가정에서부터 학교, 사회,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앞장서서 이런 사회,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친사회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없었다. 급격한 서구화로 전통예절이 무너지고, 가정교육이 사라진 때문이다. 학교에서조차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네 사람들에게 친사회기술이 부족한 까닭은 여럿 있다. 남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동기'(motivation)가 문제다. 남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데 필요한 행동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그런 행동을 하는데 필요한 지식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다. '습득'(acquisition)이 문제다. 그런 지식을 습득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할 수 있다. '수행'(performance)이 문제다. 또, 그렇게 행동은 하지만 능숙하지 못할 수도 있다. '유창성'(fluency)이 문제다. 까닭이 서로 다르니, 교육할 때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또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행동이나 일을 제대로 잘해내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기술'(skills)이다. 남들과, 사회와 우호(友好)의 관계로 친화(親和)하며 잘 지내며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행동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을 '대인'기술(interpersonal skills), '사람'기술'(people skills), '사회'기술'(social skills), '친'(親)사회기술(prosocial skills)['찬성/우호'란 뜻의 접두사 pro-를 붙여 의미를 명확히 한 말]이라 한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기술이다. '기술'은 환경과의 경험과 상호교섭을 통해 학습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니,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
 
    하여간 지금 우리는 친사회기술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정교육의 복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으로서는 학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교과교육, '지식'교육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학교생활과 함께, 사회 친화적으로 행동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또 그 사용을 통해 '즐거움'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 '완전한 학습'이 될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배운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곳에서도, 다른 때에도 사용하게 해야 한다. 가정과 부모, 이웃과 마을의 도움, 곧 주위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까닭이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 이 말이 딱 맞다. 이렇게 교육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치면, 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담이나 (심리)치료는 그 뒷일이다. 필요하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친사회'기술'(prosocial skills) 역시 '사회'라는 말에서 파생되는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와 친화적인 행동이란 그 사회가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친사회기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청하기, 협력하기, 정직하게 행동하기, 공감하기, 주장하기 등의 가치와 덕목은 문화 간 차이를 초월한 보편적인(universal) 것이 될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기술들을 쓸 때 하는 구체적인 말이나 행동은 동서와 고금 간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친)사회기술을 가르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문제다. 이 땅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 알맞는 친사회기술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그런 차이를 고려한 교육, 그것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23년 11월 30일(목)
ⓒ H.M. Han


[후기] 앞에서 '사회'(社會 society)라는 말을 셀수없이 많이 썼다. 비사회(asocial), 반사회(antisocial), (친)사회([pro]social)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불가피했다. 영어사전의 풀이를 보았다. '사회'란 말은 이렇게 가볍게 쓸 말이 아니었다. 더 깊이 생각해 볼 만한 것이었다. 그 까닭의 하나는 위에서 말했다. 다른 하나는 어원의 문제다. 이 땅에서 전승되어온 말이 아니라, 일본에서 번역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인해, 이 글 하나를 두고 일주일이나 매달렸다. 다 말하지 못한 것은 다음 어느 기회로 넘겨둔다. ['개인'(個人 individual)이란 말, '문화'(文化 culture)란 말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번역한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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