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주제의 글을 쓸 때, 참으로 많이 쓰는 구(句)가 있다. 특히 논문을 쓸 때 그렇다는 점을 느꼈다. 그중에 “○하여(해)”나 “○하기” 같은 것이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위해)”, “이러한 제도로 인하여(인해)”, “친구관계를 통하여(통해)”, “나의 의사를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하기’란 정말 어렵다.” 등이 그 예문이다. 요즈음 새삼 느끼고 깨닫는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 단톡방에 ‘번개 퀴즈 게임’을 하였다. 문제는 <‘○하여’에서 ○에 들어가 말이 되는 단단어(한자)는?>으로 내었다. ‘爲(위)하여, 對(대)하여, 亡(망)하여, 當(당)하여, 因(인)하여’를 예시하였다. 참여비는 없다고 하였다. 오후 9시 정각까지 가장 많은 정답을 낸 사람을 승자라 하고 소정의 ‘상금’을 내걸었다. 그 밖의 참여자에게는 순위에 따라 소정의 ‘선물’을 준다고 하였다.
답을 낸 사람은 아내와 딸아이 둘이었다. 아내가 낸 답은 “關(관)하여, 爲(위)하여, 對(대)하여, 赦(사)하여, 定(정)하여, 要(요)하여, 期(기)하여, 傷(상)하여, 命(명)하여, 壯(장)하여”였다. 딸아이는 “爲(위)하여, 對(대)하여, 亡(망)하여, 當(당)하여, 因(인)하여, 加/可(가)하여, 救(구)하여, 定(정)하여, 封(봉)하여, 滿/晩(만)하여(한글밖에 없어 제외), 避(피)하여, 赦(사)하여, 懲/徵(징)하여(한글밖에 없어 제외), 關(관)하여, 勸(권)하여, 動(동)하여, 壯(장)하여, 破(파)하여, 行(행)하여”를 답으로 냈다. 아들 둘은 답을 내지 않았다. 승자는 18개 중 16개가 정답인 딸아이에게, 참여상은 10개를 낸 아내에게 돌아갔다.
답으로 낸 글자의 가나다 순에 따라 문장을 만들어 보았다. 그 일이 내게 엄청난 부담을 ‘加(가)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아이디어를 가족 규칙으로 정하는 것이 ‘可(가)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네가 가진 장점에 ‘關(관)하여’ 생각해보니,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이 판이하게 다르니, 법원에 판결을 ‘救(구)하여’ 보기로 했다. 나쁜 일은 서로 징계하고 악한 일은 서로 ‘勸(권)하여’ 대동사회(大同社會)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 9시를 ‘期(기)하여’ 게임을 종료하기로 하였다.
어려움을 ‘當(당)하여’ 억울해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었다. 한글 속 한자의 의미에 ‘對(대)하여’ 세밀히 살펴보면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솔직한 사과의 말에 ‘動(동)하여’ 마음이 움직였다. 그 행동은 그럴 ‘만하여’한 것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亡(망)하여’ 나라 밖 백성들이 돌아올 곳이 없어졌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命(명)하여’ 그 일을 하게 하였다. 이 편지는 중요한 것이니 철저히 ‘封(봉)하여’ 어떤 경우에도 누출됨이 없어야 한다. 저들의 죄를 ‘赦(사)하여’ 주옵소서.
나한테 한 말에 빈번히 마음이 ‘傷(상)하여’ 더는 널 만나고 싶지 않아. 이 문제는 정확한 결정을 ‘要(요)하여’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세계평화를 ‘爲(위)하여’ 그 어떤 전쟁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내야 한다. 중국에서 나비가 날갯짓 한번 한 것으로 ‘因(인)하여’ 미국에서 허리케인이 몰아칠 수 있다. 매사에 애쓰고 노력하는 네가 너무도 ‘壯(장)하여’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약속을 ‘定(정)하여’ 반드시 지켜야 한다. 네 표정을 보니, 마음이 ‘징하여’[참고: 徵(징)하여=불러서, 懲(징)하여=징계하여] 눈물이 났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破(파)하여’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선을 ‘行(행)하여’ 복을 짓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게 된다.
그 밖에도 여럿 있다. 시골 마을에 ‘居(거)하여’ 여유 있게 사는 것이 도시 생활보다 더 좋다. 곤경에 ‘處(처)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과 삶을 성실히 하여 책임을 ‘免(면)하여’야 슬기로운 사회생활이라 할 수 있다. 동료들과 직접 ‘面(면)하여’ 일하는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 이번에 ‘限(한)하여’ 용서한다. 너랑 속마음이 ‘通(통)하여’ 기분이 좋다.
이 게임은 심심풀이로 한 것인데, 예기치 못한 생각거리 몇을 얻었다. 하나는 말장난과 같은 것이다. 상금과 선물에서 ‘금(金)’과 ‘물(物)’에 관한 것이다. 금(金)도 물(物)의 한 가지 종류다. 그렇지만, 쇠가 아니라 황금(gold)이나 백금(platinum)이라면, 고가의 귀금속이다. ‘물[water]’에 비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지닌 ‘물[thing]’이다. 다만, 돈[현‘금’]으로 교환되지 않는 한, 무용지‘물’일뿐이다. 목마른 채 사막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억만금의 돈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들에게‘물[수(水)]’보다 더 귀중한 가치를 지닌 물(物)은 없을 것이다.
하여간, 그 이틀 뒤에 우연히 책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글자>(2014)라는 책이다. 이 책을 펴낸 허밍버드에서 나온 책 중에 <1cm>가 있다. 저자는 카피라이터인 정철이란 분이다. <불법사전>의 지은이다. 이 책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사준 것이다. 이 책은 <소중한 것은 한 글자로 되어 있다>란 부제가 붙어 있고,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5개만 예시해 본다. ① ‘뒤, 옷, 꽃, 봄, 탑’(인생에 대한 예의), ② ‘철, 깃, 벗, 옆, 벽’(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③ ‘힘, 도, 곁, 쇼, 탓’(여자, 남자, 혼자), ④ ‘껌, 관, 쌀, 써, 못’(조금은 삐딱한 시선), ⑤ ‘나, 땀, 편, 흙, 멋’(나, 괜찮을까), ⑥ ‘낮, 덜, 길, 창, 앗’(자, 이제 헐렁한 셔츠를 입고)이다.
이들 한 글자가 어떻게 각 장의 제목과 연관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예컨대, ④의 “조금은 삐딱한 시선”에서 ‘잔’ 한 글자를 갖고 “내 술잔을 채울수록, 우리의 술병은 비어간다.”라고 했다. 이처럼 그 한 글자가 핵심 키로 들어간 광고문(예, “침대는 과학이다”)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역시 생각해만 하다. 오늘날 ‘창의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빛바래진 지 오래된,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유창성(fluency), 융통성(flexibility), 독창성(creativity)으로 구성되는 창발적 사고력은 문제의 해결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도 이와 같을 것이다.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말기보다 할 말, 안 할 말을 잘 가려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의 말도 그 마음을 잘 헤아려 본의대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일자사(一字師)란 말도 있다. 글자 하나 바꾸라는 가르침을 따르니 명문(名文)이 되었다. 한마디 말도 잘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자. 여러 말을 놓고 장난이라도 쳐도, 가는 말부터 멋진 한 글자를 골라 품격 있게 해보자.
Freeman의 하여歌
당신과의 특별한 만남에 의依하여
맺은 부부의 인연으로 인因하여
우리 아이 셋을 만났네 하여
고맙단 말 하지 않을 수 없다네.
2024년 10월 5일(화)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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