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인의 족보>(중판, 1978): 한국인의족보편찬위원회에사 편찬하고 일신각에서 발행한 것이다(초판은 1975년). 다른 책과 달리, 문중 대표의 감수를 받았다. 이 책의 1255-1256면에 실린 곡산 한씨는 다음과 같다.
韓氏
韓氏는 文獻에 131本으로 나타나 있다. 韓氏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이른바 三韓甲族이라 하겠다. 韓氏는 中國 宋나라 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高麗 熙宗 2年에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谷山府院君에 封府해진 韓銳를 始祖로 하는 谷山韓氏와 箕子의 後裔로 알려진 淸州韓氏로 구분할 수 있다. 淸州韓氏는 종전에는 여러 本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近世에 이르러서는 거의 還籍되었고 나머지 몇 本에 대하여는 中央宗親會에서 全體의 淵源을 찾아 單一化할 것을 推進하고 있다. 131本 中 이 두 姓氏를 제외한 나머지 129姓에 대하여는 未考이다.
谷山韓氏
始祖 및 本貫의 由來
始祖 韓銳는 中國 宋나라 8學士의 한 사람으로 1206年(高麗熙宗2) 우리나라에 와서 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로 谷山府院君에 封하여졌으며, 그 後孫들이 谷山에 世居하면서 本貫을 谷山으로 하였다.
歷代重要人物
韓 雍(朝鮮 字: 百熙 號: 靜浦 諡號: 平節 官職: 左贊成): 1302年(太祖 1) 司憲府監察·綾城郡守를 거쳐 1400年(定宗 2) 司憲府掌令, 1401년(太宗 1) 左副都尉使·兵曹參判·漢城府尹·慶尙道觀察使·開城留後·兵曹判書·吏曹判書·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을 歷任하고, 1409年(太宗 9) 다시 開城留後를 지냈다.
韓 卷(朝鮮 字: 可舒 號: 儒仙 諡號: 文節 官職: 安撫使): 1408年(太宗 8) 司馬試에 合格하고 1401年 承文院이 설치되어 經學에 該博한 사람을 뽑을 때 初代 承文院 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式年文科에 及第하여 1414年 右正言이 되고 校理를 거쳐 平安道安撫使를 지냈다.
韓彦浩(朝鮮 字: 仲溫 官職: 府使)
韓信民(朝鮮 官職: 左承旨)
韓命吉(朝鮮 字: 善初 官職: 執義)
韓以原(朝鮮 字: 叔起 관직: 參判): 1675年(肅宗 1) 司馬試를 거쳐 1687년 式年文科及第하고, 여러 外職을 역임하였으며, 1715年(肅宗 41) 掌令으로 宋成明을 論斥하다가 한때 削職되었다. 經史·詩·易學·算數에 뛰어났고, 騈儷文을 잘 지었다.
韓如愈(朝鮮 字: 尙甫 號: 遁翁 官職: 持平)
韓德厚(朝鮮 字: 載仲 號: 止知堂 官職: 府尹)
韓是愈(朝鮮 字: 起伯 號: 忍聲 學者)
韓文健(朝鮮 字: 天若 號: 石山 學者)
行列表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世 | 行列字 |
20 | 錫 | 21 | 浩 | 22 | 植 | 23 | 燮 |
24 | 在 | 25 | 鎭 | 26 | 永 | 27 | 植 |
28 | 炳 | 29 | 基 | 30 | 鏡 |
分布現況
分布地 | 戶數 |
忠北陰城郡大所面梧山里 忠北陰城郡遠南面一圓 忠北陰城郡甘谷面梧杏里 慶北月城郡乾川邑金尺里 慶北慶州市光明洞 慶北月城郡內南面望星里 慶北月城郡西面道里 慶北月城郡內南面月山里 慶北慶山郡慶山邑上方洞 慶北慶山郡珍良面仙花洞 慶北大邱市一圓 慶南梁山郡東面內松里 慶南梁山郡下北面芝山里 慶南梁山郡下北面草山里 |
25 23 18 90 18 30 24 18 25 30 25 18 20 25 |
<世系表>
생략
2. <한국족보대전>(1989): 최광실이 4권으로 편찬하고 청화에서 발행한 대작이다. 가장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감수한 이는 한용하(韓龍夏)다. 정(丁) 편 1534-1538면에 실려 있는 곡산 한씨는 다음과 같다.
곡산 한씨 (谷山韓氏)
시조 휘(諱): 한예(韓銳), 곡산군(谷山君)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
곡산(谷山)은 황해도(黃海道) 북동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십곡성(十谷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진서(鎭瑞)로 고쳐서 영풍군(永豐君: 평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高麗) 초에 곡주(谷州)로 개칭하였다. 조선(朝鮮) 태조조(太祖朝)에 곡산(谷山)으로 고쳐서 부(府)로 승격하였다가 태종(太宗) 때 군으로 격하, 1669년(현종 10) 다시 부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곡산군(谷山郡)이 되어 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가 1914년 황해도에 속한 군이 되었다. 별칭은 덕둔홀(德?忽)·고곡(古谷)·진서(鎭瑞)·상산(象山) 등이다.
곡산 한씨(谷山韓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에서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한예(韓銳)인데, 그는 중국(中國) 송(宋)나라 출신으로 206년(고려 희종 2)[sic]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와 곡산군(谷山君)에 봉해지고 본관(本貫)을 곡산(谷山)으로 하사(下賜)받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희(禧)가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으며,손자(孫子) 익(翊)은 판도판서(版圖判書)애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아들 진(瑨)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옹(雍)은 예(銳)의 6세손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능성 군수[sic](綾城郡守) 등을 거쳐 태종(太宗)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또한 학자(學者)로 이름난 여유(汝愈)는 일찍이(sic) 서경덕(徐敬德)·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배워 상수(象數)·병진(兵陣)·성률(聲律) 등에 능통했고, 치상(致相)의 아들 이원(以原)은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외직을 지냈으며 경사(經史)와 시(詩)·역학(易學) 등에 뛰어났다.
그 외 부윤(府尹)을 역임한 덕후(德厚)와 학자(學者) 시유(是愈)·문건(文健) 등이 명성을 날림으로서(sic) 곡산 한씨(谷山韓氏)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산 한씨(谷山韓氏)는 남한(南韓)에 총 4,722가구, 21,1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
한 희(韓 禧) 고려(高麗)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한 익(韓 翊) 희(禧)의 아들,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였다.
한 진(韓 瑨) 고려조(高麗朝)에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수문전 직학사(修文殿) 직학사(直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다.
한방좌(韓邦佐) 고려(高麗)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한방신(韓邦信) 1360년(공민왕 9)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지공거(知貢擧) 등을 지냈다.
한 옹(韓 雍) 자(字)는 백희(百熙), 호(號)는 정포(靜浦), 시호(諡號)는 평절(平節), 1392년(태조 1)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능성 군수(綾城郡守)를 거쳐 1400년(정종 2)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1401년(태종 1) 좌부도위사(左副都尉使)·병조 참판(兵曹參判)·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한성 부윤(漢城府尹)·경상도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개성유후(開城留後)·병조 판서(兵曹判書)·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역임하고, 1409년 (태종 9) 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지냈다.
한 권(韓 卷) 자(字)는 가서(可舒), 호(號)는 유선(儒仙), 시호는 문절(文節), 유후(留後) 옹(雍)의 아들. 1408년(태종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승문원(承文院)이 설치되어 경학(經學)에 해박한 사람을 뽑을 때 초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 //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14년 우정언(右正言)이 되고, 뒤에 교리(校理)를 거쳐 평안도 안무사(平安道安撫使)를 지냈다.
한언호(韓彦浩) 자(字)는 중온(仲溫),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한언수(韓彦粹) 조선 때 종사랑(從仕郎)에 올랐다.
한신민(韓信民) 조선(朝鮮) 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한극충(韓克忠) 조선(朝鮮)에서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한명길(韓命吉) 자(字)는 선초(善初), 조선조(朝鮮朝)에 집의(執義)를 지냈다.
한여유(韓汝愈) 1642(인조 20)~1709(숙종 35) // 자(字)는 상보(尙甫), 호(號)는 둔옹(遁翁), 서경덕(徐敬德)·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어릴 때 이자(利子)를 놓아 생활하는 어머니에게 권하여 갚지 못하는 자의 차용증서를 없애 버렸다 한다. 상수(象數)·병진(兵陣)·성률(聲律)에 밝았다. 영조(英祖) 때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한이원(韓以原) 1651(효종 2)~1720(숙종 46) // 자(字)는 숙기(叔起), 치상(致相)의 아들. 1675년(숙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8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외직(外職)을 역임하고 1715년(숙종 41) 장령(掌令)으로 송성명(宋成明)을 논척(論斥)하다 한때 삭직(削職)되었다. 경사(經史)·시(詩)·역학(易學)·산수(算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을 잘 지었다.
한덕후(韓德厚) 자(字)는 재중(載仲), 호(號)는 지지당(知止堂), 조선에서 부윤(府尹)을 역임하였다.
한시유(韓是愈) 자(字)는 기백(起伯), 호(號)는 인성(忍聲). 조선 때 학자(學者)였다.
한문건(韓文健) 자(字)는 천(天)약(若), 호(號)는 석산(石山). 조선조(朝鮮朝)의 덕망(德望) 높은 학자(學者)였다.
항렬표(行列表) |
世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항렬자 | 석 | 호 | 식 | 섭 | 재 | 진 | 영 | 식 | 병 | 기 | 경 |
行列字 | 錫 | 浩 | 植 | 燮 | 在 | 鎭 | 永 | 植 | 炳 | 基 | 鏡 |
집성촌(集姓村) |
分布地 | 戶數 |
충북 음성군 대소면 오산리·감곡면 오행리(忠北 陰城郡 大所面 梧山里·甘谷面) 충북 음성군 원남면 일원(忠北 陰城郡 遠南面 一圓) 경북 경주시 광명동(慶北 慶州市 光明洞) 경북 월성군 건천읍 금척리·내남면 망성리(慶北 月城郡 乾川邑 金尺里·內南面) 경북 월성군 서면 도리·내남면 월산리(慶北 月城郡 西面 道里·內南面 月山里) 경북 경산군 경산읍 상방동·진량면 선화동(慶北 慶山郡 慶山邑 上方洞·珍良面) 대구직할시 일원(大邱直轄市 一圓) 경남 양산군 동면 내송리·하북면 지산리(慶南 梁山郡 東面 內松里·下北面) 경남 양산군 하북면 초산리(慶南 梁山郡 下北面 草山里) |
43 23 18 120 48 55 25 38 25 |
세계표(世界表) |
1536-1537면(생략)
3. <한국인의 성보>(1993): 한국성씨총람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고 한국실록출판문화사에서 출간했다. 곡산 한씨 부분은 1200면에 실려 있다.
谷山 韓氏(곡산 한씨)
시조: 한예(韓銳)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에서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예(銳)이다. <곡산한씨세보(谷山韓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중국(中國) 송(宋)나라 출신이며 1206년(고려 희종 2)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와 곡산군(谷山君)에 봉해져 본관(本貫)을 곡산(谷山)으로 하사(下賜)받았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희(禧)가 고려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 등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3품 벼슬)를 지냈으며, 손자(孫子) 익(翊)은 판도판서(版圖判書: 판도사의 으뜸 벼슬)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진(瑨: 익의 아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옹(雍)은 예(銳)의 6세손으로 능성군수(綾城郡守) 등을 거쳐 태종(太宗)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총괄하던 행정부 최고 기관의 정1품 벼슬)에 이르렀다.
한편 학자(學者)로 이름난 여유(汝愈)는 일찌기(sic) 서경덕(徐敬德),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배워 상수(象數)·병진(兵陣)·성률(聲律) 등에 능통했고, 치상(致相)의 아들 이원(以原)은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경사(經史)와 시(詩)·역학(易學) 등에 뛰어났다.
그 외 부윤(府尹)을 역임한 덕후(德厚)와 학자(學者) 시유(是愈)·문건(文健) 등이 명성을 날림으로써 가문을 더욱 빛냈다.
집성촌(集姓村)
경북(慶北) 월성군(月城郡) 건천읍(乾川邑) 금척리(金尺里)
경북(慶北) 월성군(月城郡) 내남면(內南面) 망성리(望星里)
경북(慶北) 경산군(慶山郡) 진량읍(珍良邑) 선화동(仙花洞)
대구직할시 일원(大邱直轄市 一圓)
항렬표
世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항렬자 | 석 | 호 | 식 | 섭 | 재 | 진 | 영 | 식 | 병 | 기 | 경 |
行列字 | 錫 | 浩 | 植 | 燮 | 在 | 鎭 | 永 | 植 | 炳 | 基 | 鏡 |
4. <한국인의 족보>(1995)다. 고려문화사에서 발행한 것이다. 같은 회사 편집국이 유 모씨의 책임감수 아래 편찬한 이 책의 1118면에 실린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곡산 한씨(谷山)
○ 시조: 예(銳)
<곡산한씨세보(谷山韓氏世譜)>에 따를 것 같으면 중국 송(宋)나라 출신으로 고려 희종조 때 9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입국, 귀화한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예(銳)를 시조(始祖)로 삼아 오늘에 번영을 누리고 있는 명문(名門)이다.
2세 희(禧)도 밀직부사(密直副使), 3세손(世孫) 익(翊)은 판도판서(版圖判書), 4세손(世孫) 진(瑨)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면서 중흥기(中興期)를 맞게 되었으며 조선조 태조(太祖) 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옹(雍), 정자(正字) 권(卷), 부사(府使) 언호(彦浩) 등도 문중의 대표적 인물이 되고 있다.
한편 조선조 대학자(大學者)로 이름이 높았던 여유(汝愈)는 일찍이 학문을 배워 상수(象數), 병진(兵陣), 성률(聲律)에 능통했고 치상(致相)의 아들 이원(以原)은 숙종조(肅宗朝) 문과급제 후 두루 관직(官職)을 지내며 경사(經史)와 시(詩), 역학(易學) 등에 정통한 유명인으로 문중을 더욱 빛냈다.
이 외에도 부윤을 역임한 덕후(德厚)와 학자(學者) 시유(是愈), 문건(文健) 등이 명성을 높힘으로서도 가문의 명예를 올바르게 전수시킨 명현(名賢)들이었다.
□ 역대 인물고(人物考)
한 예 (銳) : 고려조 문하시중
한 희 (禧) : 밀직사사(sic)
한 익 (翊) : 판도판서
한 진 (瑨) : 정당문학
한 옹 (雍) : 조선조 사헌부감찰
한언호(彦浩): 조선조 부사(府使)
한신민(信民): 조선조 좌승지
한명길(命吉): 조선조 집의(執義)
한이원(以原): 숙종조 대학자
한덕후(德厚): 조선조 부윤(府尹)
한시유(是愈): 조선조 대학자
한문건(文健): 조선조 대학자
◎ 본관별 순위: 2위 21,194명(’85.11.1)
□ 조상의 항렬순
세대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한글 | 석 | 호 | 식 | 섭 | 재 | 진 | 영 | 식 | 병 | 기 | 경 |
한자 | 錫 | 浩 | 植 | 燮 | 在 | 鎭 | 永 | 植 | 炳 | 基 | 鏡 |
세계표(世系表)
생략
이상의 내용 중에서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잘못 기록된 부분은 마땅히 고쳐야 한다. 확대 재생산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오늘날 문중의 운영과 족보 편찬의 필요성, 그 자체가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 11월 14일(목)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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