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16] 경주와 대구, 그리고 포천
본문 바로가기
Life h!Story: 사생애(私生涯)

[16] 경주와 대구, 그리고 포천

by I'mFreeman 2024. 12. 3.

오늘 오후 대구를 떠나기로 했다. 경주를 갈 것이다. 정민 교수가 불국토(佛國土)라 했던 곳이다. 사적으로는 아내와 결혼 후 부산 해운대 조선호텔에서 하루 보내고, 해운대역에서 완행열차 비둘기호를 타고 불국사역에 내려 간 곳, 코오롱호텔이 있는 곳, 신라 천년의 도읍이었던 곳이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참으로 많이 드나들던 곳이다. 콩고드호텔, 조선호텔, 코오롱호텔, 교육문화회관, 감포 반구집 등에서 많은 행사를 치렀다. 우리 한씨 집성촌이 여기에 있는 줄도 모르고.

    아재에게 전화해 일정을 물어보았다. 대구3공단에 올라 간다고 했다. 어짜피 따로 움직어야 하니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심천 할배께 전화드렸다. 점심 같이 하자고 하셨다. 2시경 도착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향해갔다. 경주에 도착하여 서실 인근에 있는 법원 뒤 경주문화원 앞에 주차했다.

     2시 조금 넘은 시각에 서실에 갔다. 벌써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헌책방에서 구한 할배 관련 둘과 대구은행에서 발간히는 향토자료집 하나(제44흐), 정포선생실기와 유선선생문집 입럭한 자료 각 하나를 갖고 갔다.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는 말씀, 가져간 것도 도로 챙겨준 일이 있어 간식 하나만 같이 가져갔다.

    책을 보여드리니, 딴 건 아재에게 주라고 하셨지만, 수운 최재우 선생 자료는 읽어보시고 챙기셨다. 할배 선고모가 그의 생모이기 때문이다. 85세나 되신 할배가 아직 이런 책에 욕심이 있으시다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유선선생 시와 할배 선조님 석산진사, 백천재선생, 현산선생 문집에 있는 시를 붓으로 작품 하고 계시니  여전히 현역작가다. 실기와 문집 입럭본을 보여드렸다. 유선선생 시를 해석해 주셨지만 글로 적지는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

    신라 고승으로 중국에 가서 현장  법사에게 불경과 불도를 배운 원측 스님이 같은 모량 분이라 하셨다. 목월 선생 생가도 있는 그곳에 유적지를 조성하기 위한 일이 진행되고 있어 그곳에 전시장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되기를 진정 소망했다. 문무대왕비문을 쓴 일, 그리하여 면이름이 문무대왕면으로 바뀐 일, 그 밖에 하신 여러 일들도 상세히 말씀도 들려주셨다.

    이번에는 더 크게 마음을 열어주셨다. 작품 소장한 곳까지 모두 보여주셨다. 매월 홍직필 선생과의 인연, 연암 선생 손자 되시는 박규수 선생과 이 땅에 전각을 널리 알린 여초 선생 등의 친필 붓글씨도 보여주셨다. 현산 선생 문집 초고도 볼 수 있었다.

    벌써 다섯시를 넘기고 있었다. 아재를 보기로 했다고 말씀드리고 나섰다. 하루 있다 머물다 갈거냐고 물어셨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니 전화하고 오라고 하셨다. 이렇듯 내게 따뜻이 대해주시고, 걱정해주시는 고마운 할배다. 문중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나를 어여삐 보시고 크게 기대를 거신다. 지금 동년배 서예가들 거의 돌아가시고, 할배가 이 땅 최고의 서예가다.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갔다. 기실, 그때까지 대구에 간 아재 전화연락이 없었다. 장시간 대화했으니 피로하실 것을 생각하고 먼저 나온 것일 뿐이다. 아재한테 전회하니 대구 일 끝내고 영천을 통과했단다. 동생(?)을 만나고 채 5분도 되지 않아 아재가 도착했다. 사무실에서 만났다. 대화하던 중에 아재 전화가 울렸다. 시 공무원인데 상담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관급공사를 하는 관계로 만나주지 않을 수 없다 했다. 각자 차를 타고 시내로 갔다. 동대 근방에서 그 분과 만남이 끝나면 다시 만나기로 했다.

    동대는 예전 모습에서 조금 좋아졌을 뿐 달라진 것이 많지 않았다. 구경거리도 없어 중앙시장에 갔다. 길거리 음식을 몇 먹고 시장구경을 했다. 평일임에도 손님도 별로 없고 문닫힌 가게만 많았다. 곧 아재랑 만났다. 따뜻한 돌솥밥 한 그릇 배불리 먹었다. 아재는 사무실에 가서 옷 갈아입고 사람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세워둔 곳 몰랐는데 그곳을 찾아주었다. 어찌할 건지 물어 대구에 간다고 했다. 저번처럼 신세지지 않으려 한 말이다. 그 유명한 황리단길을 가봤다. 별난 것도 없었다.

    경주 터미널에 갔다. 풀리지 않는 가족사 때문이다. 본 적도 들은 것도 없는 고모 중 한 분만 그곳에서 태어났다. 할머니 그곳 화장신에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언제 경주를 떠나 대구에 가신 걸까. 이런 의문을 지금 해소할 길은 물론 없다. 다만 그 현장에 다시 가보고 싶었을 뿐이다.

    대구를 생각했다. 낯익은 고향이 낯선 집성촌보다 낫다. 실상 대구는 내게 베푼 것이 많다. 취업하여 본격적으로 돈 벌고 세금 낸 곳은 경기도 하고 포천이다. 대구는 세월의 격차에도 내게는 푸근한 곳이다. 슬프고 아픈 곳이기도 하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고맙디 고마운 아내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 그곳으로 귀가함이 마땅할 것이다. 짧은 고행(苦行)으로도 느낀 것, 깨달은 바가 적지 않다. 그 전에 심천 어른 뵙기를 한 번 더 할 것인지, 못 다 했다는 아재 말과 내 말로 대화할 것인지, 은사님과의 오해를 풀러 영천으로 찾아뵐 것인지만 남았다. 세 갈래 길이다. 셋을 모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민하며 이 글을 마친다.

2024년 12월 3일(화)
H.M. Han

반응형

TOP

Designed by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