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두류산, 자동차의 굉음 속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구로 아침운동 하는 사람, 두터운 외투에 목도리를 감고 모자 쓰고 눈만 내놓고 장갑 킨 채 홀로 걷는 사람, 그 중에 내 나이 위아래쯤 되어 보이는데 도서관 입구에 가방 던져두고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한눈에 봐도 홈리스 같다. 며칠 전 봤던 매서운 시선의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저간의 사정은 모두 다를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들도 날 그렇게 볼까. 어찌 보든 상관할 바 아니다. 그도 그랬던 것일까.
나는 자동차가 있다. 이곳에 아직 편한 내 집은 없다. 집[家/宅, house]이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한자 모양을 봐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는 비, 이슬, 서리, 눈을 막는 것, 곧 지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붕을 세우려면 나무나 돌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를 흙이나 나무나 돌이나 단열재 같은 것으로 메워야 한다. 차고 매서운 바람, 열풍 같은 뜨거운 공기, 도선생 같은 외적도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드날들 문과 통풍을 위한 창도 있어야 한다. 기둥을 세우려면 딘단하고 평평한 땅, 곧 '터'가 있어야 한다. 집터는 물을 차단하고 지표에서 올라오는 습한 기운까지 막아내야 한다. 가장 먼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집터다. 이런 물건을 우리는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차는 곧 집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이 모든 조건을 갖추어서다. 남자는 집[주택/가택]을 만들고, 여자는 가정을 만든다(Man makes house, woman makes home). 지금은 고가에 팔리는 속칭 '빨간 영어책'에서 본 이 문장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집과 가정의 소중함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생로병사, 사고(四苦) 외에,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란 고통[愛別離苦(애별이고)]를 너무 일찍이 경험했다. 지금도 그렇고, 머지않은 미래에도 예약되어 있다. 사(死)이별도 있었고 생(生)이별도 있었다. 어디 나만 그럴까 싶다. 사이별이야 불후(不朽)의 존재가 아닌 인간이 어찌할 도리(道理)가 없는 것이다. 이산(離散 diaspora)된 생이별은 청산할 건 청산하고 복원할 건 복원하기 위해 노력은 해봐야 한다. 그래도 안 된다면 그때 가서 정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두류공원 둘레로 많은 갈래 길이 있음을 알았다. 둘레길 바람에 전에 통하지 않았던 길들이 통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금룡사 가는 길처럼 자동차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길도 많다. 옛 시절 언덕, 나지막한 산 하나 있던 것뿐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넓은 부지에 도시의 허파 같은 곳, 찾는 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곳, 문화예술이 있는 곳, 시민들에게 축복 같은 곳이 되었다.
오늘 상포(上抱)하기로 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 고행을 통한 마음수련을 스스로 끝내기로 했다. 칠곡 동명에 갈 일만 하나 남았다. 그 쪽 사정도 있고 내 사정도 있기에, 잠시 갈등하다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다시 순간 갈등했지만 경부선을 선택했다. 얼마 가지 않아 또다른 두 갈래 길을 보고 이 무슨 운명의 작란(作亂)인가 싶었다. 선택을 바꾸었다. 대구에도 외곽순환 고속도로가 있고 칠곡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메모를 찾지 못했다. 휴대폰으로 검색하고 송림사를 지나 저수지도 지나고 군위 방향으로 멀리 찾아갔다. 아니었다. 다시 찾아보니 안동 방향 일반국도 변이었다. 4층 건물에 부지가 넓었다. 바깥 모습만 보고 더는 알아보지 않았다.
칠곡 동명 그 인근 시립 공동묘원에 할아버지, 할머니 묘가 있다. 성당동에서 이장한 곳이다. 숙부가 돌볼 수 없을 때 없애겠다고 숙모가 입장을 밝헜으니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그 인근 현대공원에 '그'도 영면하고 있다. 칠성동 할머니가 묻힌 낙산 천주교묘원도 지나왔다. 그 놈들은 이곳밖에 모른다. '그'가 데려가서 아는 것 뿐이다. 고모까지 '그'의 첩 소생인 그 놈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곳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실 생각하니 심란했다. 하여간 먼저 간 동생과 함께 소천 후의 어머니를 은해사 수목장 터에 옮길 것이다. 이곳과 반대편 팔공산이니,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부IC로 진입해서 중앙고속도로를 탔다. 상주경주 고속도로로 옮겼다. 중부내륙 고속도로로 바꿀 곳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남이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로, 호법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로, 서울1외곽고속도로로, 토평에서 진출하여 구리(세종)포천 고속도로로 옮겼다. 그 사이에 아내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바로 전화해 통화했다. 저녁 6시 경에야 집에 들어간다고 했다. 저번만큼은 아니었지만 심신이 모두 피로했다. 집에 빨리 가서 몸과 맘에 안식을 주고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한 곳의 휴게소도 들러지 않았다. 앞 길과 표지판, 차와 번호가 희미하게만 보였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또 닦았다. 배를 주릴만큼 주렀다. 제 길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돈 것도 이 때문이다.
마침내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주문한 책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라면을 끓여 밥 조금 말아 먹고 자리 펴서 누웠다. 이것이 며칠만인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모텔에 갔다는 것은 아내의 걱정을 덜기 위한 것이멌다. 조금 불편할 뿐 못할 것도 아니었다. 통행금지시간은 없고 대신 차와 돈이 있었다. 내 유년기와 다른 점이다. 조금 뒤 아내가 왔다. 전과 달리 이번 약은 취침 전 약을 먹어도 선잠밖에 자지 못했다. 극도의 피로는 이 때문이었다. 집에서 취침시 약을 먹으니, 이내 잠든 것 같다. 아내와 몇 마디 말을 하고, 아내의 말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며...
화장실 한번 간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7시를 훌쩍 넘은 시각까지 그렇게 꿀잠을 잤던 것이다. 얼른 약부터 챙겨 먹었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던 내가 약이 몸속에 퍼져가자 달라졌다. 며칠 간의 여러 일들이 마치 꿈처럼 여겨졌다. 현상학적 경험처럼 생각됐다. 일장춘몽, 아니 일장동몽,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실체가 있는, 내 몸이 겪은 체험이요 사실이다. 거기에 나의 감정과 생각과 해석이 섞인 것이다. 오늘 그 무렵부터, 이미 기록한 글에 몇 마디 사실과 해석을 붙여 마무리한다. 아내의 귀가를 기다리며. "나의 귀향준비기"를 부제로 더한다. 결코 변치 않는 진리는 세상만사가 계속 변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2024년 12월 5일(목), 6일(금)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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