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산다는 것, 인생(人生 life)이란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사람은 불후(不朽)의 존재, 불사신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갇힌 유한한 존재가 사람인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든 그 시간이 모두 지나간 그때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인생이란 하루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living) 과정(process)임과 함께, 육신의 가죽을 벗는 그날, 그때까지 서서히 죽어가는(dying)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감/삶이 인생이란 동전의 한쪽 면이라면, 죽어감/죽음은 그 동전의 다른 쪽 면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것, 때로는 걸어가고, 때로는 달려가고, 또 때로는 기어가는 것이 인생, 곧 인간의 삶이라니!
여기까지 생각한 것을 글로 적어보니, 인간(人間)과 사람, 삶, 살다, 살아가다, 살아내다, 죽다, 죽음, 주검 같은 단어에서 뜻과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글자 뜻을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어원과 용례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여기저기 살펴보고 찾아본다. 인간(人間)이란 단어는 한자 뜻 그대로 '사람 사이'란 뜻이다. 인생세간(人生世間)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그 뜻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란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서로 의지하며 사는 '세상'을 뜻한다. 이 말의 줄임말 인간이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일본식 한자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한다.
대학에서 가르친 과목 중에 '대인관계심리'가 있었다. 교재로 삼은 것은 '인간관계의 심리학'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대인관계란 말에서 '대'인(對人)이란 말은 영단어 interpersonal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인간관계란 말에서 인간(人間)은 human이란 영단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interpersonal이란 영단어는 person(사람) 앞에 접두사 inter-가 붙고 뒤에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 -al이 붙어 만들어진 것이다. 접두사 inter-가 between/among(사이)의 뜻이니 '사람 사이'[人間/間人]를 말한다. 반면 human은 존재(being) 그 자체로서 '사람'을 말한다. human relationship은 곧 사람(인간)관계다. interpesonal relationship을 대인관계라고 옮기니, 사람을 '대함'과 사람(인간)'관계' 둘을 말하여 중복과 혼선이 있음을 느낀다. 인간(사람) '사이'의 관계란 뜻은 interpesonal relationship이란 말이 더 정확히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말 대인관계와 인간관계, 이 둘 사이에 뉘앙스의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대인관계란 말이 사무적이고 이해관계와 같은 필요에 의한 관계처럼 느껴지는 반면, 인간관계란 말은 좀 더 따뜻하고, 푸근하고, 이익을 초월한 내적 필요에 따른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 과목을 가르치면서 뭔가 의문을 품었지만 해소하지 못했던 문제 하나를 이렇게 해결해 본다.
'사람'이란 단어의 어원은 하나의 정설과 여러 이설(異說)이 있음을 발견한다. 우선 국립국어원은 동사 '살다'의 어근인 '살'에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 '암'이 붙어 '사람'이란 말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정설로 삼고 있다. '살'에 명사를 만드는 또 다른 접미사 'ㅁ'이 붙어 '삶'이란 말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란 말이 먼저고, 뒤에 '삶'이란 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모두 동사 '살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동사 '살다'는 어근 '살'에 동사를 만드는 접미사 '-다'가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어근 '살'은 사람이나 동물의 뼈와 신경 따위를 싸고 있는 부드러운 '물질'이 기본 의미다. 더 나아가 생명을 유지시키는 기운 또는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살아가다, 살아내다, 살아지다 등의 어휘가 생겼다고 한다. 살아가다는 '그냥' 사는 것이고, 살아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 어원을 뒤지고 찾게 된 것은 살아'가'다란 말과 살아'내'다란 말을 구분해서 쓰야 할 것 같은 막연한 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설 중에는 '사람'과 '사랑' 두 단어의 어원이 같다는 설도 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함을 알겠다. 또, '살'에 붙은 접미사 '암'은 '알다'의 옛 표현인 '아다'의 명사형이라는 설도 있다. 사람이란 살면서 '무엇'인가 '알아가는' 존재를 뜻한다고 한다. 사람이 곧 '앎'의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을 알아가는 것일까. 하늘의 명령[天命], 윤리와 도덕 또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같은 형이상학적인 그 무엇이리라. 아무튼 자못 궁금하다. 사람을 한자 넉 사(四)와 볼 람(覽)으로 적어 사람이란 '사'방을 '보는' 존재라는 이설도 있다. 흥미로운 해석이다. 이 설들을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고 내 나름대로 결집해 본다. '사람'이란 곧 사랑으로 살며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보아 무엇인가 알아가는 존재다. 이 모든 과정을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로서 '살'(flesh), 생명력을 주었던 에너지/기운이 모두 '사라져' 없어지면 죽는다. 동사 죽다의 어근 '죽'은 죽(粥)이다. 죽은 쌀 등의 곡류, 채소, 고기 등을 넣고 끓여 만드는 음식이다. 이 재료들을 끓이거나 삶으면 죽어 죽이 되는 것이다. 삶이 '죽음'으로 바뀐다. 죽은 살을 '주검'이라고 한다. 살다의 '살'에서 중성[ㅏ]이 양성모음이니, 사람, 삶도 양성 모음이다. 죽다의 '죽'에서 중성[ㅜ]은 음성 모음이니, 죽음, 주검도 음성 모음이다. 사람과 삶은 양(陽)의 세계에 속하고, 죽음과 주검은 음(陰)의 세계에 속한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결국 볕에서 그늘로 가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현실의 삶을 성실히 살아야 한다. 성실히 살아야 하는 것은 결국 '잘' 죽기 위한 것이다. 그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견디고 이겨내며 '잘' 살아내야 한다. '잘 살'아내야 '잘 죽'을 수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진실로 '사랑'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어렵다(life is difficult). '잘' 산다는 것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우면,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하겠는가. 사람이 살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과 괴로움과 아픔을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인생을 드넓은 고통의 '바다'에 비유했으니, 그 바다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不可)는 아니래도 지극히 어렵다고 하겠다.
엄마의 태(胎)에서 나와[出] 사는[生] 것도, 늙는[老] 것도, 병드는[病] 것도, 죽는[死] 것도 모두 괴로움이다. 생로병사를 4고라 하지 않는가. 사람은 누구나 이런 실존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함이 있을 수 없다. 생과 사 그 사이에도 갖가지 고통이 끼어 있다. 사랑하는 것과 이별함으로써 오는 고통[愛別離苦], 보기 싫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과의 만남에서 오는 고통[怨憎會苦], 구해도 얻고싶은 것을 얻지 못함으로써 오는 고통[求不得苦], 오음/오온(=색-성-향-미-촉)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고통[五陰盛苦]이 있다. 여기에 4고를 더하여 8고라 한다.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 일상의 생활에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무지와 오해와 착각에서 오는 배신, 배신감과 보복 등을 숱하게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말과 글, 그리고 행동으로 서로 상처와 아픔을 주고받는 일이 셀 수없이, 너무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道]에 대한 가르침[敎]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멀고 어렵다.
공자는 배우고 때로 익힘의 기쁨[說], 동지가 멀리서 찾아옴의 즐거움[樂],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의 동요가 없는 군자(君子)됨을 말씀하셨다(<논어> 학이편). 맹자는 삼락(三樂), 곧 세 가지 즐거움을 말씀하셨다. 부모님 살아계심과 형제 무고함이 제1락이요, 하늘과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음이 제2락이요, 천하의 영재를 가르치고 기름이 제3락이라는 것이다(<맹자> 진심편). 성인 공자와 맹자가 이런 평범한 것에 기쁨과 즐거움을 말씀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좌절과 분노와 괴로움과 아픔을 겪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배울 것은 괴로움으로 가득찬 부정의 삶에 무릎꿇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그들의 자세를 우리들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들 자신의 삶을 부정보다 긍정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의 삶이 그렇게 쉽지도 녹록하지도 않다는 것, 괴로움의 바다에서 살아간다는 것, 장미빛의 낭만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실로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하루하루 매순간순간을 아껴 진정 성실하게 살아가고, 살아내야 한다.
2023년 10월 지금, 며칠 전 생일이 지나가고, 내 만나이가 58'살'이 되었다. 지금 내 나이쯤 되는 사람치고 모르고 있거나, 한번쯤 말해본 적이 없지 않았을 공자 말씀이 있다. 15세에 배움에 뜻을 둠[志學], 30세에 일어섬[立], 40세에 미혹됨이 없음[不惑], 50세에 천명을 앎[知天命], 60세에 귀가 순해짐[耳順], 70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음[從心所欲, 不踰矩]을 말씀하셨다(<논어> 위정편). 공자께서 성인(聖人)으로 도약하기까지 또는 성인으로서 자신의 전생애를 몇 마디 말로 요약하신 것이다. 나는 지천명의 끝자락에 서있고, 60'살'을 바라보는 망육(望六)의 나이다. 천명(天命), 곧 하늘이 내게 내린 명령을 '알'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명을 어렴풋이 '알 듯'하다. 물론 내 나름대로의 판단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말했다. 우리네 인생 "할아버지 얼굴 그리기"라고. 참으로 절묘한 말이어서 머리속에 깊이 새겨진다. 잘 살든 잘못 살든, 우리들 각자의 삶은 고스란히 얼굴에 표현(facial expression)된다고 믿기에, 깊이 공감한다.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당장 나는 어떤 내 얼굴을 그려왔고, 그려가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다른 사람들, 특히 아내와 아이들, 가족들, 머지 않아 만나게 될 아이들(?)에게 비쳐지는 내 얼굴은 어떤 것일까. 진실로 두렵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 가장 궁금하다.
2023년 10월 10일(화)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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