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 "동매월류"는 각각 오동나무[梧], 매화[梅], 달[月], 버드나무[柳]를 말한다. 상촌(象村) 신흠(申欽) 선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4구의 한시에서 첫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 시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이 시를 알게 된 것은 칼럼니스터 조용헌이 조선일보 자신의 칼럼 <조용헌살롱>에서 쓴 글을 읽고 나서다. 이 칼럼에서 조용헌은 뒤의 두 구만 알고 지냈는데 어느 분과의 만남에서 앞의 두 구가 더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작자가 상촌 선생이라고 했다.
이 시의 작자는 오동나무, 매화, 달, 버드나무, 이 넷이 각각 늙음, 추위, 이지러짐, 꺾임이란 고난과 시련을 겪는다고 했다. 이런 고된 삶을 버텨냄으로써 마침내 가락을 간직함, 향을 팔지 않음, 본래의 성질을 그대로 남김, 새 가지 돋음으로 승화한다고 노래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의롭고 올곧은 기개를 담대히 지켜내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져 심히 마음에 들었다.
2005년대 이곳 포천 문화원에서 매년 여는 전국휘호대회에서 이 시의 한글역문을 붓으로 써서 출품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몇 해 뒤(2009년?) 주위의 몇 사람과 의기투합하여 "더불학교"란 이름의 비영리 민간단체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친사회 기술(prosocial skills), 곧 사회(학교 등) 생활에서 남들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고 이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는 비영리사업을 시작했다. 대가없이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로 찾아가는 방식으로 "더불학교"를 운영했다. 교지와 교실이 따로 있지 않았다. 찾아간 그 학교, 그 교실이 가르침의 마당이었다. 이 사업에 필요한 비용은 자체적으로 마련했다. 그 일환으로 매년 5월에 열리는 "반월문화제" 때 여러 분의 작품으로 "바자회"을 열었다. 내가 이 시의 한글역문을 붓으로 쓰고 앞 네 글자를 전각(篆刻)하여 인영한 족자가 누군가에게 팔렸다. 물론 낙관은 "상촌 신흠 선생 시"였다. 멋모르고 그리 쓴 것이지만, 지금 생각건대 몹씨 부끄럽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며칠 전에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기억 속의 시가 너무도 흐릿하여 인터넷에서 이 시를 찾아야 했다. 블로그 등에서 아주 정말 많이 회자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위의 원문을 한글로 다음과 같이 옮겼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품고 / 매화는 한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대로이고, /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꺽여도 새 가지가 올라 온다." 이 시가 "상촌 신흠의 수필집 야언(野言)"에서 온 것이라 하여 그 출처도 명확히 밝혔다. 글쓴 사람에 따라 한글역문을 조금 고친 것도 여럿 있었고, 말을 더 보태 뜻을 분명히 한 것도 있었다. 여인/기녀와 관련지어 해설하고 시조 한 수 짓고 하나하나 세밀히 분석하여 해설한 글은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었다(다음을 클릭하면 읽어볼 수 있다. https://www.thevi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0).
나는 특수교육[학](special education)을 공부했고 심리학, 특히 행동심리학을 그 언저리에서 조금 공부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양학(洋學)/서학(西學), 곧 서양 학문을 한 사람일 뿐, 국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 한자와 한문에 대한 흥미, 특히 한시 읽기에 재미를 느끼며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다.
재작년 10월부터 작년 6월까지 우리 문중 족보편찬 일에 가담하여 선조님들에 관한 문헌을 열과 성을 다해 찾아보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규장각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등 을 직접 가지 않고도 그 곳의 옛 문헌을 열람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옛 기록을 찾아들어가는 통로를 조금 익혔다.
그리하여 <야언>을 찾아보기로 했다. 신흠 선생이 영의정까지 지낸 고관이자, 문장가이기에, 우선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종이 책은 절판됨)에서 찾아보니 신흠 선생 문집이 <상촌고>였고 제48권과 제49권이 <야언>이었다. 이 둘은 한국역문이 있어 모두 읽어보았지만, 이 시는 없었다. 몇 번 읽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검색어를 바꾸어 다시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 중에 블로그 운영자 이름이 "樂隱齋"(낙은재)인 분이 올 3월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 문제를 유려한 문장으로 지적했다. 이 시가 신흠 선생이 지은 시가 아니라는 것, 이 시를 퇴계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것은 두 선생의 생몰년을 볼 때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밝혔다. 이 시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진작하기 위해 지으신 시고, 따라서 그 작자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을 클릭하면 상세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https://tnknam.tistory.com/m/2240)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나대로 얻은 소득이 여럿이다. 앞 글 "인생"에서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불가의 가르침을 적고 난 후 문득 "군자삼락"이란 말이 생각났다. 찾아보니 신흠 선생 또한 삼락을 말했다. <야언>(제48권)에 삼락에 대한 글이 둘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다. 또, 사실관계가 틀렸다는 글을 쓴 그 분의 당호/아호가 공교롭게도 "낙은재"였다. "낙(樂)," 이 한 글자의 뜻을 재고(再考)할 과제를 얻었다. 글감 하나 더 얻었고, 또 풍성한 이야기 거리를 얻어낸 것이다.
"많이 묻되, (들은 것에) 의심이 들면 뺀다"(多問闕疑)는 논어 말씀은 가짜 뉴스가 판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울리는 경종이다. 우리는 가짜(fake)가 아닌 사실(fact)과 진실/진리(truth)만 말해야 한다. 가짜와 사실/진실을 가려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상식(common sense)으로 통하는 것도 종횡으로 사실관계부터 확인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속지 않고, 사기당하지 않고, 현혹되지 않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 16일(월)
ⓒ 2023 H.M. Han
p.s. <야언>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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