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학문이란 말, 한자로는 둘로 구분된다. 學問(학문)과 學文(학문)이다. 뜻이 다르다. 學問(학문)은 學(학)과 問(문)이란 둘의 행위가 합쳐진 말이고, 學文(학문)은 學(학)이라는 행위[事(사)]와 학의 대상[物(물)]인 文(문)이 합쳐진 말이다. 그래서 學問(학문)은 "배움"과 "물음"이다. "배워서 물음"과 "물어서 배움"이다. 곧 학습과 질문이다. 무엇을 배우고 묻는지는 이 말 속에 없다. 學文(학문)은 "배움"과 "글"이다. "글을 배움"이다. 우리가 "학문"이라 할 때에는 대개 學問(학문)을 말한다.
이 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學文(학문)이란 말이다. "글을 배움"을 풀어 보려 한다. 배움의 대상인 "글"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려 하는 것이다. "文"(문)이라는 한자는 본래 뜻이 "무늬"였다. "글(월)"의 뜻으로 사용됨이 많아지면서, 그 뜻을 넘겨주고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 그 글자가 紋(문)이다. 무늬의 뜻이다. 그렇지만 文(문)은 여전히 무늬의 뜻이 남아 있다. 먼저 ≪논어≫(論語)에서 사용된 "學文"(학문)에 대한 글을 읽어본다. 제1편 <학이>(學而) 제6장에 이 말이 딱 한 번 나온다고 한다.
子曰(자왈), 弟子(제자), 入則孝(입즉효), 出則弟(출즉제), 謹而信(근이신), 汎愛衆(범애중), 而親仁(이친인), 行有餘力(행위여력), 則以學文(즉이학문).
이 글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효(孝), 제(弟), 근(謹), 신(信), 애(愛), 친(親), 행(行), 학(學)이다. 효도함, 공손함, 삼가함, 믿음직함, 사랑함, 친함(가까이 함), 행함, 배움이다. 우리말로 대략 옮기면 이렇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린 사람들은 집 안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집 밖에 나가면 공손히 하고, 행실은 삼가하고 말은 믿음직하게 하고, 여러 사람을 넘치게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이런 일들을 행하고도 힘을 남겨, 문(文)을 배워야 한다."
집에 들어와 있을 때는 보모님께 효도하고, 집을 나서서는 남들에게 공손하라 했다. 홀로 있을 때조차 삼가함[愼獨(신독)]을 몸을 닦는 공부의 제일로 삼았으니, 삼가하여 행동하고 올바른 말만 하여 믿음을 주어야 한다. 대인관계의 폭을 넓혀 모두 사랑으로 대하되, 마음씨 좋은 어진 사람과 가깝고 친하게 지내라 한다. 이런 일들을 다하고도 힘이 많으면, 아니 힘을 남겨서 문[文]을 배우라 했다. 배움과 앎을 말한 것이다.
문(文]을 배움[學]을 학문(學文)이라 했다. 배움은 행위[事]고, 문(文)은 배움이란 행위의 대상[物]이다. 문(文)이란 예(禮)와 악(樂), 사(射)와 어(御), 서(書)와 수(數), 이 여섯을 말한다. 예(禮)는 관혼상제(冠婚喪祭) 등 '예법'이다. 악(樂)은 풍류와 '음악'이다. 사(射)는 활 쏘기, 곧 궁술(弓術), '궁법'(弓法)이다. 어(御)는 말을 부리기, 전차(戰車) 물기, 곧 마술(馬術), '마법'(馬法)이다. 서(書)는 붓글씨 곧 '서법'(書法)이다. 수(數)는 산학(算學), '셈법'이다. 시(詩)와 시경(詩經)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여섯을 육예(六藝)라고 한다. 문(文)의 배움이란 곧 육예의 배움이다. 문(文)과 무(武)의 구분없이 겸비하는 것이다.
문(文)은 무늬[紋]이다. 학문(學文)이란 무늬를 배우는 것이다. 천지자연 모두 무늬가 있다. 하늘의 무늬를 천문(天文)이라 하고, 땅의 무늬를 지문(地文)이라 하고, 사람의 무늬를 인문(人文)이라 한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에 모두 무늬가 있는 것이다. 하늘의 무늬를 배움을 천문학(天文學)이라 한다. 땅의 무늬를 배움을 지리학(地理學)이라 한다. 사람의 무늬를 배움을 인문학(人文學)이라 한다.
하늘이 텅비어[空] 있는 듯하지만,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星]이 있다. 28수(宿)라는 별자리도 있다. 낮에는 태양이 있고, 밤에는 달이 있다. 구름도 있다. 색깔도 있다. 맑고 밝음이 있는가 하면, 흐림과 어두움도 있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하늘의 무의도 달라진다. 하늘의 무늬를 잘 보고 잘 알면, 비가 언제 내릴지, 언제 천둥 번개가 칠지 미리 알 수 있다. 드라마 "미실"이 잘 보여주었듯이, 이런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면 왕권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산업의 하나가 되었다.
땅의 무늬는 산(山)과 골[谷], 언덕[原], 물[水]과 내[川] 같은 것이다. 산에도 길이 있고, 물에도 결이 있다. 땅의 무늬는 어디로 가야 할지 그 길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어느 길이 지름길인지도 알려준다. 어느 길로 가면 쉽고 빨리 갈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영화 "고산자"에서 잘 보여주었다. 전쟁에서 특히 중요하다. 적국의 땅 무늬를 잘 알면, 요충지가 어딘지, 어디서 싸워야 유리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중요 국가시설, 특히 군사시설 같은 것은 노출시키지 않는다. 우리나라 지리정보를 구글에 넘겨주지 않은 것도 이런 까닭이 있어서다.
사람의 무늬는 사람의 바깥에도 있고, 안에도 있다. 몸에도 무늬가 있고, 마음에도 무늬가 있다. 얼굴에 표정이란 무늬가 있다. 외모에도 무늬가 있다. 사람이 글씨에도 그 사람만의 무늬가 있다. 사람이 지은 글에서도 무늬가 보인다. 그 사람의 생각이나 신념 같은 것이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 했다. 사람의 몸, 말, 글과 글씨, 생각이란 무늬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글은 내면의 무늬, 생각이 외현의 무늬로 바뀐 것이다. 글를 안다는 것, 참으로 큰 힘이다. "한글창제"와 반포에 신하들이 그렇게도 저항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무늬를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힘이요 특권이요 권력이기 때문이다. 힘과 특권과 권력을 갖고자 한다면, 무늬를 잘 알아야 한다. 무늬를 잘 알면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문(文=紋)을 배워야 하는 까닭이다. ≪나도 무늬를 갖고 싶어≫란 그림책이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보고 읽은 책이다. 이제 생각해 보니, '무늬를 갖고 싶다'는 말은 '힘을 갖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 힘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다시 공자 말씀으로 돌아간다. 행하고 남은(남긴) 힘로 무늬를 배운다. 그렇게 무늬를 배워 좀 더 품격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늬를 더 잘, 더 많이 배워, 효도하고, 공손하고, 삼가하고, 신실하고, 사랑하고, 친애야 한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베풀고, 배려하고, 사랑하기 위한 힘이어야 한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기 위한 힘이어야 한다. 내 영혼이 떠나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무늬를, 글을 평생 배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23년 11월 11일(토)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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