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삶이란 앎의 과정이다. 앎이란 곧 모름을 전제로 한다. 앎이란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앎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배워서 아는 것이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고 그 답을 들어서 아는 것이다. 알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고면서 아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 모르고 있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살아가는 그때마다 늘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을 접하며 산다. 옛 사람들에 비해, 지금 사람들은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이 더 많은채 그렇게 살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것을 보고 듣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서양문물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옛 일이기도 하고 현재 진행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오늘날과 같은 현대 사회의 급변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다. 옛 선현들의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 모르는 것의 앎에 대해, 우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말한다. 공자 말씀이다. 또,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말한다. 연암선생 말씀이다. 이 두 말씀을 원문에서 찾아 읽는다.
먼저 공자 말씀부터 살펴본다. ≪논어≫(論語) 제2편 <위정>(爲政) 제11장에 있는 짧은 공자 말씀이다. 아래의 말씀이 전부다.
子曰(자왈),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可以爲師矣(가이위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것을 도탑게 익혀 새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의 뜻에 대한 해석을 둘로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옛 것을 익히는 것과 새로운 것을 아는 것, 둘로 나누어 풀이할 수 있다. 옛 것을 익혀 아는 것, 또 새로운 것도 아는 것, 곧 옛 것과 새로운 것, 이 둘을 알면 남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 것을 접했을 때 옛 것을 익혀 그것으로 미루어 새 것을 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둘은 연이은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而(이=말 이을) 자가 있으니, 뒤의 해석이 더 옳을 것 같다. '옛 것의 익힘'[溫古(온고])은 곧 '새로움의 앎"[知新(지신)]에 목적이 있다. 새로운 것의 앎을 위해 옛 것의 익히는 것이다. 하여간 이 말씀에서 중점은 '새로운 것'[新(신)]보다 '옛 것'[古(고)]에 있다.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옛 것에서 그 답을 찾으라는 말씀인 것이다.
다음으로 연암선생이 하신 말씀을 알아본다. 이 글은 박제가(朴齊家)의 문집에 서문으로 써준 글이다. ≪연암집≫(燕巖集) 제1권 <초정집서>(楚亭集序)에 실려 있다. 그 원문과 국역문 모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을 발췌하여 가져오고 생략한 부분에서는 구두점을 고쳤다.
論者曰(논자왈)。必法古(필법고)。世遂有儗摹倣像而不之耻者(세수유의모방상이불지치자)。... 法古寧可爲也(법고녕가위야)。然則刱新可乎(연즉창신가호)。世遂有恠誕淫僻而不知懼者(세수유괴탄음벽이불지구자)。... 刱新寧可爲也(창신녕가위야)。夫然則如之何其可也(부연즉여지하기가야)。吾將奈何無其已乎(오장내하무기이호)。噫(희)。法古者(법고자)。病泥跡(병니적)。刱新者(창신자)。患不經(환불경)。苟能法古而知變(구능법고이지변)。刱新而能典(창신이능전)。今之文(금지문)。猶古之文也(유고지문야)。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법고'(法古)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내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생기게 되었으니, 어찌 ‘법고’를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창신'(刱新)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가 생기게 되었으니, 어찌 ‘창신’을 해서 되겠는가.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나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면 문장 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 아! 소위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典雅)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법고'(法古), 곧 옛 것을 본받음과 ‘창신'(刱新), 곧 새롭게 창조함을 말했다. 법고와 창신 각각의 병폐를 앞과 뒤에서 모두 말했다. 그 중간에 옳은 글짓기가 무엇인지 자문하고, 아예 절필(絶筆), 곧 글짓기를 그만두라는 말이냐고 했다. 마지막 문장에서 글짓기의 옳은 방법을 밝혔다.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옛 것에 얽매이지 않고 변통(變通)할 줄 아는 것, 새로 창조하면서도 상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능히 아담하고 법도에 맞추는 것이다. 새로이 ‘법고'(法古)와 새로운 ‘창신'(刱新)을 말한 것이다. 그렇게 지은 글이 곧 옛 글과 같은 글이라고 마무리했다.
연암선생의 ‘법고'(法古)와 공자의 '온고'(溫古)는 같으면서 다르다. 둘 다 옛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에서는 다름이 없다. ‘창신'(刱新)을 위한 ‘법고'(法古)요, '지신'(知新)을 위한 '온고'(溫古)라는데 차이가 있다. 연암 선생의 '법고'는 새 것에 맞게 변통할 줄 '앎'이다. '창신'은 옛 법도를 벗어나지 않은 '창조'다. 옛 것을 '앎'에 그치지 않고 옛 것을 '창조'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이 둘에서 중심은 '창신'에 있는 것으로 읽는다. 박제가의 문집에 실린 글을 그렇게 평한 것이다. 이런 글짓기의 결과가 ≪연암집≫(燕巖集)이요, ≪열하일기≫(熱河日記)일 것이다.
연암선생이 말한 ‘법고'(法古)와 ‘창신'(刱新)이란 글짓기의 방법 둘은 비단 글짓기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붓글씨나 전각을 배울 때에도 그럴 것이고, 제례나 상례를 치를 때에도 그럴 것이다. 음식도 의복도 그럴 것이다. 가히 사람들이 어느 것이라도 새 것을 접할 때 두루 통용되는 방법일 것이다.
위의 이야기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한다. 심리학자 피아제(J. Piaget)의 인지발달이론이다. 자신의 세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지 관찰한 결과다. 인간의 '인지'발달을 감각운동기(0-2세), 전조작기(2-7세), 구체적 조작기(7-11세), 형식적 조작기(12세 이후), 네 단계로 구분했다. 연령은 중요하지 않다. 대략적인 것이다. 세상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도구, 곧 스키마(schema)에 따라 그렇게 나눈 것이다. 각 단계별 특성은 전문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중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생략한다.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계속 그 세상을 알고 이해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익숙하고 잘 아는 것일 때는 문제가 없다. 이런 상태를 '평형'(平衡 equilibrium)이라 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면, 평형의 상태가 깨어진다. (인)지적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호기심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이다. 하여간 평형을 깨트리는 이 '새로운 것'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방법 둘이 있다. 새로운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하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수정'을 통해 그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다른 하나다. '새로운 것'과 '미지의 세상'의 처리는 평형의 회복을 위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작용이다.
앞의 것을 '동화'(同化 assimilation)라 한다. 행동심리학의 '일반화'(一般化 generalization)와 같다. 뒤의 것을 '조절'(調節 accommodation)이라 한다. 행동심리학의 '변별'(辯別 discrimination)과 같다. 이 둘의 방법 중 어느 하나로 평형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응'(適應 adjustment)하는 것이다. 이런 평형과 불평형, 동화와 조절이 네 단계 안에서 그리고 단계와 단계 사이에서 수없이 일어나면서 '(인)지적'으로 '성장/발달'하는 것이다. 평형, 동화, 조절, 적응은 본래 생물학의 용어다. 이런 말을 쓴 것은 그가 본래 생물학자였기 때문이다. 동화/일반화와 조절/변별로 다름과 같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둘의 작용으로 우리는 무엇에 대한 '개념'(concept)을 갖게 된다.
우리의 앎이란 알지 못했던 것, 미지(未知)의 것, 새로운 것의 앎이다. '새 것'의 앎을 위해 '기지(旣知)의 것'에 대한 '온고'(溫故)와 ‘법고'(法古)가 필요하다. '기지(旣知)의 지식'과 '동화'(同化)하고 '일반화'(一般化)해도 되는 것은 그렇게 하면 된다.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에 머물러 안주하면 안 된다. '새 것의 앎'에는 '창신'(刱新)이 더욱 더 중요하다. '새 것'의 앎이란 '기지(旣知)의 것'을 바탕으로 삼되, 그것에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 '옛 것'에 대한 '조절'(調節)이 필요하다. '새 것'과 '옛 것'의 다름을 변별'(辯別)해야 한다. 조금의 차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옛 것'도 알고 '새 것'도 알아아 한다. 그렇게 될 때, 옛 것, 옛 법에 어긋나지 않는 '새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근대화와 함께, 우리들에게 소중했던 옛 것들을 너무도 많이 버렸다. 전래의 문화와 유산도 버렸다. 귀중하게 보존해야 할 것까지 분별함없이 내다버린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그 대신으로 일상의 사물들만이 아니라, 서구의 정치제도와 사상과 서양 학문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많은 것을 무분별하게 수입하는데만 열을 올렸다. 우리가 '창신'을 하기 위해 '온고'나 '법고'할 것은 무엇이며,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데 필요한 것들, 이 땅에서 조상 대대로 물려져 온 우리들 고유의 것들, 그런 것들이 지금 이 땅에 얼마나 남아 있는 것일까. 이런 것을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이 나만의 생각일까.
2023년 11월 18일(토)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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