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단통방에서 있은 일이다. 내가 쓴 글에 "무슨 멘토가 그래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문맥상 멘토(mentor)가 아니라 방송가에서 많이 쓰는 멘트가 바른 표현이다. 그런데 '멘트'라는 이 말이 영어에는 없다. 물론 한글은 아니다. 왜색(일본식) 영어도 아니고, 순수 100% 참 한국식 영어, 곧 콩글리스다. comment(논평[하다])에서 뒷말을 따서 쓰고 있는 것이리라. mention(언급하다)의 앞을 딴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명사형 접미사 '-ment'로 쓰는 것이 아닌 게 다행스럽다. 그냥 '말'이라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남'이라는 글자에서 점 하나 빼서 '님'이 되고, '님'에 점 하나 찍어 도로 '남'이 되었다는 노랫말도 있지 않은가.
이렇듯 점 하나로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말은 많이 있다. 사이버(cyber)와 사이비(似以非), 역시(too/also)와 역사(history), 이런 것의 몇 가지 예일 뿐이다. 점 하나가 아니라, 글자 하나 다르게 써도 뜻이 달라지는 말도 여럿 있다. 이유(理由)와 사유(事由)라는 말이 그렇다. 이것을 글감의 하나로 정해둔 것은 한참 전의 일이다. 어떤 것에 의문이 들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사전에서 답을 찾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전의 종류는 둘이다. 말의 뜻과 용례를 밝혀놓은 사전(辭典 dictionary)와 어떤 일이나 사물, 인물과 사건 등을 상세히 설명하는 사전(事典 encyclopedia)이다. 이 둘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사전 류는 되도록이면 구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와 사유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대개 까닭이나 원인 등의 뜻으로 쓴다. 이(理)와 사(事), 한 글자만 다르다. 이 둘을 붙여 이사(理事)란 말은 법인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위를 뜻한다. 검사(檢事), 판사(判事)란 말에도 사(事)자가 들어 있다. 변호사(辯護士)와 교사(敎師)는 각각 다른 글자를 쓴다. 옛부터 직위를 나타내는 말로 사(事)자가 많이 쓰였다. 성리학(性理學)이란 학문도 있었다. 인간의 성(性), 그것의 이(理)에 대한 학문이다. 당쟁이란 것은 결국 이(理)와 기(氣)를 둘러싼 논쟁일 뿐이다. 주자의 해석만 신봉한 우암 송시열은 그 밖의 해석자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본인 또한 부관참시의 형을 면치 못했다. 조선의 망국, 그 이면에는 우암을 비롯한 노론의 잘못이 있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도 있다. 이판(理判)은 참선, 경전 연구, 강론, 수행에 전념하여 불법의 포교를 담당한 스님, 곧 이판승을 지칭하는 말이고, 사판(事判)은 생산에 종사하고 사찰의 업무를 꾸려가면서 주로 사무행정을 담당한 스님, 곧 맡았던 사판승을 지칭하는 말이다. 조선 시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고 숭유억불 정책을 편 결과다. 스님의 한양 도성 출입조차 금하였기에, 천민과 다름없는 처우를 받았다. 이판사판이란 말은 끝장까지 가보자는 것으로 쓰고 있지 않은가. 옛 은사님과 공저하는 중에 알게 된 불교 용어 중에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란 말이 있다. 이사와 사사를 구분하고 있다. 이사와 사사에 걸림이 없는 법계를 말한다.
불교 문헌은 사(事)와 이(理)를 다음의 뜻으로 해석한다. 사(事)는 상대 차별한 '현상'을, 이(理)는 절대 평등한 '본체'를 가리킨다. 사(事)는 '현상계'를, 이(理)는 그 현상계의 '본질'을 가리킨다. 사(事)는 '모든 현상'을, 이(理)는 '참된 실재'를 가리킨다. 사(事)는 '차별 현상'을, 이(理)는 '깨달음의 진리'를 가리킨다. 사(事)와 이(理)를 합한 사리(事理) 또는 이사(理事)를 '진실' 또는 '현상계[事]와 그 본질[理]의 진리'라는 해석도 있다. 이(理)는 사물(事物)의 정당한 조리, 곧 이치(理致)를 뜻하는 말이다. 영어로는 reason이나 logic에 해당한다. 이(理)의 상대어 사(事)는 일과 물건, 세계의 구체적·개별적 존재 등 현상(現象)의 사물(事物)을 뜻한다. 영어 thing, object, matter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이 둘을 묶어 보통 이사(理事) 또는 사리(事理)라고 하지만, 구분해야 할 때도 많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9%80_%EC%82%AC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작심한 날부터 단독방 일 그 사이에 '시말서'(始末書)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자 뜻 그대로 말하면,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글로 쓴 문서를 말한다. 이 말은 일본식 용어다. 이른바 '사쿠라 훈민정음'이 되고 만다. '경위서'(經緯書)라는 좋은 말이 있다. 날줄과 씨줄로 베를 짜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경도와 위도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때, 우리는 '사유서'(事由書)를 쓰기도 한다. 갑작스런 일로 결강하거나 휴강한 때에는 사후에 그리고 수업일시에 다른 일로 수업하지 못함을 미리 안 때에는 사전에 '사유서'를 제출해야 한다. 내가 듣고보는 것이 적은 탓일까. '이유서'란 말은 듣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항소이유서'(抗訴理由書)와 ' 항고이유서'(抗告理由書)란 문서가 있음을 처음 본다. 앞의 것은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에서 제1심의 종국 판결에 대하여 불복하여 상소할 때 제출하는 문서를, 뒤의 것은 재판 절차에 관한 부수적 사항에 대한 소송법상 법원 또는 법관의 판단(결정이나 명령)에 불복할 때 제출하는 문서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불복이유서'(不服理由書)하고 작성하는 요령까지 있다. 모두 법원 판결과 관련된 것이다. 앞의 불복이유서는 사실관계에 대한 다툼을 위한 것으로, 뒤의 것은 절차·법리에 대한 다툼을 위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 분야의 국가기관 국립국어원이 서비스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 본다. 이유란 단어가 여섯 있고 네 번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다. 명사 이유4(理由): [이ː유]로 발음하고 참고 어휘로 귀결(歸結)을 제시하고 있다. 뜻을 셋으로 풀이하고 용례 몇 가지를 들고 있다. <1> 어떠한 결론이나 결과에 이른 까닭이나 근거. "당한 이유, 이유를 대다, 이유를 묻다"처럼 쓰이고 "원인"(原因)이 비슷한 말이다. <2> 구실이나 변명. "사사건건 이유를 달다, 무슨 이유가 그리도 많으냐"처럼 쓰인다. <3> 철학 용어. "존재의 기초가 되거나 어떤 사상이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조건. 좁은 의미로는 결론에 대한 전제나 결과에 대한 원인을 이른다"고 하고 근거가 비슷한 말이라 한다. 사유는 11개 단어가 있고 여섯 번째가 해당된다.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명사 사유(事由): [사:유]로 읽고 뜻은 "일의 까닭"이고 "연고, 연유, 정유"가 비슷한 말이다. "사유를 묻다, 사유를 밝히다" 등으로 쓰인다. 어느 것도 서로 관련짓지 않았다. 참으로 초라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두고 기록정신을 높이 산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단어 하나까지 언제 '처음' 쓰여진 것을 밝히고 있는 영어사전(우리가 영영사전이라고 하는)과도 비교할 수 없다. 거금 들여 구입한 3권의 이 종이사전, 발간 이후 더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한글전용정책에 대한 언급을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자를 우리말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말만은 해야겠다. 수업할 때 영어 쓰면 학생들이 기겁한다. 한자까지 쓰면 더하다. 쓰기는 커녕 읽을 줄도 모른다. 한자와 한문은 한중일 동양삼국의 공통문어(文語)다. 지금 그 원형을 지키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중국은 번체라 하여 버리고 간체자를 만들어 쓴다. 일본은 제 방식대로 속자나 약자를 만들어 쓴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한글과 함께 한자를 병용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아니더라도 글은 이중언어(bilingual) 사용자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이 머리좋은 것이 이 때문인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한자, 한문 공부해야 한다. 국중(克中), 극일(克日)하는 지름길이다. 그 공부가 한글로만 표기된 단어들, 숙어들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바탕공부가 튼실해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자공부를 해야 한다고 내가 주장하는 까닭이다. 이유(理由)요, 사유(事由)다.
2024년 11월 28일(목)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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