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harset="UTF-8"> [49] 책의 운명,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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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

[49] 책의 운명, 어떻게 될 것인가

by I'mFreeman 2024. 11. 22.

내가 자원하여 봉사한 헌책방 주인이 말했다. 책을 팔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중학교 과학 과목이었던 물상(物象) 교과서와 참고서를 한자를 몰라 팔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자 공부를 지독하게 했다고 했다. 대략 3000자 쯤 안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렇게 책과 인연을 맺고 책을 읽고 책을 팔며 살았던 것이다. 지금의 그는 그 옛날의 초심을 잃은지 오래되어 보인다. 그에게 책은 더는 책이 아니다. 그저 돈을 받고 파는 물건일 뿐이다. 책을 팔러 오는 사람도, 책을 사러 오는 사람도, 또 그 책도 그는 돈으로 본다.
 
    책(冊)은 본래 죽간을 평평하게 다듬어 글을 적고 가죽끈으로 매어놓은 물건이다. 한자 모양 그대로다. 책장에 꽃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북등, 죽간, 돌, 쇠에 쓰여지던 글[書(서)]이 종이의 발명으로 비로소 종이에 쓰여지게 되었다. 글 서(書) 자에서 책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서(書) 자는 책(冊) 자와 달리 달리, 서 있지 않고 누워 있는 모습이다. 종이에 글을 써고 그 종이들을 모아 오른쪽애 구멍을 뚫고 실로 묶은 것이다. 오늘날의 책과는 완전히 반대다.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읽고 쓰던 책이 아니라, 왼쪽 위에서 아래로 읽고 쓰는 책으로 변모한 것이다. 옛날 책은 책시렁에 꽂아두는 것이 아니라, 눕혀 두었다. 옛 그림을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책은 귀중한 물건이었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금속활자 발명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목판본은 그 제작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책으로 만들 원고를 정갈한 글씨로 써야 한다. 그 전에 판목으로 쓸 나무를 구해 충분히 잘 말려야 한다. 나무 한 그루에 판이 몇이나 나올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정서 과정을 거친 원고를 판목에 입히고 칼과 끌 같은 것으로 새겨야 한다.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네 모퉁이에 작은 못 같은 것을 박아 조정시킨채. 원고에 글자가 빠졌거나 글자를 잘못 새기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나무판에 새기는 일이 끝나면, 각 판들을 종이에 인출한다. 그 종이를 반으로 접은 다음 모두 모아 구멍을 뚫고 합하고, 실로 꿰매어야 제책이 완성되는 것이다. 100권을 출간한다면, 인출부터 제책까지 100번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목활자본은 상대적으로 시간과 비용이 저렴한 편이다. 나무로 글자(활자)를 만들고 그 활자를 틀에 끼워넣는 방식으로 조판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과정은 목판본과 거의 같다. 목활자로 조판하다 보면(금속활자로 마찬가지임) 상하가 뒤바뀐 경우 또는 좌우가 뒤바뀐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제자리에 딱 맞게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반복된 인쇄로 활자 자체가 헐어 알아볼 수 없을 수도 있고, 이미 만들어 놓은 활자 중에 원고에 쓰인 글자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앞의 경우 때문에 교정 부호가 생셨다. 뒤의 경우는 활자를 다시/새로 만들어야 한다. 표나 그림 같은 것이 들어가면, 그 과정이 훨씬 더 복잡해진다.
 
    이렇듯 제작하기 어렵고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가는 것이 책이니,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이른바 '양반'이 아니면, 책을 소장할 수 없었다. 절친한 친구에게 책이 있으면 빌려 읽어야 했다. 그리고 붓으로 베껴 적어야 한 권의 책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많은 필사본이 존재하는 이유다. 물론 절친한, 아니 그 이상을 넘어 지기(知己) 사이가 아니면, 책을 빌려 달라는 소리도 할 수 없었고, 책을 빌려주지도 않았다. 그 제작 경위를 안다면,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차를 빌리고 빌려주는 것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 하나가 있다. 제목은 차서사치다. 책을 아껴 빌려 달라 해도 빌려주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어리석음이요[借書四癡惜一癡(석일치)], 빌려달라고 해서 책을 빌려주는 것이 두 번째 어리석음이요[借二癡(차이치)], 빌려준 책을 되찾으려고 돌러달라고 말하는 것이 세 번째 어리석음이요[索三癡(색삼치)], 돌려달라는 말에 책을 돌려주는 것이 네 번째 어리석음이라고 했다[還四癡(환사치)]. <명수지문>(名數咫聞) 권제6에 있는 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이와는 정반대의 어리석은 이가 있었다. 책만 보는 바보[간서치(看書癡)], 그의 이름은 이덕무다. 서얼 출신으로 과거를 볼 수 없었지만, 정조 임금이 그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했다. 눈물 겨운 사연을 많이 남겼다.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백탑파의 일원이다. 그는 구서(九書)를 말했다. 입으로 책을 읽는 독서(讀書), 눈으로 책을 보는 간서(看書), 베끼면서 읽는 초서(抄書), 책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으며 읽는 교서(校書), 책의 가치를 평가하면서 읽는 평서(評書), 직접 글을 짓는 저서(著書), 책을 소중히 보관하는 장서(藏書), 좋은 책을 빌리는 차서(借書),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포서(日暴書)가 그것이다. 그는 빌리고 말리는 수고까지 포함하여 이처럼 책을 사랑하였다. 재미난 것은 그의 동지요 벗이었던 이서구(李書九)의 이름과 글자의 순서만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처럼 책을 사랑하는 자가 또 있을까. 책은 더 이상 귀중한 보물이 아니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너무도 흔한 물건이 되었고, 너도나도 작가인 시대다. 수많은 사람들이 쉬이 사고 쉬이 버리는 물건이 되었다. 성경도, 불경도, 사서삼경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할 필요도 없다. 도서관에 가면 다 있다. 대학 교수들도 퇴직할 때, 그간 소장하던 책들을 이사짐센터에 연락해 한꺼번애 모두 버리고 떠난다. 공립이든 사립이든 책을 기증받지도 않는다. 도서관에서 매년 몇 만권의 책을 정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전자책(e-book) 발행의 활성화와 함께, 종이책을 구입하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 마침내 학교에서도 인공지능(AI) 교과서를 쓰겠다고 한다. 옛말에 책 속에 밥도, 돈도, 지위도, 배우자도 모두 있다고 했다. 책과 학교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이런 종이책의 처지를 바라보는 내 심정은 참으로 씁쓸하다. 종이책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못 걱정되는 요즈음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2024년 11월 22일(금)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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