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은 돌일 뿐이다. 돈과의 교환 가치가 있을지언정, 돈이 될 수는 없다. 성철 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취임할 때 하신 말씀이 있다. 너무도 유명한 말씀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리저리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지 않은가. 이 말씀이 실린 책에서 수십 번 읽어봤다. 이 말씀이 어찌하여 수많은 세인들의 입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산은 산이지 물이 아니지 않은가. 물은 물일 뿐 산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성철 스님이 하신 말씀의 한글 원문은 이렇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출처 : 법보신문(hhps://beopbo.com)
성철 스님의 말씀, 곧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말씀은 중국 송나라 때 청원 유신(靑原惟信) 선사의 법어를 인용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 원 출처가 이와 같은 줄은 그 뒤에 알았다. 그 말씀은 이렇다. "이 노승이 30년 전 아직 참선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곧 산이고 물을 보면 곧 물이었다[看見山就是山(간현산취시산), 看見水就是水(간현수취시수)]. 그 뒤에 어진 스님을 만나 선법(禪法)을 깨치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見山不是山(현산부시산), 見水不是水(현수부시수)]. 더욱 정진하여 불법 도리를 확실히, 철처히 크게 깨닫고 난 지금은 그 전처럼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依前見山只是山(의전현산지시산), 見水只是水(현수지시수)]”(출처: "생태적지혜"[https://ecosophialab.com]). '見'은 사람[人] 위에 눈[目]이 있는 형상이다. 여기서는 '보다'의 뜻이 아니라 '보이다'의 뜻이다. '견'이 아니라 '현'으로 읽는다.
지금 이 말씀을 꺼내는 것은 진리나 깨달음과 같은 난해한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세상 만물을 보거나 들을 때, 보이는 그대로, 들리는 그 대로 보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듣는 그 사이에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이나 기억이나 추측이나 기대와 같은 것들을 개입시켜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심리학에서는 '인지'[cognition]이라 함)이 개입될 때, 우리는 만물의 진상을 제대로 보거나 들을 수 없게 된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오해하고, 망상하고, 괴롭고, 고통스럽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삼독(三毒),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이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도 대략 이런 것이리라.
이처럼 평범하고 당연한 말씀을 알아듣겠냐고 일갈하신 것은 실상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자로서 25개 성상의 세월을 보낸 대진대학교는 왕방산 자락에 있다. 그곳에 대학 캠퍼스를 조성할 때, 경사진 산자락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건축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돌들, 수많은 바위들이 나왔다. 그 바위들을 각 건물 앞에 배치하고 건물의 이름을 새겼다. 행동심리학 수업을 할 때, 학생들에게 곧잘 물어본 질문이 있다. 저 바위들이 바위로 보이느냐고. 그러면 무슨 말인가 하고 어지둥절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 그 나이에는 앞의 유신 선사처럼 바위가 그저 바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바위들을 조경업을 하는 분들, 석물업을 하는 분들이 본다면, 어떠할까. 적어도 그 학생들처럼 그저 바위돌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돌을 있는 그대로 그냥 '돌'(石 stone)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돈'[錢 money)과 같이 교환 가치를 지닌 물건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밥 먹으러 들어서는 손님을 보는 식당 주인이, 책을 사려고 서점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는 책방 주인이 상대를 그냥 그렇게 '한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얼마짜리 손님'들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눈과 귀를 가로막고 속이는 그 어떤 무엇이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을지 모른다. 그 무엇이란 우리가 가진 재산일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일 수도 있고, 심지어 명함 한 장일 수도 있다.
오늘도 책방에서 봉사했다. 그 책방에서 장시간 봉사하고 있는 나를 책방 사장과 책방 손님들과 이웃 가게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찌보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상관할 수도 없고 상관할 생각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有其竹(유기죽)], 본래 생긴 그대로[生其竹], '한 사람'으로 존중받기를 바랄 뿐이다. 어제 늦은 시각에 '처음' 만나 오늘 새벽 1시 반까지 둘이서 서로 자기 생각을 공유했던 그 분, 그 분과의 '만남'(encounter) 그 자체가 소중하게 여겨진다. 돌은 돈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2024년 11월 13일(수)
ⓒ H.M.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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