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성씨 중에 '한(韓)'씨가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다.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황해도에 속한 군(郡) 중의 하나다. 지금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에 속해 있다. 1991년에 발간된 북한지도를 보면, 평양과 원산(금강산) 간 고속도로가 곡산을 지나간다. V자 모양이고 꼭지점이 곡산이다. 본관이 곡산인 성씨는 한씨 외에 강(康)씨, 노(盧)씨, 연(延)씨 등이 있다. 땅이름처럼, 골 깊고 산 높은 곳인 모양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하지 않는가. 동학을 이은 천도교의 소식지에서 이런 얘기가 전해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곡산 땅에 들어가는 사람은 두 번 운다고. 들어갈 때 너무 힘들어 울고, 나올 때 인심 좋은 그곳을 떠나기에 운다는 것이다. 곡산부사를 지낸 다산 정약용 선생의 <북방산수기>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투박하지만 선량한 마음씨.
내가 곡산 한씨의 한 명이라고 지금 말하고 있지만, 지금과 달리 문중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지난날 호적등본에 그렇게 적혀 있었기에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아마도 초등학생 때, 백부 댁 서재에 홀로 들어가 3권으로 된 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전인지 그 후인지 정확치는 않지만, 집안어른 한 분이 우리가 살던 집에 오셔서 뭔가를 적어간 사실이 있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뒤에 안 것이지만, 바로 그 3권의 책이 1975년에 간행된 곡산한씨세보였고[대동보에 해당하며, 천편-지편-인편으로 구성됨), 집안어른이 오신 것은 수단을 받아 족보에 올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적어가신 내용은 족보에 올릴 나의 이름(한글, 한자)과 출생년월일, 어머니의 본관(외할아버지 성함)과 생년월일이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을 통해 반복적으로 익혔어야 했을 것을 조금도 익히지 못한 채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 아비 같은 아비를 만나지 못한 탓이 컸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아내가 석사학위를 받은 그날, 지금의 장인께서 성명과 본관을 물어보셨다.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입에 붙도록 충분히 익히지 못했고 긴장까지 더해져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로 내 나름대로 뿌리/근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도서관에서 한국의 모든 성씨를 간략히 정리한 책도 살펴보고, 시리즈의 일부로 한두 성씨만 요약한 책도 사서 보았다. 이 모든 책이 곡산한씨가 청주한씨에서 분화된 여러 본관 중의 하나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도로 편입으로 인한 토지 수용 건과 화수회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국립중앙도서관까지 가봤지만 단 한 권의 책밖에 없었다(뒤에 "파보"임을 알았다). 한자 실력과 보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하여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헤어진 지 십수년 만에 선친과 재회했다. 이 문제에 대해 여쭈었다. 얼마 뒤에 "경주 건천 금척리(제극정)"란 답이 돌아왔다. 찾아갈 일만 남은 것이다. 2017년 1월 큰 아이가 제대한 날, 우리 가족 다섯 명이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경로당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알고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휘밖에 없었다. 세계도를 봤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세계도 하단에 할아버지와 같이 영(永)자를 쓰는 분들의 성함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몇 쪽 넘기기도 전에 찾을 수 있었다. "永(자)秀(자)-대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본관이 곡산인 다른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그 이전까지 내가 아는 곡산 한씨는 선친과 백부, 숙부, 고모, 그리고 누나, 여동생 둘, 사촌 종형제, 또 우리 아이 셋이 전부였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많고 많은 한씨들은 모두 청주 한씨였다. 내가 한씨임을 아는 사람들은 청주가 본관이겠다 말했다. 내 이름을 물어 성씨가 한(韓)임을 알게 된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대단한 양반 가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곡산이라고 고쳐 말하고 청주 한씨와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곡산 한씨도 있나 하고 재차 물으며 처음 듣는다고 말했다. 그 뒤 언젠가부터는 그냥 듣고만 있는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주 한씨가 되는 것이 이처럼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차라리 나을 수 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대한민국의 성씨와 본관을 설명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책들에 담긴 내용은 대략 이렇다. 곡산 한씨와 청주 한씨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지 않거나, 곡산 한씨가 청주 한씨에서 분파된 본관인 듯 다루거나, 청주 한씨에 비해 지극히 소략적으로 소개하는 선에서 그친다. 그렇다. 그리하여 청주 한씨를 포함하여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한씨의 본관이 청주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씨는 모두 본관이 청주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전혀 예외가 없었다. 곡산 한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를 일러 '한씨단본설'이라고 한다. 이 설은 그저 잘못된 하나의 '설(說)'일 뿐이다.
청주 한씨의 시조는 후삼국시대 청주 지역의 호족이었던 한란(韓蘭)이다. 고려가 개국한 때(918년) 공신책봉을 받았다. 성인 기자(箕子)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영조실록에 그와 관련된 영조대왕의 말씀도 있다. 선우씨와 기씨를 혈족이 같은 것으로 본다. 이 땅에서 삼한(三韓)부터, 초기부터 명문가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무단편입이 많았던 모양이다. 족보를 일찍이 만들었고, 이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문헌이 전한다. 조선시대에 왕후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계유정란에서 압구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책사로 이름을 날렸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많은 덕에 많이 알려져 있다. 요즈음에도 한씨가 아닌 연예인들이 예명으로 '한○○'으로 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적 조치가 있었다("갈색 추억"의 주인공 한예진 씨는 곡산 한씨다).
곡산 한씨의 시조는 남송 영종이 팔학사의 수반으로 고려에 보낸 한예(韓銳)다. 바다를 건너 고려에 온 것이 희종 2년(1206년)의 일이다. 청주 한씨와 시작부터 300년 가량 차이가 나는 것이다. 7세 한권(韓卷)에 이르기까지 독자였다는 점과 계유정란, 단종 복위 실패, 금성대군 옹립 등에서 수양대군과 반대편에 길을 가게 되면서 영천 청통을 거쳐 경주 금척에 세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실본(失本)한 이가 많았고, 농서를 자식교육의 방침으로 삼았기에 과거 합격자도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종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까닭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고려로 온 시기와 관련하여 정말 묘한 것은 남송이 금나라의 침략과 조공 문제로 시달리던 중에, 당시 실권자였던 한탁주(韓侂胄, 1152-1207년)가 주도한 금나라 정벌 전쟁이 결국 실패하고 사미원에 의해 1207년 피살되었다는 점이다. 실증주의사관으로는 고증이 어려울 것이지만, 그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우리 문중에 중차대한 문제이니만큼, 다음 기회에 더욱 보강할 것을 다짐한다.
2024년 11월 9일(토)
ⓒ H.M. Han
1. 한국인의 성보 한국성씨총람편찬위원회(편). (1993). 한국인의 성보. 서울: 한국실록출판문화사.
2. 한국인의 족보 한국인의족보편찬위원회(편). (1978). 한국인의 족보 (중판). 서울: 도서출판 일신각. (문중별 감수)
3. 최광실 (편). (1989). 한국족보대전(丁), 서울: 도서출판 청화. (대작으로 가장 상세한 정보 제공)
4. 고려문화사 편집국 (1995). 한국인의 족보. 서울: 고려문화사. (유 책임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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