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疾書): 거칠게 쓴 글55 [15] 작호법(作號法), 또는 호의 분류학 내게 몇 분의 은사님이 계신다. 석박사학위과정부터 지금까지 나를 좋게 생각하시고 나 역시 존경하고, 특수교육(학)에 눈을 뜰 수 있도록 넓은 가르침을 주신 지도교수님은 심재(心齋)를 아호로 쓰신다. 행동심리학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주신 다른 교수님은 송담(松潭)이란 호를 쓰신다. 두 분의 아호 모두 같은 분, 은사님이 지어주신 것이다.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또 다른 교수님의 아호 평촌(坪村)은 자호한 것이다. 어린 시절 사셨던 고향 마을 이름이라 하셨다. 내게 서예를 가르쳐주신 선생은 장포(藏抱)로 자호하여 쓰신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자로 살아온 학자들은 정년에 즈음하여 기념문집이나 논총 같은 것을 후학들이 만든다. 문집이나 논총의 제호는 보통 "○○(아호) ○○(성명) 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과 같은.. 2023. 10. 31. [14] 노년의 삶, 할 것과 하지 말 것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느듯 60세 가까운 나이가 되고 보니, 몸의 기력도 나날이 쇠해지고 마음도 늙어 예전같지 않다.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 덤성덤성하고 남은 것마저 점점 희어간다. 얼굴에 주름도 늘고 깊어지고 검버섯 같은 것도 새로 돋아난다. 본시 지금까지 거울 볼 겨를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넉넉해도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낯설기만 해 아예 보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덮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젊었을 때 득의(得意)의 호시절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시절이 다시 오리라는 것은 생각 밖의 일일뿐이다. 그 시절의 일들이 추억으로만 남았고, 그 기억마저 흐릿하다. 이처럼 초로(初老)의 노인이 되어 가니, 노년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아들, 딸 모두 장성하여 내 할 일은 많이 남.. 2023. 10. 30. [13] 양주(洋酒), liquor와 liqueur 서양의 과학기술 그리고 천주교가 중국에 들어왔다. 뒤이어 조선에도 들어왔다. 서양 학문을 이르는 말이 필요했다. 중국에서는 양학(洋學)이라고 했다. 이 땅에서는 서학(西學)이라고 했다. 이제 다시, 서양 학문에 대응하는 우리 학문을 이르는 말이 필요했다. 조선의 유자(儒者)에게 학문이란 곧 성리학이었기에, 서양 학문에 대응하는 우리 학문을 이르는 말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동국(東國)이라 했음에도, 이 땅의 학문을 동학(東學)이라 하지 않고 국학(國學)이라 했다. 동양삼국의 학문을 동양학(東洋學)이라 했다. 근자에 와서 이렇게 부르고 있다. 서양인들이 서양에서 만든 술, 서양인들이 즐겨 마시던 술을 우리는 양주(洋酒)라고 한다. wine은 와인으로, beer는 맥주로 따로 부르니, 양.. 2023. 10. 28. [12] 이름[名], 그리고 작호(作號)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남들과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남들과 관계함이란 곧 소통이다. 남들과의 소통에서 그를 부르거나 또 다른 남을 가리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나, 너, 그와 같은 말로 부르거나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소통을 정확히 하려면, 그 대상을 특정해야 한다. 부르는 말[號稱], 가리키는 말[指稱]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름을 짓는다. 우리는 '이름'으로써 그를 부르고 가리키는 것이다. 1. 이름, 동서(東西)의 차이 사람의 '이름', 이것을 '이름'에 있어 동(東)과 서(西) 간에 몇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지금 곰곰 생각해 보니, 서너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차이점 하나는 이렇다. 우리에게 이름이란 성(姓)을 제외한 명(名)을 말한다. 우리에게 .. 2023. 10. 27.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다음